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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우드: 오늘의 에세에-인류세 시대의 경이

 

인류세 시대의 경이

Who do we think we are? Wonder in the Anthropocene

 

―― 데이비드 우드(David Wood)

 

지난 수십 년 동안 전통적 인간주의에 대한 회의주의가 축적되는 것이 목격되었다. 근본적인 반대 의견은, 인간이라는 바로 그 관념이 너무나 흔히 인종적, 성별적, 문화적 또는 종적 지배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가리개 역할을 수행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숨은 뜻이 담긴 술어이다.

 

그런데 우리는 독특한 종, 호모 사피엔스인데, 지구에서 다른 종들의 멸종 비율이 급격한 증가하는 것에 책임이 있는 것으로 악명 높다. 동물로서 인간은 피부색과 신조를 넘어서는 생물학적 실재를 갖고 있는 듯 보인다.

 

심원한 시간, 지질학적 시간을 탐구하는 것은 우리가 어떤 종류의 동물이고, 우리가 어떻게 동물이고, 우리가 동물되기를 어떻게 수용할 수 있으며, 무엇이든 간에 어떤 종류의 인간 예외주의를 뒷받침하는 사례가 있는지 여부에 대한 의문 전체를 재개한다.

 

먼저 우리의 유래를 생각하자. 호모 사피엔스는 다른 생명체들과 공유하는 방식들과 더불어 다른 독특한 방식들로 본질적으로 역사적인 피조물이다. 호모 사피엔스는 현재 화석으로만 존재하는 일단의 호미니드들 가운데 하나이다. 대략 수백 만 년 전에 우리가 유인원에서 분리되었을 때, 대략 20여 종의 호미니드가 이어졌는데,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파렌시스, 호모 하빌리스 그리고 호모 에렉투스, 그 목록은 계속된다.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현생 인류) 자체는 호모 사피엔스 네안데르탈렌시스(네안데르탈인)과 겹치고 서로 교배했다.

 

호미니드들이 이어짐에 따라 일반적으로 뇌는 더 커졌고 육체는 더 약해졌다. 우리는 도구 제작 기술을 진화시켰고, 우리는 수렵채집인에서 농경으로 그리고 지금은 도시 생활로 움직였고, 우리의 식단, 믿음 그리고 사회적 배치들이 적절하게 이어졌다. 우리는 도구 제작자로서 유일하지는 않지만, 우리의 기술 발달은 도구 제작을 전적으로 새로운 층위로 이동시켜서 통신, 교통, 문화, 농업, 물질적 재화와 치명적인 무기의 생산에 극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한편으로, 우리는 글쓰기, 미술, 음악, 연극, 영화 등을 통해서 복잡하고 창의적인 상징적 세계를 발달시켰는데, 그것은 풍부함과 복잡성에 있어서 자연적 세계에 거의 비견하는 산물이다. 우리는 테야르 드 샤르댕이 '인지권'으로 부른 것을 실현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티핑 포인트들

 

인간의 이해에 있어서 지금까지 코페르니쿠스, 칸트, 다윈, 마르크스 그리고 프로이트 같은 인물들로 특징지워지는 티핑 포인트들이 존재했다. 프로이트 자신은 코페르니쿠스, 다윈 그리고 정신분석을 '인간 정신에 대한 상처'라고 불렀다. 각 경우에는 인간 주권에 대한 어떤 이해가 환상이거나 최소한 은폐된 힘들의 산물인 것으로 밝혀졌다.

 

각 경우에 우리는 습관과 도식들을 버려야 했는데, 지구를 사물들의 중심에서 추방해야 했고, 우리가 경험하는 대로의 세계는 결코 있는 그대로의 세계가 아니라 심원한 방식들로 우리에 의해 인지적으로 형성된 세계이며 우리는 우리와 진화적 역사를 공유하는 다른 비인간적 생명 형태들과 연속체를 형성한다는 점을 수용해야 했다.

 

니체가 신의 죽음이라고 부른 것, 푸코가 인간의 죽음이라고 부른 것, 그리고 프랑스 68동이들이 더 일반적으로 주체의 죽음이라고 부른 것은 모두 이런 복합적인 새로운 새벽을 증언한다. 그렇게 행하는 것이 불신당한 계몽주의 서사를 부활시키지 않는다면, 이것을 진보라고 부르고 싶을 것이다.

 

다윈을 제외하고, 이것들은 인간 역사 속의 변화, 변형 그리고 전위들이다. 내가 "지질학적 의식"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은 인간 역사 자체를 전위시켜서 그것을 생명의 역사뿐 아니라 일반적으로 느리게 진행하는 지질학적인 것들의 역사 속에 다시 위치시킨다.

 

인류세 시대의 정념들

 

지금까지 환경적 참여는 소용없다는 감각에 시달렸다. 사실들이 유행하지만,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성이 명하고 있는 듯 보이지 않는다. 한 가지 설명이 '이성은 정념의 노예이고 오로지 노예이어야 한다'고 주장한 흄으로부터 도출될 수 있을 것이다.

 

연결성과 외경심은 지질학적으로 살아있는 존재자를 활성화하는 정념들의 사례들일 뿐이다. 여기서, 오직 우리가 살아가고, 움직이며, 생활비를 버는 공간, 일상의 자력 때문이더라도, 정념들의 역할이 필수적이다.

 

최소한 나는 네 가지 또렷한 그런 반응들을 그럴싸하게 설명함으로써 이런 방향으로 가리키고 싶다.

 

경이

 

'왜 무가 아니라 무언가가 존재하는가?'

 

이 의문은 형식적으로 제기될 수 있지만, 그것은 소크라테스가 "유일한 철학의 기원"이라고 불렀고 데카르트가 "모든 정념들 가운데 첫 번째 것"이라고 부른 경이의 체험에 뿌리를 두고 있다.

 

플라톤과 달리, 데카르트는 경이를 자체 목적에 봉사한 후에 무시될 수 있는, 과학에 진입하는 대문 또는 자극으로 간주했다. 내 감각은 이것이 너무나 가혹하다는 것인데, 경이는 과학을 지체시킬 필요가 없다. 게다가, 경이가 지질학적인 것과 독립적이라면, 지질학적으로 채워졌을 때 그것은 또렷한 정취를 띠게 된다.

 

우주론자 브라이언 스윔이 빅뱅과 그것의 원초적 불을 '수십 억 년 동안 흩어져 비행하는 모든 물질을 미래로 보낼 만큼 충분히 강력한 에너지의 폭발 ... 태양의 중심보다 일 조의 십억 배 더 뜨거운 불'로 서술할 때, 그는 큰 수의 현기증을 찾아낸 아이처럼 말하는 듯 들린다. 나는 그가 경이를 말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언어와 상상력의 한계에 부딪치지만 여전히 언어를 임시로 사용할 수밖에 없다.

 

세 가지 변신에서 니체는 가치를 파괴하지만 창조할 수 없는 사자에 관해 적었다. 경이의 추방력은 충분하지 않다. 그런데 그것은, 일상적인 것과 단절할 수 있는 동시에 그것이 개방하는 공간에 정합성과 유의미성을 주입하기 위해 여전히 대기할 수 있는 바로 그런 정념일지도 모른다. 정신분석가 뤼스 이리가라이가 우주적 경이를 정작 타자에 대한 경이로 재정향하려고 시도하는 것은 바로 그런 진행 중인 격려하는 힘에 대한 것이다.

 

열 살 때 내가 그랜드 캐니언을 응시하는 굉장한 체험을 겪지 않았고, 콜로라도 주가 존재하기 전 수십 만 년에 걸쳐 콜로라도 강에 의해 형성된 일 마일 깊이의 노출된 퇴적층에 깜짝 놀라지 않았었더라면, 나는 그녀의 제안에 유혹당했었을 것이다. 실제로 나는 양여될 수 없는 지질학적 경이에 물려버렸다.

 

호기심

 

이것은 정말 정념인가? 하이데거는 호기심의 피상적인 개입의 결여 때문에 그것을 호되게 질책하지만, 그것은 너무나 가혹하다. 나는 하이데거의 끝없는 스쳐지나감이 아니라 심원한 호기심을 나타내고 있을 것이다.

 

이것을 생각하자. 나는 들판의 끝에서 창끝을 발견한다. 그것은 1,000년에서 10,000년 사이의 어느 시기에 제작되었다. 나는 그것에 관한 모든 것―어느 부족이 그것을 만들었는지, 그들은 어떻게 그것을 창에 부착했는지, 그들은 무엇을 사냥했는지―을 알고 싶다. 그들이 별을 올려다 보았을 때 무엇을 생각했는지, 그때 이 대륙은 어떤 모습이었는지도 알고 싶다.

 

나는 계속 걸으면서 대략 4억5천만 년 전부터 공룡이 출현하기 2억 년 전에 걸쳐 식각된 산호초 화석이 새겨진 거대한 석회암 조각을 발견한다. 그렇다, 다시 한 번 경이감을 느낀다. 그것은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데, 나는 이것이 한때 얕은 바다였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그때 여기에 있었다면 그것은 어떤 경험이었을까? 무언가 다른 것이 번성하고 있었을까? 나는 알고 싶다!

 

사실상 이것이 과학이 개시되는 지점이며, 과학을 통제와 착취의 경제학으로 끌려가지 못하게 막을 수 있고 권력에의 의지의 파생물이 되지 못하게 하는 경이와 같은 것일 따름이다. 지구 과학은 끊임없이 이런 경계를 시험하는데, 지구에 집중하고, 우주에 노출되며, 경이에 실체를 부여한다.

 

기쁨

 

19세기 자연주의자 존 J 오듀본(John James Audubon)의 새 그림들을 고려하자. 그것들은 정밀할 뿐 아니라, 자연적 세계의 다양성에 대한 기쁨을 표현하는 작품들인데, 전형적인 활동들을 반영하는 자세들을 취하고 있는 새들을 포착했다. 기쁨은 한계와 심원한 의미에 집중하기보다는 세부에 대한 주의 집중이다. 그것은 그런 쟁점들을 중지시킨다. 그런 주의 집중을 과학적 호기심이 증발시킬 위험이 있는 경이를 보존하면서 거대한 의문들의 혼란에 대응하는 방책으로 간주할 수 있다.

 

불안

 

칸트는 자신이 '역동적 숭고'라고 부른 것을 우리가 대상을 두려워하지 않은 채 무서운 감정을 느끼게 되는 것―창 뒤에서 안전하게 폭풍을 바라보는 경험처럼―으로 이해했다. 강력한 경험이 우리 내부에서 훨씬 더 큰 이성의 힘에 대한 자각을 불러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이다.

 

예를 들면, 이것은 별을 올려다 보았을 때의 파스칼의 논평을 포함할 것이다. '이 무한한 공간의 영원한 침묵이 나를 두렵게 한다.' 그것은 '존재자들 전체가 슬그머니 빠져나가고 있다"는 감각에 의해 포착되는 불안에 대한 하이데거의 해설과 영원 회귀에 대한 대응 방식에 대한 니체의 해설들 가운데 하나를 포함할 것이다.

 

내가 우리의 정념을 진지하게 간주하고 있는 까닭은 그것들이 변화의 궁극적인 추동자들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들이 일단 유발되면 변형을 차단하거나 고무하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들의 기저 조건에 관한 성찰은 해결할 필요가 있는 더 기본적인 문제들에 주의를 정향시킬 수 있다.

 

그렇다면 이성은 정념의 노예일 뿐이고 그래야 한다는 흄의 주장은 어쩔 것인가? 글쎄, 그것은 결코 그다지 단순하지 않는데, 특히 우리의 정념들이 충돌하거나, 또는 그것들이 세계를 냉정하게 파악하고자 하는 노력에서 이성이 이끌어내는 결론과 밀접하게 얽혀 있을 때 그렇다. 게다가, 환경이 취약한 이 시대에 그렇듯이, 때때로 우리의 정념은 재교육을 받을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