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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런스 토켈로: 오늘의 에세이-쓰레기 치우기: 합의, 인과 관계 그리고 부인

쓰레기 치우기: 합의, 인과 관계 그리고 부인

Removing the Rubbish: Consensus, Causation, and Denial

 

―― 로런스 토켈로(Lawrence Torcello)

 

17세기에 철학자 존 로크(John Locke)는, 당대의 위대한 과학적 사상가들을 찬양하는 글을 쓰면서, "바닥을 약간 청소하며 지식에 이르는 길에 놓여 있는 쓰레기 가운데 일부를 제거하는 청소부로서 고용되는 것이 쓸만한 야망"이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진술했다. 로크는 새로운 경험적이고 실험적인 과학들에 대한 그의 상당한 기여를 축소해서 말하고 있었다. 그런데 로크의 주장은 철학이 과학과 관련하여 수행하는 한 가지 필수적인 역할을 포착한다. 좋은 철학을 보증하는 특징은 개념들에 대한 엄밀한 비판과 그것들의 명료화를 통해서 이해를 증진시키는 것이다. 진리에 도달하는 데 있어서 철학자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반드시 준비를 더 잘 갖추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은 흔히, 훈련에 의해, 혼란스럽고 오류가 있는 사유를 탐지하는 데 적절하다. 우리는 사실의 발견만큼이나 오류의 탐지와 노출―쓰레기 치우기―을 통해서 지식이 진전되는 방식을 너무나 흔히 간과한다. 예를 들면, 인류가 유발한 지구 온난화라는 사실은 우리의 즉각적인 주의 집중을 필요로 하는 실존적 및 윤리적 함의들을 품고 있지만, 정보에 근거한 공적 담론을 진전시키기 위해서는 잘못된 관념들이 명료하게 되어야 한다. 이어지는 글에서 나는 기후 변화와 관련된 공적 담론과 정치적 담론에서 흔히 만나게 되는 세 가지 일반적인 혼동을 다룬다.

 

혼동 1: "합의는 과학과 아무 관련도 없다"

 

이 잘못된 주장은 합의라는 술어의 애매성을 이용한다. 대중의 어법에서 합의는 흔히 단순한(또는 그저 대중적인) 의견 일치를 가리킨다. 과학에서 그 술어는 명백한 다수의 연구자들이 수렴하는 증거 노선들이 동일한 결론을 확증한다는 점을 인식할 때 합당하게 사용된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인간 활동을 지구 온난화의 원인으로 간주하는 데 있어서 과학자들 사이에 압도적인 합의가 있다고 들을 때 의미되는 것이다. 과학적 합의는 대중적인 견해의 문제가 아니다. 과학적 합의는 전문가들 사이에서 어떤 특수한 주장이 증거에 의거한 강한 지지를 받고 있다는 폭넓은 인식을 나타낸다. 일단 과학적 합의에 이르게 되면 인류의 집단적인 지식 저장소는 커지게 된다.

 

당연하게도,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탐구 중인 과학적 의문들은 미해결 상태로 남아 있게 된다. 개별 연구자들, 연구 집단들 그리고 동료 평가자들은 모두 오류를 저지르기 쉬운데, 그래서 비전문가들이 과학적 합의를 어떤 주장이 폭넓게 면밀히 검토되었다는 증거로 인식하는 것이 더욱더 중요하다. 물론 과학적 합의가 잘못될 가능성은 여전히 있다. 어떤 주어진 쟁점에 대한 과학의 신뢰성 또는 합의의 확실성에 의문을 제기하기 위해 때때로 사람들은 잘못된 발견들이나 비양심적인 과학자들의 역사적 사례들을 지적한다. 이런 비판가들은 그들의 서사가 이의를 제기하고 싶어하는, 면밀히 검토하여 합의에 이르는 바로 그 동일한 과학적 과정 때문에 그런 오류들이 결국 밝혀지고 극복되었다는 사실을 간과한다.

 

언어의 애매성 때문에 사람들은 서로 엉뚱한 이야기를 할 수 있다. 사람들이 술어의 기술적 용법을 알지 못하거나 그들이 술어를 사용하고 있는 방식을 규정하지 못할 때, 오해와 애매한 표현에 적합한 분위기가 형성된다. 진화는 "이론일 뿐"이라는 주장에서 "합의"라는 술어에 대해서 유사한 혼동이 나타난다. 과학에서 사용되는 대로의 이론이라는 술어는 추측 또는 의견에 더 가까운 것을 의미하는, 그 술어의 가장 흔한 용법들 가운데 하나와 다르다. 근대 과학에서 이론은, 강력하고 입증 가능한 것으로 여겨져서 도대체 전복될 가망이 없는 광범위한 증거 집합체에 의해 유지되는 방식으로 실재를 믿음직하게 서술한다. 사실상 이론은 압도적인 과학적 합의와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과학은 자기은폐적인 것과 대조적으로 자기교정적이기 때문에 인식적으로 강력하다. 이것이 과학적 합의가 지성적 및 실험적 무게를 동반하는 방식이고, 비전문가들이 과학적 합의에 승인된 주장을 신뢰하는 데 책임을 지고 있는 까닭이다.

 

혼동 2: 인간 활동이 지구 온난화의 원인이라는 사실에 대한 "증명"은 존재하지 않는다.

 

증명은 수학과 형식 논리학에 가장 잘 맡겨진 술어이다. (통계학은 말할 것도 없고) 철학을 공부하는 모든 학부생은 "상관 관계가 인과 관계를 수반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주문의 어떤 판본을 들게 될 것이다. 이것은 참이지만, 이야기의 끝이 결코 아니다. 데이비드 흄은 18세기에 글을 쓰면서 인과적 관련성은 수학적 확실성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명확히 했다. 간단히 서술하면, 가능한 어떤 인과적 관계에 대해서도 상이한 인과적 관계가 성립하거나 아무 관계도 성립하지 않는 것이 여전히 논리적으로 가능하다. "증명"이라는 술어는 인과적 추리와 무관하며, 그리고 계속 무관할 것이다. 과학적 상관 관계에 대한 문제는 증명의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통계적으로 유관한 유형들의 문제이다. 결국, 기후 변화에 관한 정부간 협의체(IPCC)는 지구 온난화가 인간 활동에 의해 주로 초래되었다는 점에 대한 95% 신뢰 수준을 "대단히 가능성이 높은"이라는 술어로 번역한다.

 

인과적 추론의 한계를 이해하는 것은 기후 변화와 극단적인 날씨 유형들 사이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에도 마찬가지로 유용하다. 어떤 허리케인, 폭설, 가뭄 또는 홍수(그리고 그 목록은 계속될 수 있다)도 지구 온난화에 직접적으로 그리고 배타적으로 귀속시킬 수 없다. 그럼에도 데워지고 있는 지구가 극단적인 날씨 유형들에 식별할 만한 영향을 미친다는 점은 여전히 참이다. 어떤 단일한 날씨 사건도 자규 온난화와 인과적으로 관련시킬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어떤 특정한 범죄 행위도 가난과 인과적으로 관련시킬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정밀하고 반박할 수 없는 필연적 연관성에 대한 주의를 분산시키는 탐색은 통계적 상관 관계와 영향의 더 큰 유형과 무관하다.

 

이산화탄소 배출과 지구 온난화 사이의 관계는 흡연과 폐암 사이의 관련성만큼이나 잘 확립되어 있다. 폐암으로 진단받을 때, 금연하고 치료 계획을 세우기 전에, 담당 의사가 그 질환을 유발한 특정한 담배(또는 갑, 또는 심지어 담배를 피운 해)를 판별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일 것이다. 과학적 추론을 포함하여 어떤 귀납적 추론에 대해서도 확실성은 인식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다. 흄에 따르면, 이런 인식론적 한계가 인식된 지는 오래 되었는데, 사실상 많은 사람들이 헬레니즘 시대의 회의주의 이래로 그것은 철학적으로 이해되었다고 말하곤 했다. 철학과 근대 과학 둘 다에서 오류 가능성에 대한 인식은 건설적인 움직임으로서 진정한 발견과 독단을 분리한다. 책임감 있는 추리는 불확실성의 수사법적 활용을 정당화하지 않는데, 오류 가능성의 인식에도 불구하고 과학적 이해의 증진은 인정될 수 있다. 따라서 지구 온난화가 인간 활동의 결과이며 기후 변화가 극단적인 날씨 유형들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 대한 "증명"을 집요하게 요구하는 것은 무지로부터의 논증으로 환원될 뿐―실제 증거의 압도적인 우세를 고려하면―이다.

 

혼동 3: 부인주의자부인주의라는 술어들은 기후 회의주의자들과 그들의 작업에 대한 인신 공격적인(또는 부적절하게 사적인) 공격 형식들이다.

 

부인자라는 술어는 흔히 홀로코스트가 날조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과 관련이 있다. 그것은 모욕적인 술어로 간주되고, 그래서 진지한 대화는 공격을 자제해야 하기 때문에 그런 술어들을 사용하는 것을 자제해야 된다는 주장이 이어진다. 그런데 부인주의는 인식할 수 있는 유형들을 따르는 실제로 학문적으로 흥미로운 현상이며, 혼동을 피하기 위해 적절한 라벨로 책임감 있게 논의되어야 한다.

 

확립된 과학은 많은 이유 때문에 부인당할 수 있다. 확립된 과학적 주장이 자신이 귀의하고 있는 종교적 신조에 적대적이기 때문에 그 주장을 부인하는 사람들이 있다. 철학적 근거에서 과학의 인식적 특권에 이의를 제기하고 싶기 때문에 확립된 과학적 사실을 부인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재정적 또는 정치적 이유 때문에, 아니면 정치적 또는 문화적 당파에 대한 더 모호한 집단적 소속감 때문에 과학을 거부하게 되는 사람들도 있다. 자신들이 제기하고 있는 주장과 관련된 과학적 전문 지식이 부족한 사람들이 그 쟁점에 관해 확립된 과학을 부인할 때, 그들은 회의주의자로 간주되기를 요구함으로써 과학의 언어와 권위를 불러일으킨다. 회의주의는 비관주의, 냉소주의 또는 정치적 이데올로기에 의해 고무되는 불신이 결코 아니다. 회의주의는 항상, 일반적이든 어떤 주어진 영역에서든 간에, 인간 지식에 대한 제약에 관한 철학적 탐구를 수반했다. 지성적으로 신중한 과학의 본성은 이런 철학적 계보를 반영한다.

 

과학은 자체의 회의주의적 방법론을 통해서 작동하는데, 이것이 궁극적으로 합의에 이를 수 있게 하는 면밀한 조사 과정의 모터이다. 현장 연구를 수행하는 과학자가 실험실 환경에서 연구하는 과학자와 정확히 같은 방법론을 공유할 것으로는 예상되지 않지만, 과학의 모든 분야는 (이상적으로는) 방법론적 회의주의의 엄밀한 적용을 포함한다. 회의주의는 과학적 과정의 필수적인 요소이다. 관련 전문 지식이 부족한 사람이 과학적 합의를 부인하고, 그것을 지지하는 과학자들을 공격할 때, 그 사람은 회의주의로서 행동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회의주의자 흉내를 내면서 회의주의의 정당한 과실을 인정하기를 거부하고 있는 셈이다. 이런 형태의 부인주의는 정확히 사이비 회의주의로 서술되는데, 이것은 사이비 과학의 본질적이지는 않지만 흔한 특징이다. 사이비 회의주의와 사이비 과학은 둘 다 과학 부인주의의 유형들로 이해되어야 한다. 많은 적절한 라벨이 건설적으로 사용될 수 있거나, 아니면 인신 공격성 곤봉으로 사용될 수 있다. 이것만으로는 적절한 라벨들을 포기해야 할 좋은 이유가 아니다.

 

기후 변화에 관해 무엇을 생각해야 할지 확신하지 못하는 대다수 사람들은 기후 과학의 부인주의자들이 아니다. 그런데 열성적인 부인주의자들의 경우에 회의주의자는 잘못된 부적절한 라벨이다. 회의주의라는 술어는 인간 활동에 의한 기후 변화에 대한 증거를 집요하게 부인하는 사람들의 행동을 서술하는 데 부적절하다. 게다가 과학 부인주의의 더 광범위한 현상을 무시하기보다는 그것들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이 윤리적으로 더 적절하다. 사실상 기후 변화에 관한 과학적 합의에 대한 공중의 지식을 엉망진창으로 만드는 이런 종류의 쓰레기를 청소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그런 청소 행위는 개념들의 지속적인 명료성, 정합적인 언어 사용 그리고 시끄러운 소수의 부인주의자들이 기도하는 주의 전환 행위들에 대한 적극적인 거부를 필요로 한다. 그것은 과학자와 철학자들 모두에게 적절한 작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