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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브레나 스미스: 오늘의 에세이-충분히 철학적인

 

충분히 철학적인

Philosophical Enough

 

―― 서브레나 스미스(Subrena Smith)

 

나의 철학적 관심은 생물학과 심리학 사이에서 움직인다. 나는 인간의 행동에 관심이 있으며, 그리고 나는 생물학과 심리학의 맥락에서 (매우 폭넓게 특징지워지는) 인간의 행동에 관해 생각한다. 내 기질과 접근 방식은 경험적이고, 그래서 나는 우리가 지식을 획득할 가능성이 가장 큰 방법론적 접근 방식들(그것들이 난잡하더라도), 예컨대 순수한 종류의 경험주의에 특권을 부여하는데, 지식으로 간주되는 것은 탐구의 증거, 증거에 대한 해석, 가정된 존재자들에 관한 추론 도출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연결하는 이론의 고안을 포함한다.

 

이런 철학적 스타일은 두 개의 대립적인 지성적 진영들의 구성원들과 정면으로 불화하게 만든다. 한 진영에는 그들의 분과학문들의 작업을 의문시할 의도를 지니고 있는, 물리과학에서 공식적인 훈련을 전혀 받지 못한 철학자에 불안해하는 과학자들이 있다. 다른 한 진영에는 내가 과학적 자원을 너무 많이 강조하기 때문에 나의 접근 방식을 철학적으로 불충분하다고 간주하는 철학자들이 있다. 이 집단은 나의 접근 방식을 너무나 철학적이라고 간주하고, 저 집단은 충분히 철학적이지 않다고 간주한다. 내가 언급할 것은 철학자들이 포진하고 있는 두 번째 진영이다.

 

나는 지금까지 얼마 동안 내내 과학주의라는 혐의에 관해 생각했는데, 그것이 항상 내게 기묘한 인상을 남겼기 때문이다. 당신의 작업은 과학주의 때문에 훼손된다는 말을 듣는다면, 그것은 칭찬이 아니다. 극단적으로 그것은 모욕적 언동이고, 덜 극단적으로 그것은 당신을 일축하는 한 가지 방식이다. 당신은 사려 깊지 않고, 당신은 과학의 제단에서 예배를 보고 있고, 인간(우리가 누구이고,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관한 당신의 견해는 본질주의―가장 나쁜 종류의 생물학적 결정론―의 악취를 풍긴다. 그런 이야기를 그냥 일축하고 싶지만, 나는 이것이 사려 깊은 사람들이 생각하고 싶어해야 할 쟁점이라고 생각한다.

 

대학원생 시절에 언젠가 나는 동료 학생과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는데, 그 대화에서 나는 마음의 철학, 인식론 그리고 윤리학의 쟁점들에 관해 철학적으로 생각하기 위한 출발점은 인간은 유기체라는 사실과 그 사실에서 비롯되는 모든 것을 진지하게 고려하는 것이라고 선언했다(논란의 소지가 없는 사소한 주장이지만, 염두에 두고 있으면 인간의 역량에 관한 이상적인 이론화를 대면했을 때 유용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 그런 인간 역량에 관한 어떤 분석도 (그것이 제대로 작동하려면) 최소한 인간은 유기체라는 사실과 정합적이어야 한다. 나의 대학원 동료는 경청한 다음에 이렇게 응대했다. "맞아, 그렇지만 그것은 과학주의야!" 나는 나의 과학주의는 "좋은" 종류의 것이라는 점을 그에게 증명하고자 하는 의도로 (매우 서툴게) 무언가를 말함으로써 그의 당혹감을 해소시켜려고 시도했다. 그것은 먹히지 않았다.

 

그 첫 번째 논의 이후로 나는 동일한 방식으로 어떤 철학적 작업에 대응하는 사람들을 보고 들었다. 그래서 여기서 이것에 관한 글쓰기에 대한 내 동기의 일부는 두려움이다. 쫓겨나지 않으려면 출판해야 하는 정규직 신임 교수로서 나는 때때로 내가 철학 실천에 대한 "올바른" 종류의 접근 방식을 갖추고 있는지 의심하고, 그래서 나는 쫓겨날 것이다. 사실상 내가 관심을 갖고 있는 영역들에서 연구하면서 저작을 출판하는 훌륭한 철학자들이 많이 있고, 그래서 철학 속에 나를 위한 영역이 존재하기 때문에 내가 두려워할 이유는 전혀 없다. 그렇지만 여전히....

 

어떤 주장에 권위를 부여하고 싶을 때 "과학이....보여준다" 또는 "과학적 방법이..."라고 말하는 것을 듣게 되는 것은 흔한 일이다. 나는 지식을 산출하기 위해 과학적 방법들에 기댈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을 선호한다. 나는 "과학적 방법들"이라고 말하는데, 과학자들이 수행하는 것을 얼핏 바라보면, 과학의 실천은 일의적인 방법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후보 방법들이 있다는 점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실무자들이 증거에 민감한 분위기에서 탐구가 이루어지고, 주장들은 증거에 비추어 수정되거나 거부될 수 있으며, 일반적으로 그런 고찰들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환경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내 주장의 요지는 과학이 무엇인지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접근 방식을 특징짓는 어떤 발견적 방법을 제공하는 것이다.

 

주장: "당신의 작업은 과학주의적이다!"라는 말은 사실상 "나는 당신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당신의 추론은 틀렸다!" "그것은 터무니없다!" "내 기호에 그것은 너무나 결정론적이다!" "당신의 사유는 너무나 무비판적이다!" 등등의 말을 돌려서 표현하는 방식이다.

 

그것이 당신의 입장이라면, 바로 그렇게 말하라!

 

나는 나의 대학원 동급생이 과학주의라는 혐의로 나를 책망했을 때 위에 언급한 것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가 인간은 유기체라는 내 주장에 동의하지 않았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는 그런 주장이 철학적 의미가 크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 점을 인정하면, 그가 나의 메타철학적 입장을 "과학주의"로 규정한 까닭이 명료하지 않다. 내 직감에 따르면, 그는 철학적 문제들이 (예를 들면) 생물학에 의해 해결될 수 있다면 순수 철학을 위한 어떤 여지도 없을 것이라고 걱정했기 때문에 내가 말한 것에 대해 철학적으로 불편하게 여겼다. 나는, 철학자들에게서 나타나는 이런 불안이 너무 경험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작업에서 거리를 두려는 경향을 설명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런 입장은 매우 기묘하다. 나는 자신의 작업이 어떤 경험적 특징들을 갖고 있지 않다고 믿는 철학자들을 찾아내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철학자들은 세계에 관심이 있고, 그래서 나는 철학자들이 제기하는 그런 종류들의 의문과 주장들이 대체로 세계와 관련된 것―관찰할 수는 없지만 가정된 세계의 특징들을 비롯하여―이라고 생각한다. 의식에 관한 주장은 경험적인 것이다. 젠더의 형이상학에 관한 주장은 경험적인 것이고, 도덕적 판단의 본성에 관한 주장도 그렇다. 내 자신 같은 철학자들은 생물학과 심리학을 참조하는데, 우리는 그런 영역들에서 사용되는 방법들이 충분히 흔히 철학적 쟁점에 대한 판결을 내리는 데 도움이 되는 설명적 자원을 제공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우리는 과학의 제단에서 경배하지 않는다. 우리는 지식을 산출할 가능성이 가장 높은 그런 방법들을 수용한다.

 

그렇다면, 나의 접근 방식은 어떤 모습인가?

 

이 에세이의 서두에서 언급했듯이, 나는 인간의 행동, 즉 개체, 개체군 그리고 종의 층위들에서 인간의 행동을 가장 잘 설명하는 방법에 관심이 있다. 나는 별개의 사람들 사이에서 나타나는 어떤 행동 유형으로 간주되는 것에 관심이 있다. 나는 생물학자들이 말하는 것과 그들이 그렇게 말하는 까닭에 관심이 있다. 나는 인간의 행동에 대한 심리학적 연구와 연구 결과에 대한 해석에 관심이 있다. 그리고 나는 생명과학적 주장이 사회적으로 그리고 정치적으로 활용되는 방식에 관심이 있다. 그런데 나는 진화론이 인간의 행동에 대한 기원 설명에 전용되는 방식에 가장 큰 관심이 있다. 내 관심사는 대체로 경험적인 것인데, 원칙적으로 이런 의문들은 세계를 살펴봄으로써 해결될 수 있는데, 세계가 존재하는 방식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행동은 경험적으로 처리하는 데 적합하고 인간의 행동 유형들에 관한 주장은 경험적인 것이라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야 한다. 그런데 이것을 수용하는 것이 중요한 철학적 문제들을 해결하는 것은 아니다. 내 연구를 진행하면서 나는 생물학자들이 말하는 것들 가운데 일부(예를 들면, 인간들은 투사물을 효과적으로 던질 수 있게 하는 회전성 어깨 관절을 진화시켰다는 것과 인간 여성들은 은폐된 발정기를 진화시켰다는 것)를 중분히 이해한다. 이것들은 해결된 쟁점들이지만, 그것들과 관련된 중요한 의문들은 여전히 남아 있다. 이것들 가운데 일부는 적응에 관한 의문들이다. 던지기를 위해 선택되었다는 것이 회전성 어깨 관절의 존재에 대한 최선의 설명인가? 대답이 "그렇다"인지 명료하지 않으며, 그렇게 결론지워야 하는지 여부는 적응주의적 모형이 진화적 상황을 가장 잘 포착하는지 여부와 비교 증거에 의존할 것이다.

 

구체적인 것을 살펴보면, 생물학과 밀접하게 관련된 내 작업의 일례가 있다. 그 작업은 인간의 목적에 관한 루스 밀리컨(Ruth Millikan)의 연구와 관련된 것이다. <<의미의 다양성(Varieties of Meaning)>>(2002)이라는 책에서 밀리컨은 일반적으로 이해되는 대로의 목적―사람의 (지향적) 목적―은 더 기본적인 하위 지향적 목적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진술하는데, 이 진술은 실제 목적으로 부를 수 있는 것을 만들어내기 위해 선택된 목적들을 갖춘 하위 지향적 체계들의 접합으로부터 사람의 목적이 도출된다는 점을 의미한다. 밀리컨은 "총체적 인간의 목적은 '하위의' 또는 더 '생물학적인' 층위들에서 한데 얽힌 목적들로 구성되기" 때문에 "이런 두 종류의 목적들 사이에는 어떤 흥미로운 이론적 구별짓기도 이루어질 수 없다"고 주장한다. 나는 밀리컨의 주장을 경험적인 것으로 간주하는데, 인간의 목적의 기원에 관한 사실들이 존재한다고 밀리컨은 믿고 있다. 나는 인간들이 목적을 지니고 있다(목적을 갖고 행동한다)는 것을 논란의 소지가 없는 것으로 간주한다. 또한 나는 우리 내부에서 작동하는 하위 지향적 과정(목적과 유사한)들이 존재한다는 견해에도 공감한다. 그런데 나는, 지향적 목적이 그런 하위 지향적 과정들로부터 구성되기 때문에 그것들 사이에는 어떤 흥미로운 이론적 구별짓기도 이루어질 수 없다는 밀리컨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여기서 나는 밀리컨의 주장에 대한 나의 의견 차이를 논쟁의 철학적 뼈대인 것으로 간주한다. 무엇을 목적으로 간주하는가는 철학적 문제이다. 내 주장은, 그저 "목적"인 듯 "보이는 것"은 무언가가 목적이 되기에 불충분하다는 것이다. 나는 목적은 총체적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그런 종류의 것이라고 주장하고, 그래서 밀리컨의 그릇된 분석은 하위 지향적 과정들을 목적으로 간주한 것에서 비롯된다고 주장한다. 밀리컨의 견해에 대한 나의 처리법에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내게는 이런 종류의 작업이 왜 너무나 과학주의적인 것이라는 혐의를 받을 수 있는지, 또는 받아야 하는지 명료하지 않다.

 

어떻게 이것이 충분히 철학적이지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