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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드레아스 말름: 오늘의 에세이-인류세 신화

 

인류세 신화

The Anthropocene Myth

 

기후 변화에 대해 인류 전체를 비난하는 것은 자본주의를 곤경에서 구하는 것이다.

 

―― 안드레아스 말름(Andreas Malm)

 

작년은 역사상 가장 더운 해였다. 그런데도 최근의 수치는 2013년에 세계 경제에 가장 많은 새로운 에너지를 공급한 원천은 태양, 풍력 또는 심지어 천연 가스도 아니라 석탄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전지구적 배출의 증가율―1990년대에 연간 1%에서 그후 새천년 지금까지 연간 3%에 이른다―은 두드러진다. 그것은 화석 연료 사용의 끔찍한 결과에 관해 점점 늘어나는 우리 지식에 비견되는 증가율이다.

 

누가 인간들을 재앙으로 몰아가고 있는가? 한 가지 본원적인 대답은 자본주의가 화석 에너지의 채굴과 사용에 의존한다는 점일 것이다. 그렇지만 일부 사람들은 오히려 다른 범인들을 식별할 것이다.

 

현재 지구는 "인류세", 즉 인류의 시대에 진입했다고 한다. 대단히 인기 있는―그리고 많은 마르크스주의 학자들도 수용하는―인류세라는 개념은, 주로 엄청난 양의 석탄, 석유 그리고 천연 가스를 연소시킴으로써 인류가 지구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변형시키는 새로운 지질학적 힘이라고 시사한다.

 

이런 학자들에 따르면, 그런 파괴는 인간들이 타고난 성향들을 발휘한 결과로서 인류의 "일상 생활(business-as-usual)"에 예속된 행성의 불가피한 운명이다. 사실상 옹호자들은 달리 주장할 수 없는데, 동역학이 더 우발적인 특성을 갖추고 있다면, 생물권의 수위에 오른 하나의 종 전체에 관한 서사는 옹호하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이야기는 한 가지 고전적 원소, 즉 불에 집중한다. 인간 종만이 불을 조작할 수 있고, 그래서 기후를 파괴하는 유일한 종이다. 우리 조상들이 사물을 타오르게 하는 방법을 알게 되었을 때, 그들은 일상 생활의 도화선에 불을 붙였다. 저명한 기후과학자 마이클 라우파크(Michael Raupach)와 조셉 캐나델(Josep Canadell)는 이렇게 적고 있다. 인류를 곧장 "에너지를 쇄암질의 생물성 탄소뿐 아니라 쇄암질의 화석 탄소로부터도, 즉 처음에는 석탄으로부터도 얻을 수 있다는 발견"으로 이끈 "인류세에 대한 본질적인 진화적 촉발자"가 있었다.

 

현재의 화석 연료 연소에 대한 "제일 원인"은 "산업 혁명이 일어나기 오래 전에 한 특수한 영장류 종이 쇄암질 탄소에 저장된 매장 에너지를 끌어낼 수 있는 방법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한 살 때 걷는 것을 배운 것이 오늘날 내가 살사 춤을 추는 원인이다. 인류가 최초의 죽은 나무에 불을 붙였을 때, 그것은 백 만 년 후에 일 배럴의 석유를 연소시키는 것으로 이어질 수 있었을 뿐이다.

 

또는, 윌 스테펜(Will Steffen), 폴 J. 크루첸(Paul J. Crutzen) 그리고 존 R. 맥닐(John R. McNeill)의 말에 따르면, "우리 조상들에 의한 불의 지배는, 우리를 인류세로 이어지는 긴 행로에 확고히 올려 놓은, 다른 종들은 이용할 수 없는 강력한 독점적인 도구를 인류에게 제공했다." 이 서사에서 화석 경제는 바로 인류 또는, <<신(神) 종(The God Species)>>이라는 적절한 제목이 붙여진 마크 리나스(Mark Lynas)의 인류세 사유의 대중화 서적에서 언급되었듯이, "불 유인원, 즉 호모 피로필루스(homo pyrophilus)"의 창조물이다.

 

그런데 불을 조작할 수 있는 능력은 확실히 19세기 초 영국에서 이루어진 대규모의 화석 연료 연소의 개시에 대한 필요 조건이었다. 또한 그 능력은 그것의 원인이었는가?

 

여기서 인식해야 할 중요한 것은 인류세 서사의 논리적 구조이다. 인간 종의 어떤 보편적 특질이 독자적인 지질 시대를 추동하고 있음에 틀림없는데,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인간 종의 어떤 부분 집합의 문제일 것이다. 그런데 인간 본성에 관한 이야기는 인류세 장르와 기후 변화 담론의 다른 부분들에서 공히 다양한 형태로 제시될 수 있다.

 

<<기후 변화에 관여하기(Engaging with Climate Change)>>라는 모음집에 실린 한 에세이에서 정신분석학자 존 킨(John Keene)은 인간들이 지구를 오염시키고 그만두기를 거부하는 이유에 대한 독창적인 설명을 제시한다. 유아기에 인간은 배설물을 무제한적으로 배출하며, 돌보는 어머니가 똥과 오줌을 치우고 가랑이를 깨끗이 해줄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결국 인간들은 주변 환경을 망쳐놓는 실천에 익숙해진다. "나는 이런 반복된 만남들이 지구는 우리의 독성 생산물을 무한히 흡수할 수 있는 무한한 '화장실-어머니'이다라는 상보적 믿음의 원인이 된다고 믿고 있다."

 

그런데 화석 연료 연소와 유아 배변 사이에 어떤 종류이든 간에 인과적 관련성이 존재한다는 증거는 어디에 있는가? 19세기까지 두 기술 모두를 터득했지만 결코 지구의 탄소 퇴적물을 들어내어 대기 중에 버리지 않았던 모든 세대의 사람들은 어쩔 것인가? 그들은 자신들의 잠재력이 완전히 실현하기를 기다리고 있었을 뿐인가?

 

어떤 형태들의 정신분석을 조소하는 것은 쉬우며, 일상 생활을 인간 종의 특성들에 귀속시키려는 시도들은 헛수고가 될 수밖에 없다. 언제나 어느 곳에서나 존재하는 것은 왜 어떤 사회가 다른 모든 사회와 차이가 나고 새로운 것―대략 2세기 전에 츨현했을 뿐이지만, 이제는 대단히 확고하게 되어 인간이 만들어낼 수 있는 유일한 방식으로 인식되는 화석 경제 같은 것―을 발달시키는지 설명할 수 없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주류 기후 담론은 인류 자체, 인간의 본성, 인간의 기획, 열차를 운전하는 대악당으로서의 인류에 대한 언급으로 확실히 뒤덮혀 있다. <<신 종>>에서는 이렇게 적혀 있다. "신의 권능은 이제 인간들에 의해 점점 더 행사되고 있다. 우리는 생명의 창조자이지만, 또한 생명의 파괴자이다." 이것은 그런 담론에서 가장 흔한 수사들 가운데 하나인데, 우리, 우리 모두, 여러분과 내가 이런 혼란을 초래했고 매일 상황을 더 악화시키고 있다.

 

<<이것이 모든 것을 바꾼다(This Changes Everything)>>에서 자본 축적 일반 그리고 특수하게는 그것의 신자유주의적 변양태가 현재 지구 체계를 태워버리고 있는 불에 연료를 붓는 다양한 방식을 능숙하게 폭로하는 나오미 클라인(Naomi Klein)을 생각하자. 보편적인 인간 악당에 관한 모든 이야기를 척척 해치우면서 클라인은 이렇게 적고 있다. "파국을 막을 수 있는 최선의 기회를 우리에게 제공할 행위들이 우리의 경제, 우리의 정치적 과정 그리고 우리의 주요한 방송 매체 대부분에 대한 통제권을 갖고 있는 소수의 엘리트에게 대단히 위협적이기 때문에 우리는 곤경에 빠져 있다."

 

그래서 비판가들은 어떻게 대응하는가? <<가디언>> 지에 투고한 글에서 철학자 존 그레이(John Gray)는 "클라인은 기후 위기를 자본주의와 지구 사이의 대립으로 서술한다"고 논평하며 이렇게 반박한다. "그 위기를 인류의 팽창하는 욕구와 유한한 세계 사이의 충돌이라고 서술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그레이는 혼자가 아니다. 기후 논쟁에서 거대한 이데올로기적 분리로서 이런 분열이 출현하고 있고, 그래서 주류 합의의 옹호자들은 저항하고 있다.

 

<<런던 리뷰 오브 북스>>에서, 환경 운동을 해산하고 총체적 붕괴를 우리 운명으로 수용해야 한다고 오래 전에 주장한 적이 있는 영국 작가인 폴 킹스노스(Paul Kingsnorth)는 이렇게 반박한다. "기후 변화는 소규모의 악당 집단이 우리에게 억지로 떠넘긴 것이 아니다. 결국에는 우리 모두가 연루되어 있다." 이것은 "야만적인 1%가 지구를 괴롭히고 고귀한 99%가 그들에 반대한다고 간주하는 메시지보다 덜 구미에 맞는 메시지이지만, 그것이 현실에 더 가깝다"고 킹스노스는 주장한다.

 

그것이 현실에 더 가까운가? 여섯 가지 단순한 사실들이 정반대의 상황을 예증한다.

 

첫째, 증기 기관은 일상 생활의 본래적인 기동력으로 널리 그리고 올바르게 간주되는데, 증기 기관으로 인해 석탄의 연소가 자본주의적 상품 생산의 연쇄적인 항구적 증가와 최초로 연결된다.

 

명백히 진부한 지적이겠지만, 증기 기관은 인간 종의 타고난 몇몇 대행자들에 의해 채택되지 않았다. 상품 생산은 애초에 임금 노동이라는 제도를 전제하기 때문에 상품 생산의 원동자의 선택은 인간 종의 특권이었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새로운 원동자를 설치한 것은 생산 수단의 소유주들이었다. 십구 세기 초에 영국에서조차도 이런 계급의 사람들은 매우 작은 소수 집단―모두가 남성이자 백인으로 이루어진―이었고 인류의 극소수에 해당했다.

 

둘째, 거의 같은 시기에 영국 제국주의자들이 인도 북부 지역에 침투했을 때, 그들은 원주민들―사실상 인도인들은 석탄을 캐내고, 태우며, 석탄으로부터 열을 생성하는 방법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을 갖추고 있었다―에게 이미 알려져 있던 석탄 광층을 만나게 된다. 그럼에도 인도인들은 연료 따위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반면에 영국인들은 땅속에서 석탄을 캐내기를 간절히 원했는데, 인도 농민들로부터 우려낸 보석과 원료를 대도시로 수송하고 그들의 잉여 면직물을 내륙 시장으로 수송한 상품 증기선에 동력을 제공하기 위해서였다. 문제는 광산에 자발적으로 들어갈 노동자가 전혀 없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인도 착취를 위한 연료를 획득하기 위해 영국은 농민들이 억지로 탄갱 속으로 들어가도록 고용 계약 노동 체계를 조직해야 했다.

 

세째, 21세기 배출 급증의 대부분은 중화인민공화국에서 비롯되었다. 그런 급증의 추동자는 명백한데, 그것은 중국 인구의 증가도 아니고, 중국 가구 소비의 증가도 아니고, 중국의 공공 지출도 아니라, 21세기 초엽에 특히 저렴하고 잘 훈련된 것으로 지각된 지역 노동으로부터 잉여 가치를 추출하기 위해 외국 자본이 중국에 이식한 제조업의 엄청난 팽창이다.

 

그런 변화는 임금과 노동 조건에 대한 전지구적인 공격의 일부였다. 세계 전역의 노동자들은 필요한 물질적 기체로서의 화석 연료에 의해 착쥐당할 수밖에 없는 중국의 대체 노동력으로의 자본 재할당 위협에 짓눌리게 되었다. 이어지는 배출 급증은 계급 전쟁의 대기적 유산이다.

 

네째, 사업장을 설치하기를 원할 때마다 석유 및 가스 산업만큼 많은 대중적 반대에 직면하는 산업은 전혀 없을 것이다. 클라인이 연대기적으로 매우 잘 기록하듯이, 지역 공동체들은 알래스카에서 니제르 삼각주까지, 그리스에서 에쿠아도르까지의 탐사 개발과 프래킹과 수송관들에 반기를 들고 있다. 그런데 그들에 맞서는 것은 최근에 엑슨모빌의 회장이자 최고경영자인 렉스 틸러슨(Rex Tillerson)에 의해 전형적으로 명료하게 표현된 이해관계이다. "내 철학은 돈을 버는 것이다. 내가 시추하여 돈을 벌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내가 하고 싶은 것이다." 이것이 화석 자본 화신의 정신이다.

 

다섯째,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은 언제나 자본의 이해관계에 맞게 조율된 자체의 화석 하부구조를 계속해서 끊임없이 확대하고 심화하며, 새로운 고속도로, 새로운 공항, 새로운 화력 발전소들을 건설하는데, 이런 문제들에 관해서 거의 언제나 자국 인민들과 상의하지 않는다. 폴 킹스노스 같은 유형의 정말로 눈먼 지식인들만이 그런 정책들에 "우리 모두가 연루되어 있다"고 믿을 수 있다.

 

얼마나 많은 미합중국인들이 전력 부문에서 석탄에 더 많은 몫을 할당하여 2013년에 미합중국 경제의 탄소 세기를 상승시킨 결정들에 관여하는가? 얼마나 많은 스웨덴인들이 스톡홀름 부근의 새로운 고속도로 건설 법안―스웨덴의 현대 역사에서 가장 거대한 하부구조 계획―의 통과를 강행한 것이나 남아프리카의 화력 발전소 건설을 원조한 것에 대한 비난을 받아야 하는가?

 

"우리 모두"가 열차를 운전하고 있다는 관념을 유지하는 데에는 시장의 완전한 민주주의에 대한 가장 극단적인 환상들이 요구된다.

 

여섯째, 그리고 아마도 가장 명백하게도, 소수의 자원이 에너지로서 매우 불평등하게 소비되고 있다. 겨우 1900만 명의 뉴욕 주 거주민들이 9억 명의 사하라 사막 이남 아프리카 거주민들보다 더 많은 에너지를 소비한다. 초원 지대의 자급 유목민과 보통 캐나다인 사이의 에너지 소비 차이는 거뜬히 천 배가 넘을 것인데, 보통 캐나다인은 다섯 채의 집, 세 대의 SUV 그리고 개인용 비행기를 소유하고 있지 않다.

 

보통 미합중국인 한 명이 이디오피아, 차드, 아프카니스탄, 말리 또는 부룬디의 500명 시민들보다 더 많이 배출한다. 보통 미합중국인 한 명이 얼마나 많이 배출하는지―보통 미합중국 노동자 또는 캄보디아 노동자보다 얼마나 더 많이 배출하는지―는 여전히 산정되어야 한다. 그런데 대기에 새기는 사람의 자국은 출생지에 따라 엄청나게 변한다. 결과적으로 인류는 유죄의 부담을 지기에는 너무나 빈약한 추상물이다.

 

우리 시대는 인류가 아니라 자본의 지질 시대이다. 물론 화석 경제는 반드시 자본주의적 경제일 필요는 없는데, 소비에트 연방과 그것의 위성 국가들은 석탄, 석유 그리고 가스와 관련된 독자적인 성장 메커니즘들을 갖추고 있었다. 그것들은 냉전의 적국들에 못지 않게―아마도 오히려 더―더럽고, 검탱투성이이거나 배출 집약적이었다. 그런데 왜 자본에 집중하는가? 공산주의 국가들이 어쨌든 참담하게 실행했을 때, 자본의 파괴성을 규명할 어떤 이유가 존재하는가?

 

의학에서 비슷한 의문은 이럴 것이다. 왜 연구 노력이 천연두보다 암에 집중되는가? 둘 다 치명적일 수 있다! 그런데 한 가지만 여전히 존재한다. 역사는 소비에트 체제에 괄호를 쳐버렸고, 그래서 우리는 화석 경제가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과 동연적인 기원으로 되돌아가게 되는데, 지금은 전지구적 규모에서 그럴 뿐이다.

 

스탈린주의적 판본은 독자적인 견지(독자적인 성장 메커니즘들)에서 나름대로 탐구할 만하다. 그런데 우리는 1930년대의 보르쿠다(Vorkuta) 석탄 광산 강제 노동 수용소에서 살고 있지 않다. 우리 모두를 포괄하는 생태적 실재는 증기 동력의 자본에 의해 세워진 세계이고, 그래서 환경적으로 책임이 있는 사회주의가 택할 수 있을 대안적 행로들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인류 자체가 아니라 자본이다.

 

나오미 클라인의 성공과 최근의 거리 집결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여전히 주변부적 견해이다. 기후 과학, 정치 그리고 담론은 변함없이 인류세 담론으로 표현되는데, 추동자를 은폐하는 데 기여할 뿐인 그들의 방식과 다른 이데올로기적 급회전을 고쳐야 한다는 일반적인 소비자 대중에 대한 호소, 종 사유, 인류 때리기 그리고 무차별적인 집단적 자책으로 나타난다.

 

어떤 사회적 관계들을 종의 자연적 특성들로 묘사하는 것은 새로운 일이 아니다. 어떤 시간과 공간에 특정한 생산 양식의 탈역사화, 보편화, 영구화 그리고 자연화는 이데올로기적 정당화의 고전적 전략이다.

 

그것들은 변화에 대한 어떤 전망도 차단한다. 일상 생활이 인간 본성의 산물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무언가 다른 것을 상상조차 할 수 있겠는가? 인류세의 옹호자들과 관련된 사고 방식들이 화석 자본에 대한 반대 견해들을 피해가는 그릇된 해결책들을 옹호하거나, 아니면 킹스노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패배와 절망을 전도하는 것은 전적으로 논리적이다.

 

후자에 따르면, "이제 기후 변화를 중단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점이 분명하다." 그리고, 부언하자면, 풍력 발전 지대를 건설하는 것은 또 하나의 석탄 광산을 개발하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나쁜데, 둘 다 풍경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적대가 없다면, 인간 사회에서 어떤 변화도 결코 있을 수 없다. 기후 변화에 대한 종 사유는 마비를 초래할 뿐이다. 모든 사람이 비난받아야 한다면, 아무도 비난받지 않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