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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데디아 퍼디: 오늘의 에세이-인류세를 상상하기

  

인류세를 상상하기

Imagining the Anthropocene

 

―― 제데디아 퍼디(Jedediah Purdy)

 

공식적으로, 지난 11,700년 동안 우리는 충적세(Holocene) 시대를 살고 있었다. '전적으로 새로운'이라는 의미를 나타내는 그리스어에 기원을 둔 충적세는 지질학적 시간에서 눈 깜박할 사이에 지나지 않는다. 거의 12,000년 동안의 충적세에 지구의 판 구조 활동은 대륙들을 800미터 조금 넘게 움직였는데, 알맞게 건강한 사람은 8분 동안의 활기찬 보행으로 지구적 변화의 규모를 답파할 수 있을 것이다. 충적세는 온난한 시기였는데, 온도가 판 구조 활동만큼 중요했다. 빙하가 녹음으로써 해수면의 높이가 3.5미터 상승했으며, 북부 지형들은 자체의 무거운 빙하를 벗음에 따라 거의 18미터 올라갔다.

 

그런데 충적세의 진짜 뉴스는 사람이었다. 충적세 초기에 지구 전체 인구는 백 만에서 천 만 사이로 추정되며, 대략 5,000년 전의 농업 혁명 이후까지 그 범위를 유지했다. 그때 이후로 우리는 세계를 우리의 개미탑으로 만들어버렸는데, 현재 우리가 지구 표면 위에 쌓고 있는 지층은 우리의 화학 물질과 산업 쓰레기, 곡물의 꽃가루 그리고 우리가 멸종시켜버린 많은 종들의 부재로 특징지워진다. 해수면 상승이 현재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이다. 전지구적 변화의 추동자로서 인류는 지질학을 능가해버렸다.

 

이런 이유 때문에 학술적으로 지구과학과에서 영문학과까지 우리가 새로운 시대, 즉 인류세―인간의 시대―에 살고 있다고 정말로 앞다투어 선언하고 있다. 1980년대에 생태학자 유진 스토머(Eugene Stoermer)에 의해 고안되고 2000년에 노벨 상 수상자인 대기과학자 폴 크루첸(Paul Cruzen)에 의해 대중의 이목을 끌게 된 그 술어는 런던 지질학회 층서학위원회에서 여전히 공식적으로 검토되고 있다.

 

공식적인 결정이 내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인류세는 논평가들이 인간/자연 관계의 획기적인 변화가 무엇인지 식별하기 위한 로르샤흐 반점으로 설정되었다. 중국과 중동에서 일어난 농업의 등장인가? 제국의 시대의 전세계적인 농경 확산과 산업 혁명인가? 원자 폭탄인가? 메탄 농도에서 탄소 농도까지, 잔류 꽃가루에서 방사성 낙진까지, 이런 변화들 각각은 지구의 지질학적 기록에 자체의 낙인을 새긴다. 또한 각각의 변화는 일단의 새로운 인간 역능들과 지구에서의 새로운 생활 방식에 대한 상징물이다.

 

인류세와 결부되는 가장 급진적인 사상은 이러한데, 인간과 자연적 세계 사이의 친숙한 대조는 더 이상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간들과 별개로 존재하는 자연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까지 우리가 변화시키지 않은 장소나 생물은 전혀 없다. 우리의 낙인은 날씨와 계절의 순환, 생물 지역들의 전지구적 지도, 그리고 물질을 생명으로 조직하는 DNA 위에 새겨져 있다. 문제는 더 이상 야생 세계를 인간의 침입으로부터 어떻게 보존해야 하는가가 아니라, 우리가 변화시킬 수밖에 없는 세계를 어떤 모습으로 구성할 것인가이다.

 

이제부터 자연은 부분적으로 인간의 창조물이라는 깨달음 덕분에 인류세는 세 가지 거대한 혁명들 가운데 가장 최근의 혁명이 된다. 예전에 주어진 것이자 자기지속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던 세 가지 종류의 질서는 취약한 인간의 창조물인 것으로 판명되었다. 붕괴한 첫 번째 것은 정치였다. 왕이 천상의 천사와 숲 속의 참나무와 동등한 인간의 역할을 수행하면서 오랫동안 신의 설계의 일부로 간주되었던 정치는 위험하지만 회피할 수 없는 건축 형식―구부러진 재료들로 건설된, 평화로운 공존을 위한 청사진―인 것으로 판명되었다. 두 번째 것은 경제였다. 섭리의 선물 또는 인간 본성의 파생물로 제시되었던 경제 생활은, 정치와 마찬가지로, 의도적이고 인위적인 성취인 것으로 판명되었다. (여전히 우리는 워싱턴에서 그리스를 거쳐 중국까지 그것이 취할 수 있는 형태들의 범위에 대한 논쟁을 벌이고 있다.) 이제 인류세에서는 자연 자체가 자연적이지 않는 것들의 목록에 합류하게 된다. 이제부터 우리가 거주하는 세계는 우리가 만든 세계일 것이다.

 

인류세가 나타내는 관념 혁명은 수백 개의 두드러지게 실제적인 문제들에 뿌리를 두고 있다. 기후 변화에 관한 대화는 우리가 온실 가스 농도들을 핵심 문턱 이하로 유지할 수 있는지 여부에서 그것들이 그런 문턱을 넘어설 때 우리가 어떻게 적응할 것인가라는 주제로 바뀌었다. 행성적 체계들에 인위적으로 개입하는 지구공학은 과거에 흔히 기후 정책에서 말로 나타낼 수 없는 제안이었다. 이제 그것은 혼란 상태에 있으며 거의 확실히 점점 더 두드러지고 있다. 기후 변화가 생태적 경계들을 이동시킴에 따라 서식지 보존 같은 쟁점들은 경관 건축과 유사해진다. 동물들을 구하기 위해 우리는 그들을 결코 우리에 가둘 수 없는데, 동물들의 서식지가 이동함에 따라 이주에 있어서의 도움과 풍경 규모의 지대가 필요하다. 법률과 정책 진영들에서 종 보존에 있어서의 우선 순위의 구분에 관한 공개 회의가 있는데, 우리가 무엇을 구할 수 있는지, 그리고 우리는 무엇을 구하기를 가장 바라는지라고 묻는다.

 

문화와 정치에서 인류세라는 이 관념은 무슨 일을 하고 있는가? 인류세는 과학적 개념인 만큼이나 정치적이고 윤리적인 책략이다. 우리가 인류세에 살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우리는 우리가 만들고 있는 세계에 대한 책임을 회피할 수 없다고 말하는 한 가지 방식이다. 여기까지는 좋다. 문제는 인류세라는 모든 것을 포괄하는 카리스마적인 관념이 각자 선호하는 판본의 "지구에 대한 책임감을 갖기"에 대한 만능의 영사막과 증폭기가 될 때 개시된다.

 

네이처 컨저번시(Nature Conservancy)의 물의를 일으키는 수석 과학자인 피터 카레이바(Peter Kareiva)는 "인류세에서의 보존"이라는 주제를 사용하여 환경주의를 철학적으로 소박하고 정치적으로 퇴행적인 것으로 모욕한다. 카레이바는 보존주의자들로 하여금 야생을 포기하고 작가 엠마 매리스(Emma Marris)가 "활기 넘치는 정원(rambunctious garden)"이라고 부르는 것을 수용하도록 촉구한다. 특히 카레이바는 "생물 다양성을 위해 생물 다양성의 보존을 추구하"는 대신에 생태계들이 인간들에게 제공하는 "생태계 서비스"의 질로 생태계들의 등급을 매기기를 원한다. 그는 "자연은 취약하기보다 탄력적이다"라고 가정하는 친개발적 입장을 원한다. 그는 이렇게 주장한다. '보존주의자들은 자본주의를 질책하는 대신에 자연의 편익의 가치를 기업의 운용과 문화에 통합시키려는 과학에 기반을 둔 노력으로 기업들과 협력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네이처 컨저번시가 다우, 몬사토, 코카콜라, 펩시, J P 모건, 골드만 삭스 그리고 광산 대기업 리오 틴토와 맺은 협력 관계가 환기시키듯이, 자연의 종말은 녹색 상표가 붙은 일상 생활로 계속 살아가라는 신호이며 기업의 본분은 사업이다.

 

카리에바는 <<뉴욕 타임즈 매거진>>의 이동 환경 리포터 앤드류 레프킨(Andrew Revkin)이 선호하는 인물인데, 레프킨은 카리에바를 책임지기의 귀감, "인류세라는 이 시대에는 사유 및 행위에 대한 새로운 모형들이 요구된다는 점을 이해하는 학자와 실천가들의" 지도자라고 과대 선전한다. 이 두 사람과 캘리포니아 소재 브레이크스루 인스티튜트에 있는 그들의 친구들은 환경주의를 인도주의적이고 발전친화적인 것으로 '쇄신'하기 위한(그리고 흔히 인류세의 주요한 생태계 서비스인 듯 보이는 강연료와 자문료를 챙기기 위한) 노력을 지속하는 것으로 읽힐 수 있다. 이것은 자체적으로 상표화 전략이고, 과시하는 듯이 반짝이는 병에 든 값싼 포도주를 철렁거리는 기회이다.

 

<<뉴욕 타임즈 매거진>>의 어딘가에서 여러분은 인류세 영사막의 반대편 끝 부분을 향유할 수 있는데, 여기서는 일상 생활에서 '이것이 모든 것을 바꾼다(this changes everything)'는 상황로 전환된다. "인류세 시대에 죽는 법을 배우기(Learning How to Die in Anthropocene)"(2013)라는 에세이에서 프린스턴의 학자이자 전직 사병인 로이 스크랜턴(Roy Scranton)은 '이 문명은 이미 죽었다'고 적고 있으며 나아가는 유일한 길은 '우리 자신을 구하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점을 깨닫는' 것이라고 역설한다. 그는 이렇게 결론짓는다. '인류세에서 살아가는 것을 익히고 싶다면 우리는 죽는 법을 먼저 배워야 한다.'

 

다른 인문학자들은 종말을 끌어안는 것의 의미에 몰두한다. "역사의 기후(The Climate of History)"(2008)라는 영향력 있는 에세이에서 시카고 대학의 이론적 사고를 갖춘 디페시 차크라바티(Dipesh Chakrabarty)는 인류세가 휘그적 낙관주의에서 자신의 탈식민적 탈근대주의에 이르기까지 인간 역사에 대한 모든 수용된 설명을 의문시하게 만든다고 주장한다. 그는 걱정스럽게 묻는다. '1750년부터 현재까지의 시기는 자유의 시기였는가 아니면 인류세의 시기인가?' 그리고 그는 이 시대는 새로운 사유의 패러다임, 즉 '부정적인 보편사"를 필요로 한다고 결론짓는다.

 

<<어메리컨 리터리처(American Literature)>>의 특별호인 <<생태 비평(Ecocriticism)>>(2012)의 서론에서 위스콘신-매디슨 대학의 영문학자 모니크 알레워트(Monique Allewaert)와 데이비스 소재 캘리포니아 대학의 영문학자 마이클 자이저(Michael Ziser)는 인류세를 '자체를 파괴하고 심지어 자체의 흔적을 부인하는 근대 세계의 불안한 정동에 대한 스냅 사진'으로 가장 잘 포착되는 것으로  서술한다.

 

이런 사람들(상표화 기회주의자들은 제외하고)은 모두, 다소간 성공을 거둔 채, 인류세가 자기 삶의 상당한 부분을 바쳐온 기획들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물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어떤 광범위한 사변과 전면적인 요약들이 기대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럼에도 인류세라는 관념 속에 담긴 무언가가 영웅적 사고, 중대한 시점, 즉 대재난의 벽에 압착되거나 자연과 역사의 종말에 이른 인간 정신의 분위기와 수사법을 촉발하는 듯 보인다.

 

이런 도발적인 결함 속에서, <<인간 위기의 시대(The Age of the Crisis of Man)>>(2015)라는 20세기 중반 미합중국 사유에 관한 마크 그라이프(Mark Greif)의 연구서에서 한 가지 술어를 차용하면, 인류세 이야기는 책임에 관한 담론이다. 그라이프는 고결한(그런데 흔히 중도적인) 수사법은 긴급한 언어와 전면적인 개념들(또는 사이비 개념들)의 혼합물―책임, 인간의 운명, 현재의 위기―로 세계 전쟁과 전지구적 투쟁들의 공포에 대응했다고 주장한다. 그라이프는 책임 담론들을 대단히 진지한 어조로 발설되는 말과 사유를 고상한 형식의 행위로 변환시키려는 시도로 서술한다. 이 모든 것은 인류세 이야기에서 인식할 수 있다. 엄밀히 말해서, 인류세는 소중한 확신들의 핵심과 관련하여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바꾸지 못하는 듯 보인다. 그런데 그것은 최대 11명까지 마음을 바꾸었다.

 

전체적으로 이것은 별개의 많은 사건들을 단일한 유형으로 통일하는 새로운 시각에 수반되는 불가피하고 흔히 생산적인 혼란스러움이다. 아무 관련도 없는 듯 보이는 것들을 통일하고자 하는 제안으로서의 '인류세'는 1960년대와 1970년대 초에 '환경'이라는 관념이 수행한 것과 동일한 작업을 수행하려는 시도인데, 그것은 멸종, 난개발, 쓰레기, 국립공원 정책 그리고 원자 폭탄 같은 광범위한 문제들을 '생태적 위기'로 불리는 단일한 현상으로 병합시킨다. 흔히 세계를 분할하는 다양한 방식이 존재한다는 사소한 의미에서 그럴지라도, 그런 분류는 항상 얼마간 자의적이다. 아무리 자의적일지라도, 사람들이 운동을 조직하고, 변화를 제시하며, '환경'을 겨냥한 법률을 통과시킴으로써 무언가를 실재적인 것으로 간주한다면 그것은 실재적인 것이 된다.

 

우리는 '환경'이라는 개념이 무엇을 만들어냈는지 알고 있지만, 인류세는 어떤 모습일 것인가? 과도하게 극화된 이 관념을 가능한 최소의 영웅적인 외관으로 나타낸다면, 인류세에 날씨는 어떤 모습일 것인가? 그리고 우리는 날씨에 관해 어떻게 이야기할 것인가?

 

인류세를 휘젓는 위기에 관한 모든 이야기에도 불구하고, 변화하는 지구가 파국 또는 종말의 느낌을 가질 가능성은 없다. 아직도 일부 환경주의자들은 미래의 활동가들을 고무하기 위해 종말에 관해 경고하지만, 인간의 힘이 지구를 동요시킬 때에도 지질학적 시간은 정치적 시간보다 여전히 훨씬 느리다. 그 대신에 인류세는 오늘날과 유사할 것인데, 더 심화될 뿐일 것이다. 날씨에서 토양과 여러분의 국소적인 생태계에 이르기까지 많은 체계들은 서서히 진행되는 영구적 위기 상태에 놓일 것이다. 그리고 묵시록적 변화는 시간의 파열인 반면에, 서서히 진행되는 위기는 정상적인 것으로 느껴진다. 사실상 그것은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그래서 인류세는 자연스러운 것으로 느껴질 것이다. 기후 예측 모형들의 물의를 일으키는 경험학 겸 수학 때문이 아니라 루소로 거슬러 올라가는 근대성의 근본적인 통찰―인류는 융통성 있는 종이다―때문에 나는 이렇게 말한다. 500년(한 종의 진화적 생애에서 짧은 시간)은 고사하고 100년 전에는 상상할 수 없거나 이해하지 못할 수밖에 없는 듯 보였을 것이 한 세대만에 통상적인 것이 될 수 있다. 그것이 '디지털 원주민들"을 만들어내는 데, 사람들이 전기와 텔레비전에 익숙해지는 데, 그리고 우리의 물질적이고 기술적인 세상에서 일어난 각 혁명에 대해 적응하는 데 걸린 시간이다. 이런 종류의 적응성을 극복하는 데에는 엄청난 변화가 필요하다.

 

이것은 부유한 나라의 인류가 이미 외인성 충격―인류세에 더 빈번해지고 더 격심해질 것이다―과 끊임없이 기술적으로 대결하면서 살고 있기 때문에 더욱 더 그렇다. 북아메리카의 대부분은 오늘날의 미합중국보다 더 단순한 사회를 파괴할 가뭄과 열파를 규칙적으로 겪는다. 그 대륙은 서부의 용수로에서 대평원의 관개 체계와 거의 도처에 설치된 공기 조절 장치에 이르기까지 철저히 공학적으로 개조되었기 때문에 이런 것들은 불편한 것, 그저 '뉴스'로 경험된다. 더 가난한 지역에서는 동일한 사건들이 대재난이다.

 

행성적 변화는 뉴스를 얻게 되는 사람들과 대재난을 만나게 되는 사람들을 구분하는 불평등을 증폭시킬 것이지만, 탈자연적 자연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이런 불평등은 세계 자체에 내장되어 있는 것처럼 느껴질 것이다. 노예가 된 사람들은 계속해서 무식한 상태로 남게 되고 굽신거리지 않을 때 처벌받게 되는가? 그렇다면 무지와 노예 근성은 그들의 본성에 내재되어 있음에 틀림없는데, 이것은 연속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관념이다. 여성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인데, 그들의 본성은 약간 편집된다. 여성들은 순종적이고 섬세하고 히스테리를 일으키기 쉬우며 보살피는 본성을 갖추고 있다. 영어권 철학이 성 차이에 관한 수 천년 간의 자연 담론에 근본적인 이의를 제기한 것은 해리엇 테일러(Harriet Taylor)와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이 <<여성의 종속(The Subjection of Women)>>(1869년에 밀의 이름만으로 출판되었다)에 관해 함께 작업했던 때이다.

 

아메리카 원주민의 추방은 여러 판본들의 본성(자연)으로 '정당화'되었다. 그들은 인종적으로 다를지도 모른다. 그들의 기후 때문에 그들은 약하고 비이성적인 사람들이 됨으로써 토지를 경작할 수 없거나 유럽인들의 정착에 저항할 수 없었을 것이다. (식민주의자들은 이 관념을 간단히 수용했고, 그래서 그들이 북아메리카 기후가 이제 그들의 기후라는 점을 깨달았을 때 점점 더 불편해졌다. 미합중국이 독립할 무렵에 그들은 급히 인종적 특질에 관한 기후 이론들을 거부했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그저 모든 인류의 자연적 의무, 즉 야생을 정리하고 이식하여 영국식 정원처럼 피어나게 만들어야 한다는 17세기와 18세기에 많은 자연법 이론가들이 제기한 관념을 충족시키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이런 저런 식으로 자연은 인간의 부정 행위에 대한 일종의 존재론적 보험 정책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떠한가? 글쎄, 해수면 상승이 먼저 세계의 가장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 일부에게, 특히 방글라데시와 인도 해안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점은 일반적인 생각이다. 그런데 상황은 냉혹한 지리적 우연의 일치보다 훨씬 더 나쁘다. 부는 항상 자연의 잔혹한 조치로부터의 어떤 보호책을 의미했다. 사실상 그것이 살해당하지 않기 위한 기술과 모든 종류의 발전에 대한 첫 번째 박차였다. 영향을 미치는 범위가 변화하는 열대병의 경우에 예방 접종과 의학을 잘 갖춘 일부 인구 집단들은 잘 대응하게 될 것이고, 다른 인구 집단들은 나쁜 정부와 무책임한 보건 체계와 싸우게 될 것이다. 해수면이 상승할 때 무기력하지만 부유한 미합중국도 빨리 적응하기 시작할 것이고, 해안 지역의 홍수는 부유한 세계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 가난한 사람들의 재난으로 분류될 것이다.

 

기근의 경우에도 그럴 것이다. 불평등한 인류세 취약성의 법률적 체제는 잘 작동되고 있다. 중국 기업들이 아프리카의 가장 비옥한 농토의 일부에 대해 맺은 방대한 장기적인 임대 계약을 고려하자. 가뭄, 토양 소진 또는 곡물 위기가 전지구적 식량 생산에 어려움을 줄 때, 계약과 통상은 수십 조 칼로리를 뚱뚱하고 행복한 베이징에 견인해 줄 것이다. 물론 이것은 제국주의와 탈제국주의적인 공식적으로 자발적인 전지구적 불평등의 세기들에서 가장 최근의 장일 뿐이다. 그런데 그것은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쓰고 있는 장이다.

 

우선 인류세 불평등은, 시장은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개혁의 여지가 없어서 대안이 전혀 없다고 역설하는 이데올로기를 수반하는 신자유주의, 즉 독단적인 시장 논리와 점점 더 균일해지는 시장 형식들의 전지구적 확대와 특별히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전지구적인 생태적 불평등에 관한 이전의 일화들―영국의 지배를 겪은 19세기 말의 인도 기근―은 제국의 직접적인 통치 아래 일어났던 반면에, 현재의 불평등은 자유 계약이라는 징표 아래 출현하고 있다. 그러므로 인류세 불평등은 이중으로 세탁되고 있다. 이제는 모든 곳에서 인간 활동이 '자연적' 세계를 형성하기 때문에 독자적인 사이비 자연적인 시장에서 그런 세계 형성 활동이 진행되기가 특히 편리하다.

 

그런데 인류세 문제들은 경제학의 권위에도 압력을 가한다. 환경 경제학의 대부분은 아무 가격표도 붙어있지 않은 해악 또는 편익, 즉 부작용을 나타내는 경제학적 술어인 외부성(externality)라는 개념에 기반을 두고 만들어졌고, 그래서 시장 결정에서 무시된다. 공기 오염―오염자에게 공짜이다―은 고전적인 나쁜 부작용, 즉 '부정적 외부성'이다. 습지―부동산 시장에서 가치가 매겨지는 것이 아니라, 복제하는 데 많은 비용이 드는 여과 및 정화 작용 그리고 비옥함의 원천으로서의―는 대표적인 긍정적 외부성이다. 그래서 카레이바의 네이처 컨저번시가 계발해오고 있는 신자유주의적 환경주의는 자연을 철저히 시장으로 가져와서 이전의 모든 부작용에 대한 여지를 찾아내고 생태와 경제를 완전히 합병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기후가 바뀐 인류세에서는 규모와 결과에 있어서 부작용들이 '정규적인' 시장을 압도한다. 그리고 부작용의 가치를 매기는 '중립적인', 순전히 시장에 기반을 둔 방식은 전혀 없다. 예를 들어 탄소 배출을 고려하자. 지금까지 유럽, 캘리포니아 그리고 다른 관할 구역들이 행했듯이, 탄소 배출 시장을 창출하는 것이 가능하지만, 그런 시장의 근저에는 탄소 배출의 모든 (불확실하고 심지어 추정되는) 부작용에 대해 탄소를 배출하는 경제적 활동의 가치를 매기는 방식에 관한 정치적 결정이 놓여 있다. 그 점은 인류세 행성의 모든 (탈)자연적 체계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성립한다. 궁극적으로 문제는 생명의 가치와 생활 방식이다. 올바른 기술지배적 해결책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인류세의 모습은 정치적이고 윤리적이며 미학적인 문제이다. 그것은 어떤 생명이 가치가 있는지, 어떤 사람들이 신세를 지고 있는지, 그리고 세계 속 어떤 것이 보존하거나 (재)창조될 만큼 충분히 경이롭거나 아름다운지와 관련된 의문들에 대답할 것이다. 그 대답들은 현존하는 불평등을 재생산하고 증폭하거나 아니면 상이한 권력 논리를 작동시킬 것이다. 인류세는 민주적인 것이 되거나 아니면 끔찍한 것이 될 것이다.

 

민주적인 인류세는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아마르티아 센(Amartya Sen)의 유명한 주장―최소한 민주적인 사회는 결코 기근을 겪어본 적이 없다―에서 시작할 것이다. 자연적 대재난들은 자연적 체계와 인간적 체계들의 공동 산물이다. 재난에 대한 여러분의 취약성은 흔히 정치적(그리고 경제적) 질서에서 여러분의 지위에 대한 직접적인 표현이다. 인류세는 심화되고 있는 생태, 경제 그리고 정치의 병합을 나타내며, 그리고 그런 체계들에서의 지위는 점점 더 유일한 문제가 될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민주주의에 관한 이야기는, 인류세에 관한 대부분의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추상화되고 도덕화되는 위험에 처해 있다. 민주적인 인류세에 관한 성찰은 그런 규모의 문제에 작용할 수 있는 행위자―국가 또는 심지어 운동―의 치명적인 부재에 관한 태만한 사색이 된다. 사실상 그것은 문제를 규정할 수 있는 행위자도 전혀 없다는 것을 드러낸다. 인류세가 인류와 지구 사이의 관계에 관련된 것이라면, 글쎄, 기후 변화, 멸종, 중독 등의 정언 명령과 어떤 특별한 의미에 관해 의견이 일치하는 '인류'는 전혀 없다. 인류세에 관해 생각하는 것은 모든 것과 관련하여 아무것도 행할 수 없는 것에 관해 생각하는 것이다. 틀림없이 그 주제는 해결책이 최저선을 교정하거나 개인적 계몽을 연마하는 것―확실히 항상 어떤 가공의 '우리'라는 명목으로―에 있다는 보상적 환상을 촉발한다.

 

이것 때문에 우리는 인류세가 충분히 납득시키는 기본적인 문제로 돌아가게 된다. <<전체주의의 기원(The Origins of Totalitarianism)>>(1951)에서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가 주장했듯이, 탄탄한 제도와 실천을 통해서 그것을 제대로 실현할 수 있는 정치적 공동체가 없다면 인권이라는 관념은 근거없는 환상이고 잔인한 조소의 대상이다. 인류세는 세계가 그런 정치체, 또는 그런 정치체들의 연합체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보여주며, 그리고 그런 부재에 얼마나 많은 것이 걸려 있는지 보여준다. 세계는 너무나 많은 우리와 함께 존재한다. 더 나쁜 것은, 세계와 공존할 '우리'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런 모든 장벽에 직면하여 인류세에 관한 이런 모든 이야기는 무엇을 성취할 수 있을 것인가? 역설적으로, 유용한 비교가 아렌트의 표적, 즉 인권이라는 단순한 관념에 놓여 있다. 단순한 관념들은 사실상 관리할 수 없는 상황에서의 유감스러운 위안책이지만, 그것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것들을 추구하기 위해 새로운 방식으로 조직하게 만드는 요구, 기획, 심지어 유토피아의 기원일 수 있다. 지금까지 인권이라는 관념은 많은 노력이 집중되고 굴절되는 프리즘으로서의 자체적 힘의 대부분을 이런 식으로 획득했다.

 

민주적인 인류세는 당분간 생각에 불과하지만, 또한 그것은 활동가, 사상가 그리고 지도자들이 일부 사람들을 더 나은 가능 세계 아니면 더 나쁜 가능 세계에 약간 더 가까이 데려가는 난제와 초청장을 공들여 만드는 데 사용하는 도구일 수도 있다. 사람들이 거주하게 되는 세계가 그들이 만들어내는 유일한 세계일 것이라는 관념은 사실상 정치적 및 제도적 프로그램의 개발에 대한 정언 명령인데, 그 관념 자체는 그런 일을 행하는 방법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을지라도 말이다. 정복해야 할 세계, 또는 심지어 구해야 할 세계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고, 오히려 형성할 세계를 구상하기 시작하는, 자유롭게 그리고 항상 부분적이고 잠정적인 방식으로 형성되고 재형성될 인류가 존재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