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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니얼 핼버슨: 과학, 기술 그리고 사회-비엔나 학파

 

과학, 기술 그리고 사회 III: 비엔나 학파

Science, Technology and Society III: The Vienna Circle

 

―― 대니얼 핼버슨(Daniel Halverson)

 

"어떤 방법의 의미는 그것의 검증 방법이다."  ―― 모리츠 슐릭(Moritz Schlick)

 

"예측할 수 없다면 설명하지 못한 것이다." ―― 칼 헴펠(Carl Hempel)

 

비엔나 학파(c. 1920-1935)는 철학의 영역을 본원적으로 재정의함으로써 철학과 과학을 화해시키려고 시도했던 수학자, 철학자 그리고 과학자들의 집단이었다. 이 집단(구성원들 가운데 일부만 비엔나에서 실제로 만났다)에는 모리츠 슐릭, 한스 한(Hans Hahn)과 올가 한(Olga Hahn), 오토 노이라트(Otto Neurath), 루돌프 카르납(Rudolf Carnap), 쿠르트 괴델(Kurt Goedel), 칼 헴펠, 프리드리히 하이에크(Friedrich Hayek), A.J. 에이어(Ayer), W.V.O. 콰인(Quine) 그리고 로베르트 노이만(Robert Neumann)이 포함되었다. 비엔나 학파는 대체로 중력에 대한 아인슈타인의 설명에 대응하여 출현하는데, 그 설명은 불변의 보편적 진리의 지위를 오랫동안 유지한 관념들, 즉 중력에 대한 뉴턴의 설명 및 유클리드 기하학과 정면으로 충돌하기 때문에 철학적으로 문제적인 것이었다. 첫 번째 것에 대해서, 아인슈타인의 설명은 중력이 질량이 없는 객체(즉, 광선)에 영향을 미칠 수 있고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증명했다. 두 번째 것에 대해서, 그것은 기하학에 대한 리만의 설명(자명하게 부조리한 것으로 오랫동안 추정되었다)이 유클리드의 설명보다 더 서술적이라는 점을 증명했다. 다시 말해서, 과학의 진리 사이의 관계가 계몽주의 이래 최초로 문제적인 것이 되었다.

 

대중의 믿음(그때와 지금 둘 다)과 상반되게도, 아인슈타인은 뉴턴이나 유클리드의 결과를 결코 확장하지 않았는데, 그는 그것들을 뒤집고 반박했다. 뉴턴 중력과 유클리드 기하학이 더 이상 확실하지 않다면, 당연히 교양 있는 사람들은 도대체 정초할 철학적으로 확고한 어떤 기반이 존재하는지 의문을 품었을 것이다(의문을 품었으며, 그리고 계속해서 의문을 품어왔다).

 

논리실증주의자들―비엔나 학파와 그 계승자들이 이렇게 알려지게 된다―에 따르면, 철학의 본령은 관측과 과학적 이론에 적용되는 대로의 논리와 언어이다. 여전히 적실성을 갖추기 위해 철학은 미학, 윤리학 그리고 정치학에서 벌어지는 논쟁들을 해결한다는 위선을 포기해야 한다. 이것들은 억견일 뿐이었고, 형이상학과 존재론은 넌센스일 뿐이었다. 합리주의자, 관념론자 또는 다른 종류들의 인식론에 대한 경험주의자의 우수성은 경험주의적 과학의 설명적 성공에 의해 충분히 입증되었다. 체계 건설자들의 시대는 끝났는데, 철학자들은 과학의 보조적인 분과학문으로서의 철학의 축소를 수용해야 한다. 철학자들이 그렇게 한다면, 그들은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지성적 모험, 즉 과학의 조력자로서 갱신된 적실성에 의해 엄청나게 보상받을 것이다. 과학적으로 시험 가능한 명제만이 진리 또는 허위로서의 지위를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다른 명제들은 인지적으로 무의미할 뿐이었다.

 

그러므로 철학의 문제는 언어의 문제로 재개념화되어야 한다. 과학적 이론들은 흔히 철학적으로 혼란스럽거나 부정확한 언어로 표현되는데, 이 철학자들은 그것을 명료하게 해야 할 자신들의 목적으로 간주했다. 어떤 진술이 철학적으로 유의미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최소한 원칙적으로 검증 가능한 것이어야 한다고 그들은 주장했다. "돌고래는 권리가 있는가?" 또는 "석양은 아름다운가?" 같은 진술들은 이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고, 그래서 철학의 일부가 아니다. 다른 한편으로, "빛은 중력장의 존재에 대응하여 휘는가?" 같은 진술은 철학의 일부이다. 아인슈타인이 상대성 이론을 형식화하기 위해 수학자와 다른 물리학자들의 도움을 필요로 한 것과 꼭 마찬가지로, 또한 그는 의미를 명료하게 하기 위해 철학자들의 도움으로부터 이득을 볼 수 있었다. 그러므로 그의 진술들은 관측들의 몇몇 집합으로부터 도출되는 논리적으로 필연적인 연역들로 재구성될 수 있을 것이다. 관측과 수학 둘 다 공리적으로 참인 것으로 수용되었기 때문에 철학과 과학 사이에 갈등이 일어날 가능성은 전혀 없었는데, 과학자들로 하여금 자신의 작업을 수행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 그들에게 다시 넘겨줄 수 있는, 이론에 대한 상이한 해석들 사이에 갈등이 존재할 뿐이었다.

 

자연학으로부터 형이상학을 제거할 정확한 방법은 여전히 또 하나의 난제였다. 데이비드 흄(David Hume)이 지적했듯이, 우리는 우주가 규칙적인 형식으로 거동하는지 알 수 없는데, 그렇다고 가정하는 것이 유용할 뿐이다. 예를 들면, 평생의 경험으로부터 농부가 항상 먹이를 가져다준다는 점을 알게된 닭을 생각하자. 그 닭은 농부가 먹이를 가져다준다는 것은 우주의 자명한 진리라고 간주할 것이고, 달리 가정할 이유가 전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농부가 도끼를 들고 온다. 이제, 우리가 "구리는 전기가 통한다"는 명제를 우주의 한 가지 특성으로 간주하면, 닭과 농부 사이의 관계와 마찬가지로 구리에 대해서도 동일한 관계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을 어떻게 알겠는가? 내일 구리는 전기가 통하지 않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구리는 전기가 통한다"는 진술에서 우리가 갖고 있는 것은 한 가지 형이상학적 명제―원칙적으로 시험 불가능한 실재의 궁극적인 본성에 관한 가정―로 간주될 수 있을 것이다. 형이상학의 공공연한 적인 논리실증주의자는 이것과 무슨 관련이 있는가? 그는 구리는 전기가 통해야 한다는 것을 논리적으로 증명할 수 없지만, 그가 전도성에 관한 이론을 필연적인 논리적 진리로 가정할 것이라면, 그는 어떤 정당화를 제시해야 할 것이다. 원칙적으로 이런 유형의 정당화는 관측으로부터 도출할 수 없으며, 그리고 합리주의에 대한 호소는 선험적인 종합적 진리의 인지적 공허함에 대한 실증주의자들의 단언에 의해 금지되었기 때문에, 어떤 다른 근거를 찾아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형이상학은 여전히 배경에 흐릿하게 나타나는 듯 보인다.

 

히틀러 체제가 점점 더 공격적으로 되어감에 따라 비엔나 학파 철학자들의 대부분은 비엔나를 떠났다. 그 학파의 창립자인 모리츠 슐츠는 떠나기를 거부했다. 1936년에 그는 나치당에 가입했었던 전 학생에 의해 암살당했다.

 

논리실증주의의 유산은 복잡하고 결실이 많았다. 한편으로, 비엔나 학파의 가장 강한 주장들은 1960년대에 그저 너무 야심만만한 것으로 간주되어 대체로 폐기되었다. 알게 되듯이, 포퍼, 콰인 그리고 쿤은 이것과 관련하여 할 말이 많이 있을 것이다. 언어, 논리 그리고 그것들이 과학적 이론과 맺는 관계에 관한 문제는 부단한 분석에 저항력이 있는 것으로 판명되었지만, 논리실증주의자들은 올바른 의문들을 제기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들의 원래 탐구 노선들의 지속 또는 그것들에 대한 대응이 오늘날 과학기술사회학 내부에서 벌어지는 대부분의 논의를 특징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