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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 모들린: 오늘의 에세이-물리학에 철학이 필요한 까닭

 

물리학에 철학이 필요한 까닭

Why Physics Needs Philosophy

 

―― 팀 모들린(Tim Maudlin)

 

우리는 우리가 처해 있는 세계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 우주는 어떻게 작동하는가? 실재의 본성은 무엇인가?... 전통적으로 이것들은 철학적 의문들지만, 철학은 죽었다. 철학은 과학, 특히 물리학의 현대적 발전을 따라잡지 못했다. 과학자들이 지식 추구에 있어서 발견의 햇불을 전달하는 사람들이 되었다. ― 스티븐 호킹(Stephen Hawking) & 레너드 믈로디노프(Leonard Mlodinow)

 

2012년에 출판된 <<위대한 설계(The Grand Design)>>라는 책에서 인용된 이 구절은 논란의 불바람(또는 최소한 국지전)을 촉발했다. 실재를 이해하고자 하는 추구에서 철학은 과학으로 인해 그 존재가 희미해져 버렸는가? 철학은 과학적 이해와 단절된 분장한 신비주의일 뿐인가?

 

실재의 본성에 관한 많은 의문들은 현대 물리학 없이 제대로 탐구될 수 없다. 공간, 시간 그리고 물질의 근본적 구조에 대한 탐구는 상대성 이론과 양자 이론을 고려해야 한다. 철학자들은 이 점을 수용한다. 사실상 몇몇의 선도적인 물리학의 철학자들은 물리학 박사 학위를 소지하고 있다. 그렇지만 그들은 물리학과보다 철학과에 소속되기를 선택했는데, 매우 많은 물리학자들이 실재의 본성에 관한 의문들을 강하게 단념시키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물리학에서 지배적인 태도는 "입 닥치고 계산하라"였는데, 방정식들을 풀고, 그것들이 의미하는 바에 관한 의문들은 제기하지 마라.

 

그런데 계산을 개념적 명료성 앞에 두는 것은 혼동을 초래한다. 예를 들면, 상대성의 상징인 "쌍둥이 역설(twin paradox)"을 고려하자. 동일한 두 쌍둥이가 서로 헤어져서 나중에 다시 만나게 된다. 그들이 다시 만날 때 한 쌍둥이가 나머지 다른 한 쌍둥이보다 생물학적으로 나이가 더 많다. (우주인 쌍둥이 스콧과 마크 켈리가 이 실험을 곧 실현할 예정이다. 2016년에 스콧이 1년 동안의 궤도 운행에서 돌아오면, 그는 지구에 머무르고 있는 마크보다 대략 28마이크로초만큼 더 젊을 것이다.) 유능한 물리학자라면 어느 누구도 이 효과의 크기를 계산하는 데 오류를 저지르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위대한 리처드 파인만조차도 항상 설명을 제대로 하지는 못했다. <<파인만의 물리학 강의(The Feynman Lectures on Physics)>>에서 그는 나이 차의 원인을 한 쌍둥이가 경험하는 가속도에 귀속시키는데, 가속되는 쌍둥이가 결국 더 젊게 된다. 그런데 정반대의 것이 참인 사례들을 서술하기 쉽고, 심지어 두 쌍둥이 가운데 아무도 가속되지 않지만 결국 나이 차가 나는 사례들도 서술하기 쉽다. 계산은 맞으면서 수반되는 설명은 틀릴 수 있다.

 

여러분의 목표가 계산하는 것에 불과하다면, 이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그런데 현존하는 이론들을 이해하고 새로운 이론들을 형식화하려면 더 많은 것이 필요하다. 아인슈타인은 경험적 문제들이 아니라 개념적 문제들에 관해 성찰함으로써 상대성 이론에 이르렀다. 그는 고전 전자기 이론에 내재하는 설명적 비대칭성에 대해 주로 고민했다. 예를 들면, 아인슈타인 이전의 물리학자들은 전선 코일 속이나 근처에서 자석을 움직이면 코일에 전류가 유도될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자석에 대해서 코일을 움직이면 이 효과에 대한 고전적 설명은 전적으로 상이한 듯 보였는데, 실제로 그 효과는 자석과 코일의 상대 운동에만 의존한다. 설명적 비대칭성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동시성이라는 관념을 재고하고 공간과 시간에 대한 고전적 설명을 거부할 필요가 있었다. 그것은 상대성 이론을 필요로 했다.

 

양자 이론을 이해하는 것은 훨씬 더 어려운 난제이다. 양자 이론은 "실재의 본성"과 관련하여 무엇을 함축하는가? 과학자들은 일치된 대답을 제시하지 않는데, 심지어 그들은 그것이 합당한 의문인지 여부에 관해서도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

 

양자 이론을 둘러싼 문제들은 수학적인 것들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들은 양자 이론의 표현에서 나타나는 수용 불가능한 용어에서 비롯된다. 물리적 이론들은 애매함과 모호함이 전혀 없는 정확한 용어로 진술되어야 한다. "'측정'에 반대한다(Against 'measurement')"라는 에세이에서 존 벨(John Bell)은 불충분하게 명료한 개념들의 목록을 제시한다.

 

아무리 정당하고 응용에 필요하더라도 물리적 정확성을 자처하는 형식적 표현에서 용납될 수 없는 몇몇 낱말들은 이런 것들이다. 체계, 장치, 미시적, 거시적, 가역적, 비가역적, 관측 가능량, 정보, 측정.

 

양자 이론에 대한 교과서 해설들은 이런 금지된 술어들을 자유롭게 사용한다. 그런데 결국 우리는 무언가가 하나의 "체계"인지, 또는 "거시적"인 것으로 간주될 만큼 충분히 거대한지, 또는 상호작용이 "측정"을 구성하는지 여부를 어떻게 결정할 수 있는가? 언어에 대한 벨의 까다로움은 개념에 관한 그의 관심에 대한 외향적 표현이다. 날카로운 물리적 이론들은 모호한 관념들로부터 구성될 수 없다.

 

철학자들은 개념적 명료성을 추구한다. 그들의 훈련은 어떤 수학적 형식 체계가 현실 세계와 관련하여 제시할 바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어떤 사유 습관―애매함에 대한 민감성, 표현의 정확성, 이론적 세부에 대한 주의 집중―을 심어준다. 또한 철학자들은 일상적 논증에서 나타나는 간극과 생략을 지목하는 법을 배운다. 이런 간극은 개념적 쇄기의 진입점, 즉 간과된 대안들이 뿌리를 내리고 성장할 수 있는 외진 곳을 제공한다. "입 닥치고 계산해"라는 풍조는 논증에 대한 이런 비판적 태도를 육성하지 못하는데, 철학은 육성한다.

 

그렇다면 철학이 과학에 제공하는 것은 신비주의적인 관념들이 아니라 꼼꼼한 방법이다. 철학적 회의주의는 이론과 논증의 개념적 약점들에 주의를 집중한다. 그것은 대안적 설명과 새로운 이론적 접근 방식들에 대한 탐색을 고무한다. 철학자들은 언어의 미묘한 애매성과 그것에서 파생되는 것에 대해 고민한다. 분과학문의 토대가 확고할 때 이것은 반생산적일 수 있는데, 그저 해야 할 일을 하라! 그런데 확고한 토대(또는 새로운 토대)가 필요할 때는 비판적 조사가 나아갈 길을 제시할 수 있다. 양자 이론을 일반 상대성과 결합시킬 방법에 대한 탐색은 이 이론들의 기초적 개념들에 대한 정확히 표명된 설명에서 얻는 바―교체되거나 폐기되어야 하는 것을 제시할 뿐이더라도―가 확실히 있을 것이다.

 

철학적 회의주의는 "인식론"으로 불리는 철학 분야인 지식에 관한 이론에서 비롯된다. 인식론은 우리 개념들의 원천과 믿음들에 대한 근거를 탐구한다. 흔히 그것은 틀린 것으로 판명되기도 하는 암묵적인 전제들, 우리가 실제로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는지에 대한 의심의 원천을 드러낸다. 호킹에서 시작했으니까 아인슈타인으로 끝을 맺자.

 

적절한 천품을 갖춘 자연과학자가 인식론에 관여하게 되는 일은 어떻게 일어나는가? 그의 전공에는 가치 있는 작업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가? 나는 내 동료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느낀다고 말하는 것을 듣고, 더 많은 사람들로부터 그런 느낌을 감지한다. 나는 이런 정서를 공유할 수 없다....

 

사물들에 질서를 부여하는 데 유용한 것으로 판명된 개념들은 우리로 하여금 그것들의 현세적 기원을 망각하고 그것들을 변경할 수 없는 주어진 것들로 수용하게 하는 그런 권위를 쉽게 획득한다. 그러므로 그것들은 "사유의 필연적인 것", "선험적으로 주어진 것" 등으로 각인되게 된다. 과학적 진보의 행로는 흔히 오랜 시간 동안 그런 오류들을 통과하지 못하게 된다. 그런 이유 때문에, 오래된 일상적 개념들을 분석하고 그것들의 정당화와 유용성이 의존하는 환경, 경험의 소여들에서 그것들이 개별적으로 성장한 방식을 드러내는 데 관여하게 된다면, 그것은 결코 한가한 작업이 아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것들의 너무나 거대한 권위가 파괴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