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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 알칼릴리: 오늘의 인용-흑체 복사

 

- 아래 글은 "양자 세계의 기묘함을 풀어나가는" 짐 알칼릴리(Jim Al-Khalili)의 책 <<양자: 당혹한 사람들을 위한 안내서(Quantum: A Guide for the Perplexed)>>(WN, 2004)의 pp. 34-38 부분을 옮긴 것이다.

 

- 1962년 이라크에서 태어난 짐 알칼릴리는 현재 영국 서레이 대학에서 이론물리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한국어로 번역된 그의 책은 <<알킬릴리 교수의 블랙홀 교실: 블랙홀, 웜홀, 타임머신의 물리학(Black holes, Wormholes and Time Machines)>>(이경아 역, 사이언스북스, 2007)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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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체 복사

 

어느 여름 날 여러분이 얼굴에 느끼는 태양열, 즉 열복사는 우주 공간의 진공을 가로질러 우리에게 이른다. 여러분이 의식하지 못할지도 모르는 것은 이 복사가 태양광이 우리에게 이르는 데 걸리는 시간과 정확히 같은 시간(대략 팔 분) 동안 태양과 지구 사이의 거리를 이동한다는 점이다. 이에 대한 이유는 태양의 열복사와 가시 복사 둘 다 전자기파 형태들이기 때문이다. 그것들을 서로 구별하는 것은 그것들의 파장일 뿐이다. 가시광선에 해당하는 진동들은 우리가 열로 느끼는 파동들의 진동들보다 더 조밀하게 압착되어 있다(더 짧은 파장, 그래서 더 높은 진동수). 또한 태양은 가시광선 영역을 넘어서는, 훨씬 더 짧은 파장의 자외선도 방출한다.

 

그런데 전자기 복사를 방출하는 것은 태양만이 아니다. 모든 물체가 방출하며, 그리고 스펙트럼의 전체 진동수 영역에 걸쳐 방출한다. 진동수에 따른 분포는 물체의 온도에 의존한다. 고체가 충분히 뜨거우면 그것은 눈에 보이게 백열하지만, 그것이 차가워짐에 따라 그것의 백열은 감소하며 더 큰 파장의 복사―가시광선 영역을 넘어서는―가 지배한다. 이것은 그 물체가 가시광선을 더 이상 방출하지 않는다는 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빛의 세기가 너무 약해서 볼 수 없을 것이라는 점을 의미할 뿐이다. 물론 모든 물질은 자체에 쏟아지는 복사를 흡수도 하며 반사도 한다. 어떤 파장들이 흡수되고 반사되는지가 우리가 보는 모든 것의 색깔을 결정한다.

 

19세기 후반에 물리학자들은 흑체로 알려진 특별한 종류의 따뜻한 물체가 복사를 방출하는 방식에 매우 큰 관심을 가졌다. 흑체라고 불리는 까닭은 그것이 어떤 빛이나 열도 반사하지 않는 완벽한 복사 흡수체이기 때문이다. 물론 흑체는 그것이 흡수하는 모든 에너지를 아무튼 처리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면 그것의 온도가 무한히 올라갈 것이다! 그러므로 흑체는 가능한 모든 파장에 걸쳐 열을 방사한다. 물론 세기가 가장 강한 복사의 파장은 흑체의 온도에 의존한다.

 

거의 모든 물리학 교과서에서는 다양한 온도에서 흑체가 방출하는 복사의 세기를 복사의 파장에 대해 그래프로 나타낼 때 산출되는 여러 곡선(스펙트럼이라 불리는)을 보여주는 그래프가 발견될 것이다. 이 곡선들은 모두 매우 짧은 파장 영역에서 낮은 세기로 시작하고, 최대로 증가하며 긴 파장 영역에서 다시 감소한다. 막스 플랑크(Max Planck) 같은 물리학자들의 관심을 크게 끈 것은 바로 이 곡선들의 모양이었다.

 

일단 새로운 실험 데이터를 입수할 수 있게 되면 그것을 설명하는 것이 이론의 작업이라는 점은 과학 연구에서 흔히 일어나는 방식이다. 흑체 스펙트럼의 경우에도 그랬다. 1896년에 플랑크의 동료인 빌헬름 빈(Wilhelm Wien)은 자신이 정확히 측정한 실험 데이터와 짧은 파장 부분에서는 매우 잘 일치하지만, 긴 파장 부분에서는 매우 잘 일치하지 않는 곡선을 나타낼 수 있게 하는 공식을 고안했다.

 

대략 같은 시기에 19세기 물리학의 거인들 가운데 일인인 영국인 레일리(Rayleigh) 경은 빈의 방정식보다 더 엄밀한 이론적 유도에 바탕을 둔 다른 공식을 제안했다. 그렇지만 그의 이론은 정반대의 문제를 겪었는데, 그것은 곡선의 긴 파장 부분에서는 데이터와 전적으로 잘 일치하였지만, 반대쪽―가시광선보다 더 짧은 파장의 복사―에서는 완전히 어긋난다. 레일리 이론의 이런 실패는, 흑체의 의해 방출되는 열복사는 파장이 짧아짐에 따라 세기가 증가하고 스펙트럼의 자외선 영역에서는 무한히 쏟구쳐야 한다고 예측한 곡선에서 분명히 나타났다. 이 문제는 '자외선 파탄(ultraviolet catastrophe)'이라고 알려지게 되었다.

 

많은 대중적인 설명들과는 대조적으로, 막스 플랑크는 레일리 공식의 실패 때문이 아니라 빈의 공식을 확고한 이론적 기초에 두기 위해 흑체 복사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의 초기의 시도들이 실패한 후에, 그가 잠정적으로, 그리고 상당히 마지못해, 사뭇 다른 새로운 공식에 이르게 된 매우 집중적인 연구의 시기가 이어졌다.

 

플랑크는 보수적인 관점을 지니고 있었고, 그의 경력 초기에는 루드비히 볼츠만(Ludwig Boltzmann) 같은 자신의 동시대인들이 옹호한 원자들의 존재도 믿지 않았다. 플랑크는, 물질이란 궁극적으로 근본적인 '구성 요소들'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무한히 쪼개지며 여전히 자체의 본질을 유지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물질은 연속적이라는 점이 곧 증명될 것이라고 느꼈다. 그렇지만 흑체 복사에 대한 해결책을 발견할 때, 그가 자신의 이론의 근거로 삼은 것은 볼츠만의 관념들이었다. 1900년 12월 4일에 열린 독일 물리학회의 세미나에서 그는 자신의 결과를 발표했는데, 그날이 양자역학의 탄생일로 널리 여겨진다.

 

그의 제안은 이랬다. 흑체가 궁극적으로 진동하는 원자들로 이루어져 있다면―플랑크는 그것들을 '진동자들'(흑체의 온도에 의존하는 진동수로 진동하는 모호한 기본적인 존재자들)이라고 언급했을 뿐이라는 점이 강조되어야 하지만―그것들이 내어 놓는 에너지(흑체의 복사)는 그것들의 진동수에 의존한다. 이것은 그것들의 진동수가 높으면 높을수록 그것들은 더 많은 에너지를 방출할 것이라는 점을 의미할 것이다. 그러나 핵심은 그런 진동자들이 어떤 진동 양태들만 가질 뿐이고 그것들의 진동수는 매끈하기보다 일정한 간격으로 올라가야 할 것이라는 점이었다. 그러므로 가능한 모든 에너지가 허용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방출된 에너지는 어떤 값들만 가질 것이다. 따라서 에너지는 띄엄띄엄한 덩어리, 즉 '양자'들로 올 것이다. 이것은 에너지가 연속적이라고 간주되는 맥스웰의 전자기파 이론에서 본원적으로 벗어나는 것이다.

 

여기서 두 가지 것이 언급될 필요가 있다. 첫째, 플랑크는 처음에는 자신의 혁명적인 관념의 함의를 깨닫지 못했다. 그가 에너지 양자를 도입한 것은, 그 자신의 말에 따르면, "순전히 형식적인 가정이었으며, 나는 비용이 얼마나 들더라도 긍정적인 결과를 만들어내야 한다는 생각 이외는 그것에 관해 정말 생각을 많이 하지 않았다". 둘째, 플랑크는 모든 에너지가 궁극적으로 환원불가능한 미소한 덩어리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여기지 않았다. 그 점은 오 년 뒤 아인슈타인의 천재성을 기다려야 했다.

 

다시 말하자면, 플랑크의 가설은 두 가지 가정에 바탕을 두고 있었는데, 첫 번째 가정은 원자들(또는 진동자들)의 에너지는 어떤 값들만 취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것들은 원자들의 진동수의 단순한 배수였다. 두 번째 가정은 흑체의 복사 방출은 한 값, 또는 준위에서 더 낮은 값으로 떨어지는 원자들의 에너지와 관련이 있다는 것이었다. 에너지가 떨어질 때, 원자는 복사 에너지의 단일한 양자를 방출한다.

 

이것을 시각화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일련의 계단을 굴러 내려오고, 그래서 매끄한 경사면을 굴러 내려올 때처럼 연속적이라기보다 불연속적으로 자체의 '위치' 에너지를 포기하는 공에 관해 생각하는 것이다. 차이는 원자 에너지 준위들 사이의 양자 도약들은 즉시 일어나는 반면에, 공이 각 계단을 내려가는 데 짧지만 유한한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공의 위치에너지는 사실상 모든 에너지 준위를 거친다는 점이다.

 

플랑크의 연구의 중요성은 즉각적으로 인식되지 못했다. 역사가 헬게 크라호(Helge Kragh)의 말에 따르면,

 

1900년 12월에 물리학에서 혁명이 일어났다면 아무도 그것을 인식하지 못한 것 같았다. 플랑크도 예외가 아니었고, 그의 연구에 부여된 중요성은 대체로 역사적으로 재구성된 것이다.

 

이것은 상당히 가혹한 듯 보이지만 참일 것이다. 나는 더 관대하기를 선호하여 그것을 약간 다르게 서술한다. 플랑크가 양자의 창시자인 것은 맞는데, 그는 그것을 그 당시에 몰랐을 뿐이다! 그가 무엇을 시작했었는지 정말로 이해하는 데는 더 심층적이고 더 독창적인 다른 사상가들이 필요했다. 어쨌든 플랑크의 기여는 작은 첫걸음에 지나지 않았다. 아인슈타인, 보어, 드브로이, 슈뢰딩거, 그리고 하이젠베르크 같은 물리학자들이 개별적으로 플랑크보다 더 많이 기여했다. 플랑크의 창시자였을 뿐이었다.

 

나는 어려운 생을 보낸 막스 플랑크를 항상 좋아했다. 1930년대에 그는 과학의 원로로서 나치에 저항했지만, 이차세계대전 동안 그에게 큰 개인적 비극이 일어날 것이었다. 그는 나치의 정책들 가운데 많은 것, 특히 유대인들의 박해를 공개적으로 반대했던 나치 체제 동안 독일에 남아 있기로 결심했었다. 그의 자식들 가운데 셋은 이미 어린 나이에 죽었었고, 나머지 두 아들은 전쟁에서 살아남지 못했다. 한 아들은 전투 중에 살해당했고 나머지 한 아들은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에 연루되어 처형당했다. 플랑크 자신은 1944년에 연합군 폭탄이 그의 집을 파괴했을 때 큰 곤란을 겪었다. 그는 1947년에 89세의 나이로 죽었다.

 

번역: 김효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