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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샤비로: 오늘의 에세이-사변적 실재론: 입문글

 

 

사변적 실재론 - 입문글

Speculative Realism - a Primer

 

―― 스티븐 샤비로(Steven Shaviro)

 

 

지금까지 근대 서양 철학 ― 최소한 1781년에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가 《순수 이성 비판》을 출판한 이래로 ― 은 존재론보다 인식론을 우위에 두는 경향이 있었다. 존재론은 존재의 본성에 관련된 것으로, 가장 근본적인 층위에서 무엇이 존재하는지 규정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인식론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을 우리가 어떻게 아는지와 관련되어 있다. 그것은 세계를 알 수 있는 우리 능력의 근거와 한계를 면밀히 조사한다. 인식론이 존재론에 앞서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세계가 어떠한지에 관한 주장을 제시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런 주장들에 대한 근거를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 그것들이 참이라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는지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일 뿐이다. 칸트는 당대의 철학이 그런 근거를 제공할 수 없었다고 주장했다. 그것은 관찰이나 경험적 증거에 매이지 않은 채로 순수한 논리적 연역에 의해 형이상학적 필연을 발견한다고 주장할 정도로 독단적이었거나, 아니면 경험적 사실과 주관적 체험에 의거하지만 이런 특수한 사실들과 직접적인 경험을 넘어서 일반화할 수 없다고 주장할 정도로 회의적이었다. 이런 경향 둘 다에 맞서서 칸트는 철학은 자체의 기초를 면밀히 조사하여 설명함으로써 시작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철학이 이것을 행하지 못하는 대신에 형이상학적 사변에 직접 착수한다면 넌센스만이 초래될 것이다. 칸트의 경우에, 또 그때 이후 대부분의 철학자들의 경우에,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그리고 무엇이 그것이 참이라는 우리 주장을 정당화하는지 설명할 수 있을 때에만 우리는 무언가를 알고 있다(그저 무언가를 맹목적으로 믿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할 수 있다.

 

원칙적으로 존재론에 대한 인식론의 이런 우위는 나무랄 데가 없는 듯 보인다. 그런데 실제로 그것은 꽤 문제적인 것이 되었다. 그것은 우리가 결국 우리가 만나는 세계 속 사물들에 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들을 만나는 우리 나름의 과정에 관해 말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칸트는 '사물 자체'는 알 수 없는 것이며, 우리가 정말로 확신할 수 있는 것은 현상 ― 사물들이 우리에게 현시되는 양태 ― 뿐이라고 역설한다. 칸트 이후 수 세기 동안 이것은 일종의 공통 감각이 되었다. 오늘날 우리는, 우리가 세계에 적용하는 독자적인 부과물들의 왜곡 렌즈들을 결코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사물들을 그것들이 실제로 존재하는 대로 볼 수 없다는 것을 당연히 여긴다. 오늘날 이들 부과물은 칸트의 범주들을 넘어서 언어, 우리의 특수한 인지 메커니즘, 그리고 우리의 문화적 편향과 이데올로기 같은 것들을 포함한다.

 

인식론적 성찰은 중요한데, 그것 덕분에 우리는 우리 자신의 편견과 의심받지 않은 가정들을 인식하게 된다. 그런데 동시에, 역설적이게도, 그런 성찰 때문에 우리가 이런 편견과 가정들에서 벗어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게 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시각에 갇혀 있어서 여타의 견해를 취할 수 없다. 어쨌든 우리가 모든 것 ― 다른 사람들, 다른 살아 있는 존재자들, 그리고 우주 속 다른 것들 ― 을 우리 자신의 모습대로 고치는 것의 위험에 관해 걱정하는 것이 사실상 중요하고 필요하다. 그런데 이런 위험을 피하기 위해 우리가 치르는 비용은 결국 우리는 우리 자신에 관해서만, 그리고 우리 자신에게만 말한다는 것이다. 이 과정을 충분히 멀리 밀고 가면 우리는 세계란 인위적인 사회적 또는 언어적 구성물일 뿐이며, 세계는 우리 자신이 그것에 집어넣은 것으로만 이루어져 있다고 믿게 된다. 20세기 말 리처드 로티(Richard Rorty), 그리고 더 미묘한/복잡한 방식으로,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 같은 사상가들의 탈근대적 철학의 경우에는 이런 구속복에서 벗어날 길이 전혀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을 지적하고 개탄하는 것뿐이다. 우리는 결코 우리 자신을 벗어날 수 없고, 따라서 진정으로 다른 무언가를 만날 수 없다.

 

21세기에 철학적 사변의 부활은 이런 딜레마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이다. 그것은 인식론의 칸트적 우위를 무화시키고자 한다. 그런데 그것은 매우 칸트적 이유에서 이것을 행한다. 칸트 자신의 인식론의 격상과 형이상학적 사변의 금지는 독단적 합리주의라는 스킬라와 경험론적 회의주의라는 카리브디스 둘 다를 피하고자 하는 시도에서 비롯되었다. 현재 인식론의 격하를 동반하는 칸트의 반전은 맹목적인 이성중심주의와 민족중심주의라는 스킬라와 무한한 해체와 자기 비판이라는 카리브디스 둘 다를 피하고자 하는 비슷하게 고무된 노력에서 비롯되었다. 사변이 모든 가능한 지식의 경계를 침범하기 때문에 칸트는 사변을 비난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오늘날의 새로운 사변적 사상가들의 경우에는 바로 지식의 한계 때문에 사변이 필요하다. 실재적인 것은 그렇게 존재하지만, 우리는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21세기 사변은 우리의 단단한 지식이 끝나는 지점에서 시작된다. 독단적 주장을 제기하기는 커녕, 이 새로운 형태의 사변은 역설적으로 파악할 수 없는 것들의 공간과 예측할 수 없는 것들의 시간을 탐사한다.

 

2007년에 네 명의 철학자 ― 퀑탱 메이야수(Quentin Meillassoux), 그레이엄 하먼(Graham Harman), 레이 브라지에(Ray Brassier) 그리고 이에인 해밀턴 그랜트(Iain Hamilton Grant) ― 가 사변적 실재론이라는 표제어 아래 런던의 골드스미스 칼리지에서 각자의 논문을 발표했다. 그들은 서로 또 서로의 작업을 얼마간 알고 있었다. 그들은 때때로 비교적 균일한 집단으로 간주되었지만, 그 이후로 그들 가운데 몇 사람은 사변적 실재론이라는 표제어를 포기했다. 그리고 사실상 이 사상가들 사이의 차이가 매우 커서 그들은 단일한 철학 학파를 이룬다고 할 수 없다. 그런데도 이 사상가들이 최소한 중요한 출발점을 공유하고 있다는 점을 가리키는 데에는 사변적 실재론이라는 꼬리표가 여전히 유용하다. 하몬의 말에 따르면 "사변적 실재론자가 되는 데 필요한 것은 '상관주의'에 반대하는 것뿐인데, 상관주의는 모든 철학을 인간과 세계의 상호 작용에 정초하는 그런 종류의 철학(오늘날에도 여전히 지배적인)을 가리키는 메이야수의 술어이다."

 

사변적 실재론은 세계 및 세계 속 사물들의 우리 자신의 개념화로부터의 독립성을 역설한다. 그것은 세계의 질서는 우리 마음(또는 우리 언어 또는 문화)이 그것을 구성하기 위해 작동하는 방식에 의존한다는 칸트적 테제를 거부한다. 또한 그것은 자아와 세계, 또는 주체와 객체, 또는 아는 자와 알려지는 것 사이의 원초적인 호혜성 또는 대응성이라는 현상학적 가정을 거부한다. 실재는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기묘하다. 사물들은 우리가 그것들에 관해 지니고 있는 관념들에 결코 들어맞지 않는데, 그것들에는 우리가 파악할 수 있는 것을 넘어서는 무언가가 항상 존재한다. 세계는 우리 자신의 인지적 범형과 서사적 설명 양태들에 꼭 들어맞지 않는다. '인간'은 만물의 척도가 아니다. 이런 까닭에 사변이 필요하다. 우리의 고질적인 인간중심주의에서 벗어나서 근본적으로 이질적인 비인간 세계의 존재를 진지하게 고려하기 위해서 우리는 사변을 전개해야 한다.

 

미리 결정된 한 가지 사변 형식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변은 적절한 결말에 대한 아무 확신도 없는 미지의 것으로의 항해이다. 이런 점에서, 자유로운 철학적 사변(philosophical speculation)과 궁극적으로 이익을 낼 목적으로 항상 실행되는 금융 투기(financial speculation)가 대조될 수 있다. 오늘날 파생 상품 시장에서 실행되는 헤지 펀드의 투기는 위험(risk)을 계산하고 수량화하는 한 방식으로 간주된다. 시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간에 투자자들은 확률의 법칙들을 고려함으로써 이익을 낼 수 있다. 그러므로 금융 투기는 미래를 관리하고 제어하는 한 방식이다. 그것은 미래가 현재와 정합적일 것이라는 의심받지 않은 가정에 의존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형이상학적 사변은 위험이 아니라 환원 불가능한 불확실성을 대면한다. 이런 구별짓기는 위대한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John Maynard Keynes)에 의해 처음 이루어졌다. 위험은 고정된 수의 가능한 결과들 사이에 확률을 분배하는 통계적 규칙들에 의해 관장되는데, 예컨대 동전 던지기 또는 주사위 던지기를 고려하라. 그런데 불확실성은 확률론적 견지에서 수량화될 수 없다. 우리는 어떤 결과들이 가능한지 알 길이 없는데, 그것들 가운데 얼마나 많은 것이 존재하는지, 그리고 그것들 가운데 무언가가 일어날 확률이 얼마나 되는지는 말할 것도 없다. 오늘날 대부분의 경제학자와 금융 전문가들은 케인스의 분석을 무시하고, 따라서 파생 상품과 선물 시장이 불확실성이 아니라 위험의 견지에서 이해될 수 있다고 잘못 가정한다. 그렇지만 경제학에서의 실정이 어떻든 간에 철학적 사변은 관리할 수 있는 위험이 아니라 오히려 전적으로 근본적인 불확실성의 문제이다. 그런 사변 과정을 인도할 공식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사변적 실재론 사상가들은 각자 우리로부터 떨어져 알 수 없게 존재하는 세계에 관한 사변을 전개하는 상이한 방식을 제시한다.

 

풀려난 허무(Nihil Unbound)》에서 레이 브라지에는 칸트의 인식론적 관심사, 즉 우리가 세계에 관해 정당하게 말할 수 있는 방식들을 관장하는 범주와 규제적 이념들 ― 또는 오늘날 우리가 합리성의 규범이라고 부를 개연성이 더 높은 것 ― 에 대한 주장을 전적으로 거부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브라지에가 이런 규범을 암묵적으로 인간중심적인 칸트의 초점에서 떼어낼 때 그는 칸트를 넘어서서 일종의 급진적 사변에 관여한다. 브라지에의 경우에, 인과성 같은 칸트의 범주들은 세계에 인식 가능한 어떤 질서를 부여하기 위해 우리 자신의 마음이 세계에 부과하는 구조가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우리 마음에 불투명하고 이질적인 사물들에 접근하고자 할 때, 이런 방법과 가정들은 외부로부터 우리에게 강요된 것이다. 합리성은 소름이 오싹 끼칠 만큼 비인간적이다. 물리과학 덕분에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도 우리의 척도에 따라 만들어지지 않은 세계를 개념화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과학적 기획은 결코 완결돠거나 최종적일 수 없는데, 왜냐하면 세계는 궁극적으로 비개념적인 것이고 개념화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물에 관한 우리의 관념들은 사물 자체에 결코 딱 맞을 수 없다. 칸트의 경우에 이것은 우리가 현상, 즉 단순한 외양들의 영역에 귀속되어 있다 ― 그렇지만 또한 그 내부에서 안전하게 정초되어 있다 ― 는 점을 의미했다. 그런데 브라지에의 경우에 우리가 끊임없이 사물 자체에 접근함(그런데 결코 최종적으로 이르지는 못한다)에 따라 우리는 우리가 당연히 여기곤 하는 모든 것을 박탈당한다. 우리가 우주에 부과하기 위해 헛되이 노력한 모든 의미, 가치 그리고 서사들을 벗겨내면 우주는 본원적으로 공허하고 무심하다. 위로가 되는 우리의 전제들은 용해되고, 따라서 아무 근거도 없는 사변만이 우리에게 남게 된다.

 

유한성 이후》라는 중요한 책에서 알랭 바디우의 제자였던 퀑탱 메이야수는 칸트를 안팎으로 뒤집고, 칸트가 거부했던 그런 종류의 존재론적 사변에 대한 필요를 브라지에와 전적으로 상이한 방식으로 갱신한다. 메이야수는 칸트주의와 현상학의 '상관주의적' 가정들에 전면적인 공격을 개시한다. 그는 자신이 선조성이라고 부르는 것을 역설하는데, 선조성은 인류 혹은 어떤 형태의 생명에도 선행하는, 그래서 관찰되고 해석되거나 평가받을 어떤 가능성에도 선행하는 우주의 분명한 존재를 가리킨다. 칸트는 무엇이든 어떤 형태의 존재에도 논리적으로 선행해야 하는 '경험의 선험적 조건'(이것은 존재자에 의해 항상 이미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다)을 확립한다. 그런데 메이야수는 이런 조건 자체가 세계 역사의 어떤 시점에서 생성되었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그것이 출현하기 전에 우주는 이미 존재했지만 어떤 의미에서도 우리에게 '주어지'거나 우리의 범주들에 따라 조직되지 않았다. 다시 말해서 칸트에 의해 확립된 마음과 세계 사이의 상관관계는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 자체적으로 우연적인 것이다. 그리고 이런 통찰로부터 나아가서 메이야수는 본원적 우연성이 유일한 보편적 필연성이라고 추론한다. 그는 세계가 현재의 모습과 달리 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절대적으로 필연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어쨌든 사태는 아무 이유도 없이 일어날 수 있다. 이른바 '자연 법칙'조차도 임의로 변하거나 사라질 수 있다, 이런 식으로 메이야수는 사변을 통해 진리를 발견한다 ― 더 정확히 말하자면 사변의 진리를 확립한다 ― 고 주장한다. 칸트는 우리 자신의 오성 능력의 한계 때문에 "사물 자체"는 알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한 반면에, 오히려 메이야수는 바로 이런 불가지성이 사물 자체의 실정적인 특성이고, 따라서 우리는 이것이 절대적으로 확실하게 맞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말한다.

 

객체지향 존재론으로 일컬어지는, 사변적 실재론에 관한 그레이엄 하먼의 판본은 브뤼노 라투르(Bruno Latour)와 마누엘 데란다(Manuel DeLanda) 같은 사상가들을 언급하면서 우리와 독립적인 사물의 존재에 대한 다른 한 접근법을 취한다. 《게릴라 형이상학(Guerilla Metaphysics)》과 《쿼드러플 오브젝트(The Quadruple Object)》를 비롯한 다양한 사변적 저작에서 하만은 칸트의 가장 기본적인 주장들 가운데 하나를 증보함으로써 칸트를 수정하고 사변의 필요성을 다시 도입한다. 칸트는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물에 부과하는 틀로 그것을 경험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사물 자체는 알 수 없다고 말하는 반면에, 하만은 이 상황을 우주 속 모든 존재자에게 일반화한다. 세계를 특수한 한정된 방식으로 파악하는 것은 인간, 즉 합리적 존재자들만이 아니다. 세계는 다수의 객체들을 포함하고 있으며, 이런 객체들 가운데 어느 것도 피상적인 방식을 넘어서 여타의 객체(심지어 자신에도)에 접근할 수 없다. 하먼의 경우에 우리 지식의 유한성, 즉 넘어설 수 없는 한계를 역설할 때의 칸트는 옳다. 그런데 최소한 그런 한계 내에서 완전하고 확실한 인간중심적인 구조들을 확립하기를 요구할 때의 칸트는 그르다. 우리는 세계에 조건을 부과하기보다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우리 자신의 제한된 능력 내에 갇히게 된다. 칸트는 우리가 알 수 없는 사물에 관해서는 사변을 전개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 하먼은, 우리가 사물 자체를 알 수 없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우리에게 남아 있는 유일한 것은 사변을 전개하는 것이라고 응대한다. 우리는 객체를 인지적으로 파악할 수 없지만, 비유와 그 밖의 심미적 실천을 통해서 객체를 암시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사물을 전적으로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마음에 품을 수 있다. 그리고 그런 것이 사변의 길인데, "실재적인 것은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할 수만 있는 것이다."

 

브라지에와 마찬가지로 닉 랜드(Nick Land)의 학도였던 이에인 해밀턴 그랜트는 《셸링 이후의 자연철학(Philosophies of Nature After Schelling)》에서 다른 한 판본의 사변을 제시한다. 칸트 자신의 철학에서 '경험의 선험적 조건'은 모든 인지가 따라야 하고 따를 필요가 있는 선재하는 구조이다. 그런데 그랜트는 칸트 이후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셸링을 좇아서 이런 구조 자체가 단순히 주어진 것으로 간주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어떤 식으로 생성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선험적인 것 ― 모든 경험에 선행하고, 경험을 위한 조건을 확립하는 것 ― 은 결코 정적인 산물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 자체가 진행 중인 과정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셸링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랜트의 경우에도 "선험적인" 것은 오직 자연 자체의 진행 중인 무한한 생산성과 동일시될 수 있을 뿐이다. 이런 모든 사상가들에게 사변은 필연적인 것인데, 그것이 우리가 우리 육체와 마음을 생성하지만 우리 마음과 육체로는 영원히 파악할 수 없는 힘, 역능 그리고 사건들을 추적하고자 시도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사변적 실재론자들은 모두 형이상학적 사변에 대한 칸트의 금지를 우회하는 방식을 찾아낸다. 그들은 칸트가 존재론보다 인식론을 우위에 둔 것에서 비롯되는 인간중심주의에 저항하기 위해 작업한다. 메이야수와 브라지에의 경우에 칸트적 인식론의 제약을 극복하는 방식은 칸트에 의해 발견된 가능한 지식에 대한 한계가 우리 자신의 인지 역량에 새겨져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미 환원 불가능하게도 우연적(메이야수)이거나 비개념적(브라지에)인 사물 자체의 특징이라는 점을 깨닫는 것이다. 그런데 하먼과 그랜트의 경우에는 인간 인지에 부여된 특권 자체가 의문시되어야 한다. 인간 지각과 오성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믿고 있는 것보다 덜 특별한데, 왜냐하면 그것들은 관계와 인과적 영향의 과정들의 훨씬 더 넓은 스펙트럼에 속하기 때문이다. 솜 덩어리를 사색할 때 내가 행하는 것은 솜 덩어리를 물들일 때 염료가 행하는 것과 그다지 다르지 않고, 혹은 그 점에 있어서 솜 덩어리를 태울 때 불이 행하는 것과도 그다지 다르지 않다. 하만의 경우에 이것들은 모두 또렷히 개별적인 존재자들 사이의 '대리적 접촉'에 관한 사례들이다. 그리고 그랜트의 경우에 그것들은 모두 자연의 끊임없는 생산성에 의해 추동되지만 정지되거나 물화되기도 하는 변형들이다. 인식론에 우위성이 주어질 수 없는데, 왜냐하면 이해와 앎 자체가 그것들이 자체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더 큰 운동 내에 붙잡혀 있기 때문이다. 이 사상가들은 모두 더 고등한 '독단적' 진리을 발견하기 위한 방식이 아니라 오히려 메이야수가 존재의 '거대한 야외'라고 부르는 것 ― 엄청나게 방대하고 기묘하며 본원적으로 불확실하여 우리 자신의 가치와 규범으로 포괄할 수 없는 영역 ― 을 탐구하는 방식으로 사변을 수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