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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비 브라이언트: 인터뷰-객체지향 철학과 온티콜로지 사이의 몇 가지 차이점

 

인터뷰: 객체지향 철학과 온티콜로지 사이의 몇 가지 차이점

Interview: Some Differences Between Object-Oriented Philosophy and onticology

 

―― 레비 브라이언트(Levi Bryant)

 

케빈 맥도넬(Kevin MacDonnell): 대학원 과정과 경력의 초기 단계에서 당신의 연구와 학문성은 주로 들뢰즈와 가타리의 저작에 집중되었습니다. 어떤 주요한 방식으로 그들의 사유가 당신의 독자적인 사유를 형성했으며 당신으로 하여금 독자적인 독특한 철학의 가닥으로 진입할 수 있게 했습니까?

 

LB: 저는 정통적인 들뢰즈주의자가 아니지만, 스피노자, 라캉, 루만 그리고 바디우 같은 소수의 다른 사상가들과 더불어 들뢰즈는 제가 생각하는 모든 것에 떠돌고 있습니다. 존재론의 층위에서 개체화, 과정으로서의 존재자 그리고 내재성에 대한 들뢰즈의 해설이 항상 배경에 잠복해 있습니다. 들뢰즈의 경우에, 개체화는 우리가 한 존재자를 다른 한 존재자와 구별짓는 방식이 아니라, 오히려 존재자를 지금의 존재자로 되게 하는 진행 중인 과정을 가리킵니다. 존재자는 항상 다른 존재자들과 맺는 관계들의 장에서 출현하며, 그런 장과의 상호작용들의 결과로서 갖추게 되는 형태와 성질들을 띠게 됩니다. 예를 들면, 포도 나무는 그것이 성장하는 토양, 그 지역의 다른 식물들, 지역적 대기, 곤충과 미생물 등의 독특한 특성들과 관련하여 그것이 발달하는 방식 때문에 지금의 성질들을 나타내게 됩니다. 포도 나무를 세계의 다른 지역으로 이식하면 그것은 상이한 특성들을 갖게 될 것입니다. 장과 존재자 사이의 형태 발생적 관계에 대한 이런 탐구가 제 작업의 중심 주제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것이 저의 잠재적 고유 존재(virtual proper being)와 국소적 표현(local manifestation) 사이의 구별짓기를 고무하는 것이며, 그리고 <<존재지도학(Onto-Cartography)>>에서 제가 탐구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의 결과는, 존재자는 무언가 다른 것이 작용을 가할 때까지 그냥 가만히 있는 고정된 사물이라기보다 과정, 진행 중인 활동으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존재자는 영구적인 "존재자화(entification)" 행위들에 관여해야 합니다. 이런 행위들은 존재자가 어떤 시기에 걸쳐 언제나 계속 존재하게 되는 조작들입니다. 엔트로피 또는 해체가 항상 위협합니다. 존재자가 계속 존재하게 되는 것은 조작 또는 활동들을 통해서입니다.

 

더 추상적인 층위에서 들뢰즈는 과학뿐 아니라 자연적 세계에 접근하는 한 가지 방식을 제시합니다. 제가 박사학위 논문을 준비하고 있었을 때 영미 대륙 철학은 네 가지 경향이 지배적이었습니다. 과학과 수학에 대한 심대한 불안, 현상학의 경우처럼 우리에게 세계가 무엇인지 또는 우리에게 세계가 어떻게 현시되는지의 견지에서 세계에 접근하는 경향, 탈근대적 사유와 탈구조주의적 사유에서 대체로 볼 수 있듯이 존재자들을 기표 또는 텍스트에 종속시키는 경향, 그리고 무엇보다도 세계와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철학적 인물과 텍스트에 대한 집중입니다. 이 마지막 경향의 경우에, 영미 대륙 철학 학과들은 철학을 철학자들에 대한 주석으로 간주하는 듯 보였습니다. 어떤 철학적 인물의 고유 명사에 결부되지 않은 채, 그리고 그것을 통해 걸러지지 않은 채 언급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물론 이것은 대단히 오이디푸스적인 철학 수행 방식입니다.

 

들뢰즈는 다양한 철학자들에 대한 깊이 있는 주해서들을 저술하였지만, 또한 그는 주석과 고유 명사에 종속되지 않는 철학 수행 방식을 보여주었습니다. 그의 작업에는 실재적인 개념적 발명이 일어났습니다. 들뢰즈는 한 사상가에 대한 충성을 유지하고 일종의 철학적 당파의 정통을 실천하는 대신에 다양한 사상가들로터 요소들을 끌어내어 그것들을 세계와 실존에 의해 제기되는 문제들에 대응하기 위한 새로운 개념들을 만들어내는 원료로 사용하였으며, 그 자신의 독창적인 개념들을 만들어냈습니다. 지금까지 저 역시 이런 식으로 철학을 수행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철학을 제대로 해석하는 방법에 관한 "철학적" 논의보다 더 지루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철학은 철학 바깥의 세계에 대응할 때에만 가치가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나머지 세 가지 경향들에 대해서 들뢰즈는 과학이라는 미명 아래 철학을 소거하지 않은 채 과학을 음미하는 한 가지 방식을 제게 가르쳐주었습니다. 들뢰즈는 베르그송을 좇아서 과학에 고유한 형이상학과 개념들을 과학에 제공하는 것을 철학이라는 기획의 일부로 간주합니다. 이런 식으로 들뢰즈는 철학 고유의 공간을 유지하면서도 과학을 진지하게 고려합니다. 이런 점에서 저는 철학은 항상 철학 바깥에서 다른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필요로 한다고 생각합니다. 철학이 하나의 분과학문으로서 고립되고자 할 때, 그것은 자체의 역사와 철학적 텍스트들에 관한 성찰에 불과한 것이 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타자들과의 만남을 통해서 철학은 개념 발명의 가능성을 획득합니다. 철학의 역사에서 매우 많은 철학자들이 주요한 탐구 분야들을 철학 바깥에서 구했다는 것은 실수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면, 데카르트는 물리학과 수학에 관여했으며, 또는 라이프니츠는 외교, 역사, 수학 그리고 공학에 관여했습니다. 철학은 개념의 발명으로 이어지는 문제들을 촉발하기 위해서 철학 이외의 다른 것을 필요로 합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매우 흔히 철학은 매체 연구, 문학 이론, 여성학, 과학기술학 등 철학 바깥의 학과들에서 주로 생성됩니다. 이런 분야들 모두에서 이론가는 개념의 발명을 필요로 하는 이론 이외의 대상이 있습니다.

 

KM: 그레이엄 하만은 그의 판본의 객체지향 존재론(OOO)과 당신의 '온티콜로지' 사이의 주요한 분열이 대리적(또는 간접적) 인과관계에 대한 당신의 부정, 실재적 객체는 성질을 지니고 있지 않다는 당신의 입장, 그리고 당신이 감각적 객체와 감각적 성질 사이의 어떤 구별짓기도 회피하는 것에 놓여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당신은 하만의 구별짓기에 동의하십니까? 그리고 하만의 OOO와 관련하여 당신의 '온티콜로지"를 어디에 위치시킵니까?

 

LB: 제게 하만은 뜻밖의 만남이었는데, 그 덕분에 저는 세계 전체, 사물들의 세계 그리고 생성되는 차이들에 주의를 기울이게 되었으며, 그리고 또한 그 만남은 다른 사상가들에 대한 끝없는 주석의 층위에 머무르기보다 독자적인 철학적 작업을 시도할 용기를 제게 주었습니다. 저는 결코 우리의 철학적 차이점들이 진정한 것인지, 또는 그것들이 상이한 언어적 표현들의 결과일 뿐인지 결정할 수 없었습니다. 어딘가에서 들뢰즈가 말하듯이, 철학자들은 항상 서로를 오해합니다.

 

하만은 실재적 객체들은 결코 접촉하지도 않고 서로 관계를 맺지도 않으며, 오히려 "진공 포장되어" 있고 영원히 방화벽 뒤에 숨어 있다고 주장합니다. 저는 이것이 제가 정말로 이해하지 못하는 테제라고 고백합니다. 그는 실재적 객체들은 결코 서로 접촉하지 않으며, 그것들의 감각적 객체들의 내부에서 서로 만날 뿐이라고 주장하는 듯 보입니다. 그렇지만 제게는 이것이 결국 실재적 객체들은 관계를 맺지 않은 채 관련된다고 말하는 것과 다름없는 듯 보이는데, 이 경우에 저는 그것들이 관계를 맺는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의 주장은 한 실재적 객체는 결코 다른 한 실재적 객체의 전체를 만나지 못한다는 주장에 의해 추동되는 듯 보입니다. 그런데 저는 왜 이것이 인과율 및 관계라는 쟁점과 관련이 있는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위의] 그림을 살펴봅시다. 삼각형 ACD와 BCE는 별개의 존재자들이지만, 그럼에도 점 C에서 연관되어 있습니다. 분명히 그것들은 모든 점에서 직접 관계를 맺고 있지는 않지만, 그래도 왜 그것들 사이에 어떤 실재적 관계도 존재하지 않거나 그것들이 서로 접촉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려야 합니까? 이것이 제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제 경우에, 객체는 자체의 잠재적 고유 존재와 자체의 국소적 표현들이 분열되어 있거나 분리되어 있는 존재자입니다. 하만이 제가 객체는 성질을 지니고 있지 않다고 주장한다―그런데 이것은 결코 제 입장에 대한 정확한 서술이 아닙니다―고 말할 때, 그는 제가 제안하는 존재론에서 잠재적 고유 존재의 차원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객체의 잠재적 고유 존재는 자체의 역능 또는 잠재력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객체는, 자체의 가장 깊숙한 핵심에 있어서, 스피노자가 "정동"이라고 부른 것, 즉 그것의 역능들로 규정된다고 저는 주장합니다. 역능은 특정한 성질이 아니라, 성질과 작용들을 만들어낼 수 있는 역량입니다. 색깔을 예로 살펴봅시다. 조명 조건이 바뀜에 따라 당신은 객체의 색조도 변한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제 개의 빨간색 공은 균일한 빨강이 아니라 모든 종류의 상이한 빨강 색조들을 나타냅니다. 그늘 속에 있을 때 그 공은 거의 벽돌 색깔에 가까운 심홍색을 나타냅니다. 양지에 놓여 있을 때 그 공은 눈부신 밝은 빨간색을 나타냅니다. 조명이 꺼졌을 때 그 공은 검정 또는 회색의 상이한 색조들을 나타냅니다. 이런 상이한 색깔들이 제가 "국소적 표현"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우리는 온도에 대한 철의 특성들과 관련하여 유사한 것을 관찰할 수 있습니다. 따뜻한 조건에서 철은 두드려 펼 수 있게 되고, 훨씬 더 가열하게 되면 철은 액체가 됩니다. 매우 차가운 조건에서 철은 매우 깨지기 쉽게 되어 걸핏하면 산산조각이 납니다. 이것들은 모두 철의 국소적 표현입니다.

 

색깔의 예로 되돌아가서 우리는 사람들이 어떤 색이 그 공의 진짜 색깔인지에 관해 주장하는 것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그들은, 어떤 의자가 닫힌 문과 커튼 뒤에 있기 때문에 아무도 그것을 볼 수 없더라도 그 의자는 여전히 방 안에 있는 것과 거의 마찬가지 방식으로, 조명이 꺼졌을 때 그 공의 색깔은 가려지거나 은폐되었다고 말할 것입니다. 제 가설은 꽤 다릅니다. 색깔은 어떤 조건에서 상이한 파장들의 빛과 상호작용하는 결과로서 어떤 객체에 일어나게 되는 사건이기 때문에 이런 색깔(성질)들 가운데 어느 것도 그 공의 진짜 색깔이 아닙니다. 이런 점에서 제 온티콜로지는 "상호작용주의(interactivism)"로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객체 속에서 성질은 두 가지 방식으로, 즉 객체와 주변 세계 사이의 상호작용을 통해서, 또는 객체에서 일어나는 내부적 활동을 통해서 산출됩니다. 색깔의 경우에는 공 표면의 특성과 여러 파장의 빛 사이의 상호작용입니다. 조명이 꺼졌을 때 그 공은 정말로 회색인데, 그것이 빨강 색조들을 만들어내는 파장들의 빛과 상호작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철의 경우에 상호작용은 온도와 이루어집니다. 이런 주장으로 인해 저는 객체의 본질은 그것의 성질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의 역능, 즉 그것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하게 됩니다. 사실상 환경에 따라 다양한 상이한 색깔을 나타낼 수 있기 때문에 공은 그것의 색깔에 의해 규정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공은 색깔을 만들어낼 수 있는 자체의 역능에 의해 규정됩니다. 역능은 항상 객체가 나타낼지도 모르는 어떤 특정한 성질들보다 훨씬 더 넓습니다. 그리고 물론 객체가 다른 존재자들과의 만남의 결과로서 역능들을 획득하고 상실할 수 있다는 것은 말힐 필요가 없습니다. 반복적으로 구부릴 때 철은 약해질 수 있는데, 철을 구성하는 결정들이 재배열되었기 때문입니다.

 

상호작용주의는 우리로 하여금 더 생태적인 감성을 품게 하는 데 기여할 것이라는 점이 제 희망입니다. 여기서 저는 생태학을 자연적 생태계들에 대한 탐구가 아니라, 오히려 존재자들 사이의 관계 및 상호작용들과 이런 상호작용들이 만들어내는 차이(국소적 표현)들에 대한 탐구로 규정합니다. 저는 존재자들이 특정한 조건에서 행하는 것에 관심이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저는 제가 제한하는 온티콜로지는 하만의 객체지향 존재론과 정반대 방향으로 움직인다고 생각합니다. 하만의 물러서 있음(withdrawal)의 존재론은 존재자들이 관계들로부터 단절되어 있는 것에 초점을 맞추는 반면에, 저는 존재자들이 서로 상호작용할 때 일어나는 일에 관심이 있습니다. 제가 끌어내고 싶은 한 가지 교훈은, 역능 또는 역량들이 특정한 성질들보다 더 넓다는 것의 결과로서 객체는 새로운 환경에서 다른 존재자들과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에 따라서 항상 놀라운 성질과 작용들을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객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결코 알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세인트 존스 유니버시티 휴머니티즈 리뷰(The St. John's University Humanities Review)>>의 이번 호에 실린 하만의 논문을 살펴보면, 우리가 제안하는 존재론들 사이의 차이점들을 요약하는 구절에서 하만은 또 하나의 비판을 제기합니다. 그는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브라이언트의 경우에, 어떤 객체가 특수한 환경에서 특정한 배치를 띠게 될 때 그것은 "국소적 표현"을 나타낸다. 그런데, 예를 들면, 무엇이 사과의 국소적 표현인가? 사과의 서쪽에서 내가 바라본 것이 동쪽에서 여러분이 바라본 것과 동일한 국소적 표현인가, 아니면 그것들은 상이한가?

 

저는 이 의문이 특이하다고 깨닫게 되는데, 제 생각에 국소적 표현은 누군가에 대한 국소적 표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국소적 표현은 객체에 대한 인상이 아니라, 오히려 객체 내부에서 일어나는 사건입니다. 예를 들면, 코끼리가 서쪽에서 사과를 만나는 방식은 사과의 국소적 표현이 아닙니다(즉, 코끼리의 경험은 환경과 상호작용하고 있는 자체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모든 종류의 신경학적 조작들의 결과입니다). 다른 한 존재자가 동, 서, 남, 북, 위 또는 아래에서 사과를 만나는 것과 무관하게 사과는 바로 그런 것입니다. 오히려 사과의 국소적 표현은 그것이 익을 때 주변 환경과 상호작용하면서 겪게 되는 생화학적 과정들의 결과로서 일어나는 정성적인 변화와 같은 것일 것입니다. 매우 잘 익은 사과의 부드러움은 어느 누군가에 대한 표현이 아닙니다. 어느 다른 존재자가 사과를 지켜보든지 그렇지 않든 간에 그것은 그럴 것입니다. 오히려 그것은 사과가 겪은 생성에서 초래되는 사과 자체의 정성적 특징입니다.

 

우리의 차이점들에도 불구하고 하만의 작업은 제 사유에 대한 엄청난 자극이었습니다. 제가 하만의 실재적 및 감각적 성질과 객체들 사이의 구별짓기도 공유하지 않고 대리적 인과관계에 관한 그의 이론도 공유하지 않는 한편으로, 그럼에도 저는 객체가 자체의 관계들로부터 단절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관계들은 객체에 내재적이지 않다는 이 테제 덕분에 저는 상호작용주의와 더불어 역설적으로 더 생태적인 사고 방식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저는 하만의 사유에 대륙 철학의 재각성에 대한 촉매로서 작용했다는 영예를 부여합니다. 오랜 시간 동안 어떤 의미에서 대륙 사상은 교착 상태에 빠져 있었고, 정체되어 있었습니다. 하만의 사유는 논쟁과 개념의 발명을 재점화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는데, 이론 분야를 끝없는 주석에서 멀어지게 함으로써 그 대신에 철학적 문제와 의문들로 복귀시켰습니다.

 

KM: 닉 스르니체크, 그레이엄 하만 그리고 당신 자신이 작성한 <<사변적 전환: 대륙 유물론과 실재론(Speculative Turn: Continental Materialism and Realism)>>의 서론에서 당신은 모든 사변적 실재론자들이 동의하는 몇 가지 입장들 가운데 하나는 모두가 "텍스트 비평에 관한 전통적인 집중을 확실히 거부했"다는 점이라고 주장합니다. 그 점을 염두에 두면, 당신은 사변적 실재론 내부에서 문학적 학문이, 도대체 있다면, 어디에 들어맞는 것으로 간주합니까? 문학적 학자들은 사변적 실재론의 틀을 통해서 텍스트들을 검토할 수 있습니까?

 

LB: 저는 이 의문과 관련하여 상당히 고민했습니다. 그것을 다루기 전에 저는 우선 제가 텍스트 비평의 중요성도 부정하지 않으며, 우리가 실재를 기호학적으로 그리고 담론적으로 구성하는 방식을 조사하는 탐구 형식들도 거부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제 자신의 작업에서 추구한 것은 현상학적 경험, 담론적 구성물 그리고 물질적 기여들을 탐구할 수 있는 종합적 접근 방식입니다. 예를 들면, 민족적 범주와 사회적 유형들(예를 들면, 비행 소년, 광인, 중산층, 정상인 등)의 기능 작용을 분석할 때 이것들은 생물학의 결과가 아니라 담론적으로 구성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기호와 기표라는 탄탄한 개념들이 없다면 우리는 돈에 관해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객체들의 민주주의(The Democracy of Objects)>> 이래로 제 작업은 기호, 체험 그리고 물질성의 영역들이 서로 얽히게 되는 방식을 탐구할 수 있는 틀을 추구했습니다. 제가 물질적인 것들을 강조했다면, 이것은 라투르와 스탕제 같은 사상가들을 제외하고 대륙 철학에서 비교적 별로 관심을 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가장 최근의 저작에서 저는 객체를 기계로 간주하기로 작정했습니다. 첫 번째 까닭은 "객체"라는 술어가 많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정지 상태를 나타내고 주체와 객체 사이의 관계에 관한 인식론적 논의를 촉발하는 듯 보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기계"라는 술어가 이런 사유 습관들을 멈추게 할 만큼 충분히 낯선 것이기를 희망합니다. 그것은 인식론의 문제들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총체적인 기계지향 인식론이 존재합니다―오히려 저는 사물들의 행위주체성에 집중하기를 원했다는 것입니다. 둘째, 저는 존재자들의 과정적, 조작적 본성에 집중하기를 원했습니다. 앞에서 논의했듯이, 저는 사물들의 활동 또는 그것들이 상호작용하는 방식에 집중하기를 바랍니다. 인간이 만들었든 그렇지 않든 간에 모든 존재자들은 기계라고 저는 주장합니다.

 

이런 정신에서 저는 온티콜로지 또는 기계지향 존재론이 문학에 접근할 수 있는 몇 가지 상이한 방식들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 소설, 시, 회화, 영화, 건축, 철학서, 논문 등이 모두 기계라는 점을 인식할 가치가 있습니다. <<천 개의 고원>>의 서두에서 들뢰즈와 가타리가 서술하듯이, 책은 매우 작은 기계입니다. 이런 틀 내에서 우리는 총체적인 문학적 기계학(literary mechanology) 개발하려고 시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기계는 흐름을 조작하여 성질, 활동 그리고 생산물의 형태로 출력을 산출하는 존재자입니다. 문학적 존재론의 가장 일반적인 층위에서 문학적 기계학은 먼저 문학적 기계이 무엇이고 그것이 다른 텍스트적 기계들(철학서, 과학 논문, 신문 등)과 어떻게 다른지 결정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문학적 기계는 어떤 식으로 조작하고 이런 조작들은 다른 텍스트적 기계들의 조작들과 어떻게 다른가? 문학적 기계가 조작하는 흐름들은 무엇인가(독자)? 문학적 기계는 흐름을 조작하면서 무엇을 산출하는가? 기계지향 문학 비평은 소설을 특정한 유형의 기계로 탐구할 수 있을 것인데, 소설이 무엇을 행하고 세계와 언어에 어떻게 작용하는지 탐구할 수 있습니다.

 

다른 한 관점에서 바라보면, 모든 문학 작품은 존재자가 무엇이고 존재자들이 서로 어떻게 관계를 맺는지에 관한 환상적 존재론 또는 이론을 제시합니다. 비평은 소설에 의해 제시되는, 나름의 내적 논리를 전개하는 기계들의 이런 체계들, 이런 존재론들을 탐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환상적 존재론들은 결국 우리 자신의 세계를 조명할 수 있을 것인데,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의 가정과 억견 형식들을 식별할 수 있게 하는 기계로 작용하고, 우리가 다른 인간과 동물들의 현상학적 세계들로 진입하는 데 도움을 주며,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살고 서로 어떤 관계를 맺을 수 있을지에 대한 전대미문의 가능성들도 제안합니다. 이것들 가운데 마지막의 경우에, 우리는 허구와 실재의 흥미로운 반전을 얻게 되는데, 과학소설이 과학자들로 하여금 전대미문의 기술들을 만들어내도록 고무하는 그런 경우들과 마찬가지로 허구는 새로운 실재들을 낳을 수 있는 역능 또는 역량을 띠게 되거나, 또는 소설 덕분에 사람들은 발제하려고 노력할 새로운 사회적 형식들을 상상할 수 있게 됩니다.

 

KM: 담론적 실천이 인간 경험에 미치는 효과를 포착할 수 없는 자체의 무능력 때문에 평탄한 존재론은 페미니즘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습니다. 이런 담론적 실천들이 거의 배타적으로 담론에 집중될 때 평탄한 존재론 내에서 인간 정치 또는 정체성 정치는 어떻게 작동합니까?

 

LB: 이것은 제가 공유하는 견해가 아닙니다. 제가 이해하고 있고 표명한 대로의 평탄한 존재론은 우선 초월성, 즉 자연의 외부에 무언가(신, 플라톤적 형상, 주체 등)가 존재한다는 테제에 대한 부정입니다. 그런 것으로서 평탄한 존재론은, 그 술어로 우리가 의미하는 바에 의존하지만, 자연주의입니다. 매우 흥미로운 종류의 것일지라도 말입니다. 평탄한 존재론 내에는 어떤 마법 또는 원격 작용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둘째, 제가 제안한 평탄한 존재론은 어떤 존재자도 다른 어떤 존재자보다 넘치는 존재자도 아니고 모자라는 존재자도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하만은 평탄한 존재론을 승인하지 않지만, 이런 제안과 관련하여 위로 환원하기와 아래로 환원하기에 대한 그의 비판에 가까운 것이 존재합니다. 누군가가 존재자를 어떤 더 근본적인 존재자의 비실재적 효과로 간주할 때 그는 존재자를 아래로 환원합니다. 예를 들면, 이것은 원자론의 몇몇 변양태들에서 일어납니다. 이런 형태들의 원자론에서 집합체 존재자는 독자적인 실재를 전혀 갖지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마거릿 대처가 "사회는 존재하지 않는다. 개인과 가족들이 존재할 뿐이다."라고 말할 때 대처는 사회적 체계들의 본질을 아래로 환원합니다. 여기서 제도와 사회적 체계들의 실재성과 본질은 소거됩니다. 그러므로 아래로 환원하기는 부분들을 위해 창발적 전체를 소거하는 것에 있습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어떤 존재자의 부분들이 어떤 실재성도 갖지 않는 대신에 전체에 철저히 종속되는 것으로 간주될 때 그 존재자는 위로 환원됩니다. 여기서 알튀세르가 주체를 사회적 구조의 환영으로 간주하고 그것에 어떤 독자적인 행위주체성도 부여하지 않을 때 그는 위로 환원하기의 조작에 빠진 듯 보입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평탄한 존재론은 전체와 부분들 모두의 실재성을 존중하고 각자의 행위주체성을 인정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습니다.

 

흔히 평탄한 존재론은 모든 존재자들이 평등하다는 테제로 여겨집니다. 이것은 존재론적 테제를 규범적 및 정치적 테제와 혼동하는 것입니다. 명백히 세계 내에서는 모든 종류의 불평등과 상이한 정도의 권력이 존재합니다. 자동차 회사의 변덕이 사람들을 지배한 미시건 주 플린트의 경우에서처럼 기업은 수천 명의 마을 사람들의 삶을 위로 환원시킬 수 있습니다. 기업과 개인 시민들은 모두 존재자이지만, 여기서 권력의 엄청난 불평등이 존재합니다.

 

평탄한 존재론을 받아들이면, 기호과 기표들이 도로, 행성, 인민, 원자, 공장 그리고 항성에 못지 않는 실재적 존재자들라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모든 존재자들과 마찬가지로 기호와 기표들도 세계 내에서 권력을 행사하는 기계들일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페미니즘, 퀴어 이론, 신체 장애 이론, 인종 이론, 탈식민지 이론 등의 탈구조주의적 변양태들이 사회적 관계와 정체성들이 담론적으로 구성되는 다양한 방식들을 탐구하고 비판하는 것은 옳습니다. 이런 비판 양식들을 통해서 우리는 다양한 정체성들에 귀속되는 특성들이 어떻게 생물학적 특성들이 아니라, 다양한 기법들을 통해서 인민과 사회적 관계들을 형성하는 주체화 실천들의 결과인지 식별할 수 있습니다. 푸코와 라투르의 정신으로, 기계지향 존재론 또는 온티콜로지는 담론적 권력이 권력이 취하는 유일한 형식이 아니라, 도로, 건축, 지리 등에서 발견되는 것들과 같은 기계들의 물질적 특징들도 권력을 행사한다는 점을 덧붙일 뿐입니다. 비판적 기법들을 한정하기는 커녕, 온티콜로지는 새로운, 더 공평한, 더 지속 가능한 그리고 더 만족스러운 삶의 형식들을 구성하기 위해 개입 전략들을 증식시키려고 노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