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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그레이엄: 오늘의 에세이-과학과 기술에 대한 아나키즘적 시각들

 

과학과 기술에 대한 아나키즘적 시각들

Science and Technology: Anarchist Perspectives

 

―― 로버트 그레이엄(Robert Graham)

 

과학과 기술에 대한 아나키즘적 비판은 최소한 프루동(Proudhon)까지 거슬로 올라가는데, 그는 "노동자에게 주인을 제공함으로써 노동자를 격하시킨 후에 노동자를 장인 계급에서 일반 노동자 계급으로 낮춤으로써 그런 격하 과정를 완결하는" 기계 장치를 비난했다. 카를로 피사카네(Carlo Pisacane)는 자본주의 하에서 이루어지는 기술 혁신은 대중은 가난한 처지에 내버려둔 채 경제력과 부를 "소수의 사람들에" 집중시킬 뿐이라고 주장했다.

 

다른 아나키스트들은, 일단 인민이 기술에 대한 통제권을 쥐게 되면,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가 넌지시 주장한 것과 거의 마찬가지로, 기술은 번거로운 수고를 제거하도록, 작업장을 더 안전하게 만들도록, 그리고 만인을 위해 생산을 늘리도록 다시 고안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카를로 카피에로(Carlo Cafiero)는, 자본주의 경제에서 노동자는 "노동자를 공장에서 쫓아내고, 굶기고, 격하시키고, 괴롭히며, 파괴하게 되는" 기계 장치에 반대할 이유가 있다는 것을 인식했다. "그런데, 이와는 대조적으로, 기계들이 노동자를 더 이상 마음대로 부릴 수 없고 ... 노동자가 기계들을 마음대로 부릴 수 있어서 그것들이 그에게 도움을 주며 그의 편익을 위해 작업하게 될 때 기계들의 수가 증가하는 것에 대해 노동자는 대단히 큰 관심을 가질 것이다."

 

구스타브 란다우어(Gustav Landauer)는 더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는데, 1911년에 그는 "자본주의 체계, 현대 기술 그리고 국가 중앙집권주의는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자본주의와 동맹을 맺은 기술은 [노동자를] 기계의 한 요소로 만든다"고 주장했다. 결국 자본주의 하에서 발달된 기술은 자유로운 사회의 기반을 제공할 수 없다. 오히려 노동자들은 "정신적으로 그리고 육체적으로 자본주의에서 벗어나"서 그들 스스로가 쾌적하다고 깨닫게 되는 조건에서 그들의 필요을 충족시키도록 고안된 대안적 공동체와 기술을  만들어내기 시작해야 한다. 1960년대 초에 폴 굿맨(Paul Goodman, 1911-1972)은 "인도적인 기술 선택에 대한" 몇 가지 기준―"효용성, 효율성, 이해 가능성, 수리 가능성, 사용의 용이함과 유연성, 쾌적함과 소박함"―을 제안했는데, 그런 기준의 사용은 "사람들 사이에 그리고...사람들과 환경 사이에 자율적이고 창의적인 교류"를 가능하게 하는, 굿맨의 친구인 이반 일리치(Ivan Illich, 1926-2002)가 "공생공락의 도구"로 서술한 것을 낳을 것이다.

 

십구 세기의 아나키스트들은 현재 상태를 뒷받침하는 조직 종교의 역할에 대한 비판의 일부로서, 특히 종교적 믿음에 대조하면서, 근대 과학의 미덕을 흔히 격찬하곤 했다. <<재산이란 무엇인가(What is Property)>>라는 책에서 프루동은 "의지의 주권이 이성의 주권에 굴복하고, 그래서 마침내 과학적 사회주의에서 틀림없이 사라지게 되"는 날을 예상했다. 1882년에 호세 루나스 푸홀스(Jose Llunas Pujols)는 아나키즘적 사회에서는 "정치적 국가와 신학이... 행정과 과학에 의해 대체될 것"라고 적었는데, 그것은 계몽주의 사회에서는 인간의 정부가 "사물들의 행정"으로 대체될 것이라는 생 시몽(Saint Simon)의 논평을 반영했다. 1920년 아나키스트 프로그램의 결론에서 말라테스타(Malatesta)는 아나키스트들이 바라는 것을 "빵, 자유, 사랑 그리고 만인을 위한 과학"으로 요약했다.

 

그렇지만 이것이 아나키스트들이 무비판적인 과학 후원자들이었다는 점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가장 널리 출판되고 번역된 아나키스트 소책자들 가운데 하나는 <<신과 국가(God and the State)>>라는 바쿠닌(Bakunin)의 에세이였는데, 여기서 바쿠닌은 과학적 이론과 연구의 한계점들을 논의했으며, 우리 사안들을 과학자와 지식인들에게 위임하는 것의 위험성에 대해 경고했다. 바쿠닌은, 과학은 "추상물들의 권역을 벗어날 수 없"고, 그래서 "토끼의 개별성을 파악할 수 없는 것처럼 인간의 개별성을 파악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과학은 개별적 인간의 실존적 현실을 파악하거나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개인들을 "과학이 통치하도록 결코 허용하지 말아야 하고, 어느 누구도 과학의 이름으로 통치할 수 없게 해야 한다". 과학의 이름으로 통치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특권이 불가피하게 인간들에 행사하는 치명적인 영향"에 굴복할 것인데, 그들은 "지금까지 성직자들, 온갖 색깔의 견해를 지닌 정치인들 그리고 법률가들이 신, 국가, 법 정의의 이름으로 갈취했듯이 과학의 이름으로 타인들"을 갈취하게 된다.

 

<<근대 과학과 아나키즘(Modern Science and Anarchism)>>(1912)이라는 책에서 아나키즘은 "과학적 방법을 제외한 어떤 연구 방법도 인정하지 않"는, "현상에 대한 기계적인 [운동학적] 해석에 기반을 둔 우주관"이라고 주장한 크로포트킨(Kropotkin)조차도 과학자들은 사회에서 특권적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고 결코 생각하지 않았으며, 과학적 가설들은 어떤 권위에 의해 강요될 필요가 있는 인간의 법률과 유사한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는 "신학과 자의적 권력에서 차용된 자의적인 표현 양식들을 순전히 관찰의 결과인 [과학적] 지식에" 도입하는 것을 비난했으며, 아나키스트들의 것들을 포함하여 모든 이론과 결론들은 비판의 대상이 되고 실험과 관측에 의해 검증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크로포트킨은 바쿠닌에 못지 않게 "과학의 통치"를 승인하지 않았다. 그 대신에 그는 다음과 같은 사회를 기대했다.

 

"구성원들의 모든 상호 관계들이, 자진했든 선출되었든 간에, 권위들이 아니라, 법률이 아니라, 상호 동의에 의해... 그리고 사회적 관습과 습속의 총체에 의해 규제되는 사회. 법률, 절차 또는 미신에 의해 굳어지는 사회가 아니라, 자유로운 삶에 대한 항상 커지는 요구에 부응하여 끊임없이 발달하고 끊임없이 재조정되며, 과학의 진보, 발명 그리고 더 고등한 이상들의 지속적인 성장에 의해 고무되는 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