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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마이클 그리어: 오늘의 에세이-오버슈트

 

오버슈트

As Night Closes in

 

―― 존 마이클 그리어(John Michael Greer)

 

나는 며칠 전에 동료 작가로부터 전화를 통해 지난 달 초에 윌리엄 R. 캐턴(William R. Catton)이 자신의 89세 생일을 맞기 직전에 사망했다는 것을 알게 되어 슬펐다. 내 독자들 가운데 일부는 그가 누구인지 전혀 모를 것이고, 다른 사람들은 내가 이 에세이들에서 반복해서 그와 그의 가장 중요한 책 <<오버슈트(Overshoot)>>을 언급했던 것을 희미하게 떠올릴 것이다. 방금 언급한 책을 읽을 시간이 있었던 사람들은 피크 오일 블로고스피어(blogosphere)의 사이트들 가운데 어디에서도 왜 부고를 발표하지 않았는지, 또는 그 사람의 죽음을 언급조차 하지 않았는지 궁금히 여길 것이다. 나는 나름대로 추측하지만, 마지막 의문에 대한 대답을 공교롭게도 알지 못한다.

 

1983년에 워싱턴 주 벨링햄(Bellingham)의 한 대학 서점에서 나는 <<오버슈트>>를 처음 만났다. 극명한 노란색 등 위에 빨간색 글자로 제목이 새겨져 있었는데, 그 제목은 생태학 및 체계 이론의 수업들에서 내가 이미 알고 있던 낱말이었다. 나는 그 책을 서가에서 끄집어내었고, 미래가 나를 정면으로 응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책 표지의 제목 아래 새겨진 것은 다음과 같다.

 

수용 능력(carrying capacity): 영구적으로 지원할 수 있는 최대 하중.

 

풍요 신화(cornucopian myth): 무한한 자원에 존재에 대한 다행증적 믿음.

 

드로다운(drawdown): 미래로부터 자원을 훔치는 것.

 

카고이즘(cargoism): 언제나 기술이 우리를 구할 것이라는 망상.

 

오버슈트(overshoot): 어떤 지역의 수용 능력을 넘어서는 성장인데, 다음의 것을 초래한다.

 

붕괴(crash): 사라짐.

 

다시 말해서, 지난 팔구 년 동안 이 에세이들에서 내가 추구해온 핵심 관념들을 어디에서 얻게 되었는지 알고 싶다면, 이제 알게 된다. 여전히 나는 그 책을 갖고 있다. 지금 그것은 내 앞 책상 위에 놓여 있는데, 긴 하루가 끝나가는 밤처럼 이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는 황량한 미래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기회가 얼마나 많았었는지 또 다시 상기시킨다.

 

1970년대와 1980년대 초에 많은 책들이 생태학의 교훈들을 산업 문명의 미래에 적용했고, 적어도 귀착되는 나쁜 소식들 가운데 일부를 포착했다. 거의 틀림없이 <<오버슈트>>는 그것들 가운테 최고의 책이었지만, 나머지 다른 책들보다 기억 구멍 속에 훨씬 더 깊이 자리잡도록 거의 확실하게 보증되었다. 난점은 캐턴의 책이 우리가 스스로 초래한 곤경을 이해하고자 하는 어떤 시도도 여전히 막는 표준적인 신화들에 영합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그 책은 그가 카고이즘이라고 부른 것, 즉 기술적 진보 덕분에 반드시 우리는, 저울의 반대쪽을 헐리우드가 나쁜 영화로 만들기를 좋아하는 그런 묵시록적 백일몽으로 떨어뜨리지 않은 채, 우리 행성을 가지고 그것을 먹어치울 수 있게 될 것이라는 주장을 전혀 고무하지 않았다. 그 대신에, 조용하고 명쾌하며 사려 깊은 산문으로, 그는 산업 문명이 어떻게 자신의 목을 자르고 있는지, 우리가 이미 돌아가지 못할 지점을 얼마나 많이 지나와 버렸는지, 그리고 다가오는 난파로부터 무언가를 구조하기 위해 무엇을 행해야 하는지를 설명했다.

 

2011년에 여기에 올린 한 블로그 글에서 지적했듯이, 나는 ASPO 학술회의에서 캐턴을 만날 기회를 가졌었고, 그의 책이 내게 얼마나 큰 의미가 있었는지에 대한 생각을 그에게 전달하려고 노력했다. 나는 록 스타를 만나는 14세 팬처럼 행동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내가 성공했는지는 결코 확신하지 못한다. 만찬 시간에 15분 동안 우리는 대화를 나누었는데, 그는 매우 점잖았다. 그 다음에 상황은 변했고, 우리 각자는 자신의 삶을 영위하기 위해 학술회장을 떠났으며, 이제 그는 세상을 떠나버렸다. 오래된 노래가 말하듯이, 그것이 세상이 돌아가는 방식이다.

 

윌리엄 캐턴에 관하여 말할 수 있는 것이 훨씬 더 많지만, 그 과업은 선생, 학자 그리고 한 인간으로서의 그 남자를 알았던 누군가에게 맡겨야 할 것이다. 나는 그를 알지 못했다. 15분 동안 나눈 대화를 제외하면 나는, 내가 세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었으며, 이전 10년 동안 환경주의자라고 자칭한 사람들 가운데 대부분이 자신의 이상을 현금으로 바꾸고 그런 행위에 대한 변명으로서 풍요 신화를 휘둘렀던 레이건 시대를 통과하는 긴 사막 여행을 계속할 수 있게 한 책들 가운데 하나의 배후에 있는 정신으로만 그를 알았었다. 그러므로 나는 <<오버슈트>>를 아직 읽어본 적이 없는 내 모든 독자들에게, 책 한 권을 얻기 위해서 버려진 프래킹 장비 위를 네 발로 기어야 할지라도, 가능한 한 빨리 읽어볼 것을 촉구할 뿐이다. 그건 그렇다치고, 나는 그가 가장 높이 평가했었을 것이라고 여겨지는 그런 종류의 조사―그의 관념들 가운데 몇 가지를 그보다 약간 더 진전시키고자 하는 시도―를 바치고 싶다.

 

레이건 시대에 머리에 관통상을 입고 묘비가 없는 묘에 묻혀버린 기술과 녹색 대안들의 세계 전체의 핵심이기도 하는 <<오버슈트>>의 핵심은 생태학의 원리들이 여타 생명체들의 공동체들에 적용되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산업 사회에도 적용될 수 있다는 인식이다. 모든 것을 고려해 보건대, 이것이 대단히 논란을 일으키는 제안이라는 점은 기묘하다. 대부분의 인간들은 중력의 법칙이 바위에 영향을 미치는 방식과 동일한 방식으로 인간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파악하는 데 아무 곤란도 겪지 않는다. 대부분의 인간들은 자연의 다른 자연 법칙들도 우리에게 정말로 적용된다는 것을 이해한다. 그런데 상당수의 인간들이 그런 동일한 합당한 추리를 한 특수한 법칙들―생명체들의 공동체들이 자체의 환경과 어떻게 관계를 맺는지 관장하는 법칙들―의 집합에 확장하지 못하는 듯 보인다.

 

사람들이 생태를 취급하는 방식으로 중력을 취급한다면, 여러분은 어느 날에도 뉴스 웹사이트에 방문하여 누군가가 시치미를 떼고, 바위는 떨어뜨리면 낙하하는 것이 참이지만, 인간들은 그렇지 않은데, 그들은 하늘 위로 곧장 솟구치고,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누구나 매우 명백히 틀려서 그 문제는 논의할 필요조차 없다고 역설하는 글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생태적 쟁점들이 제기될 때마다, 미합중국에서는 일상 대화뿐 아니라 매체에서도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매일 그 정도로 터무니없는 일이 벌어진다. 유한한 행성은 당연히 유한한 양의 화석 연료를 함유하고 있어야 한다는 점, 수 세기 동안 매해마다 공기 중에 버려지는 수십 억 톤의 가스 쓰레기는 대기가 열을 보유하는 방식을 변화시킬 것이라는 점, 수확 체감의 법칙이 여타의 것들에 적용되는 방식대로 기술에도 적용될 것이라는 점, 그리고 여러분은 모든 실제적 목적을 위해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는 것이 더 좋은 사람들에 의해 침묵당할 것이라고 상당히 기대할 수 있다는 점을 나는 제시한다.

 

그런데, 이 블로그가 현재 관여하고 있는 말할 수 없는 것들로 나아가고 있는 항해의 일부로서 나는, 사실상 인간 사회들은 다른 모든 차원의 자연 법칙의 지배를 받는 것과 마찬가지로 생태 법칙들의 지배도 받는다고 제안하고 싶다. 그런 지적인 이단 행위는 지금 당장 대부분의 집단에서 격심하게 환영 받지 못하는 어떤 결론들을 함축한다.

 

기초적인 것들에서 시작하자. 열역학적 견지에서 바라보면, 모든 생태계는 비교적 집중된 에너지가 확산된 배경 열로 흩어지는 과정이다. 여기 지구 위에서는 최소한, 농축된 에너지는 대체로 태양 복사의 형태로 태양에서 비롯되는데, 심해와 지하에서는 그 대신에 지구 내부의 열에 의해 추동되는 화학 반응들로부터 자체 에너지를 획득하는 몇 가지 생태계들이 존재한다. 몇 십 년 전에 일리야 프리고진(Ilya Prigogine)은 이런 종류의 체계들을 통과하는 에너지의 흐름은 체계의 복잡성을 증가시키는 경향이 있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최근에 MIT 물리학자인 제레미 잉글랜드(Jeremy England)는 동일한 과정이 생명 자체의 기원을 매끈하게 설명한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소스에서 싱크로 흐르는 에너지의 일정한 흐름이 다른 모든 것이 의존하는 토대이다.

 

결국 체계의 복잡성은 체계를 통과하는 에너지 흐름의 속도에 의해 한정되며, 그리고 이 속도는 한편으로 체계에 들어오는 에너지와 다른 한편으로 에너지가 체계를 벗어날 때 폐열이 확산해 가는 배경 사이의 밀도 차이에 의존한다. 그것은 파악하기 어려운 개념이 틀림없이 아닐 것이다. 그것은 기초  열역학일 뿐 아니라 기초 물리학이기도 한데, 그것은 물 흐름이 개울의 어느 부분을 통과하는 속도는 물이 그 부분으로 흘러 들어가는 지점과 그것이 흘러 나오는 지점 사이의 고도 차이에 의존한다고 지적하는 것과 정확히 동등하다.

 

그것이 아무리 단순하더라도,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과학적 교양을 갖추고 있는 일부 사람들을 포함하여―이 일상적으로 놓치는 점이다. 예를 들면, 이 블로그에서 얼마 전에 나는, 태양 에너지로 현대 산업 문명에 동력을 제공할 수 없는 핵심적인 이유들 가운데 하나는 화석 연료로부터 얻게 되는 대단히 농축된 에너지에 비해서 햇빛이 에너지원으로서 비교적 농축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라고 강조했다. 여전히 나는 이것은 전적으로 어리석은 이야기라고 역설하는 사람들의 폭언을 잘 받아넘기는데, 광자는 그것이 태양에서 방출될 때 갖고 있던 에너지와 정확히 동일한 양의 에너지를 갖고 있기 때문에, 광자가 운반하는 에너지는 그것이 태양에서 방출될 때와 꼭 마찬가지로 농축되어 있다. 그런데, 이것이 중요한 유일한 변수라면, 해왕성에 부딪치는 각 광자가 수성에 부딪치는 각 광자와 평균적으로  동일한 에너지 효력을 품고 있기 때문에 해왕성이 수성과 꼭 마찬가지로 뜨거울 것이라는 점을 인식하게 될 것이다.

 

오늘날의 기크(geek) 문화에 널리 퍼져 있는 체계 전체에 대한 맹목성에 대한 더 좋은 사례를 생각하기는 어렵다. 명백히, 해왕성과 수성의 온도 차이는 두 세계에 부딪치는 개별 광자들의 에너지의 함수가 아니다. 그것은 상이한 광자 밀도, 즉 각 행성 표면의 일 평방미터에 부딪치는 광자들의 수의 함수이다. 또한 이것은, 우리가 여기 지구상의 태양 에너지에 관해 이야기할 때 중요한 두 가지 숫자 가운데 하나이다. 나머지 다른 한 숫자는 무엇인가? 그것은, 태양계든 생태계든 간에, 체계가 과정을 마칠 때 폐열이 산란되는 배경 열이다. 가장 넓은 척도에서 그것은 심원한 우주이지만, 알다시피, 생태계들은 자체 폐열을 직접 궤도로 내보내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들이 우연히 해수면 위 어떤 높이에 있든 해수면 아래 어떤 깊이에 있든, 그리고 적도에서 얼마나 가까이 있는 얼마나 멀리 있든 간에, 생태계들은 폐열을 주변 온도 속으로 확산시킨다. 그리고 그것 역시 태양에 의해 가열되기 때문에 입력 밀도와 출력 밀도 사이의 차이는 매우 현저하지 않다.

 

자연은 매우 작은 밀도 차이로 놀라운 일을 해내었다. 광합성은 몹시 비효율적이며, 물론 그것의 효율은 향상될 수 있다고 역설하는 사람들은 중요한 점을 놓치고 있다. 태양에서 녹색 식물의 잎에 도달하는 에너지의 거의 절반에 해당하는 것은 독창적인 형태의 증발식 펌프 작용으로 뿌리에서 물을 끌어올리는 작업에 사용되는데, 여기서 잎 기공을 통해 증기로 흡수되는 물은 식물 줄기의 매우 작은 관들의 연결망을 통해 더 많은 물을 끌어올린다. 다른 몇 퍼센트의 에너지는 광합성에 의한 당 제조에 투입되며, 열매를 익게 하는 화학 작용들 같은 다양한 작은 과정들도 얼마간 태양광 또는 태양열에 의존한다. 전체적으로 보면, 태양 에너지의 총체적 사용에 있어서 녹색 식물은 열역학 법칙들이 허용할 만큼 효율적일 것이다.

 

게다가, 지구의 생태계들은 식물 생명의 녹색 엔진들을 통과하여 흐르는 에너지를 취해서 대단히 다양한 방식으로 그것을 활용한다. 식물학자들이 증발 증산 작용(evapotranspiration)이라고 부르는 것―조금 전에 언급된 증발식 펌프 작용―으로 하늘 높이 끌어올려진 물은 국소적인, 지역적인 그리고 전지구적인 물 순환들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화학적 형태로 태양 에너지를 저장하기 위한 당의 생산은 훨씬 더 정교한 일단의 변화들을 촉발하는데, 식물 세포들은 무언가에 의해 먹히고, 이어서 그것은 다른 무언가에 의해 먹히며, 그런 과정은 먹이 그물의 활발하지만 정확한 춤을 통해 계속 이어진다. 결국 최초의 식물이 태양에서 퍼낸 모든 에너지는 흩어지는 폐열로 변환되어 대기 속으로 천천히 스며드는데, 그것의 궁극적 운명은 절대 온도 영도보다 조금 높은 심원한 공간의 어떤 구석을 데우지만, 그곳에 도달할 때까지 그것은 대개 꽤 나아간다.

 

그건 그렇다치고, 이런 정교한 과정들이 지지할 수 있는 생태의 복잡성에 대한 견고한 상한선이 존재한다. 열대 우림과 극지 툰드라를 비교함으로써 그것을 충분히 명료하게 알 수 있다. 그 두 환경은 일 년의 과정 동안 거의 같은 강우량을 가질 수 있고, 토양 속의 영양소들도 동일하게 풍부하거나 빈약하게 공급받을 수 있지만, 그럼에도 열대 우림은 만 오천 내지 이만 종의 식물과 동물을 쉽게 부양할 수 있고, 툰드라는 운이 좋아도 수천 종을 부양할 것이다. 왜? 수성이 해왕성보다 더 뜨거운 것과 같은 이유에서 그렇다. 태양에서 방출된 광자들이 각 장소의 단위 평방 미터당 표면에 도달하는 속도 때문이다.

 

적도 근처에서는 태양의 빛살이 거의 수직으로 쏟아진다. 지구가 둥글기 때문에, 극지 근처에서는 태양의 빛살은 예각으로 진입하고, 그래서 더 넓은 표면적 위에 흩어지게 된다. 주위 온도가 툰드라 지역보다 열대 우림 지역에서 상당히 더 높지만, 대기라고 불리는 방대한 열기관이 열을 적도에서 극지로 밀어내기 때문에 주위 온도의 차이는 입방 미터당 태양 에너지 입력의 차이보다 크지 않다. 그러므로 적도 근처의 생태계들은 극지 근처의 생태계들보다 입력과 출력 사이의 에너지 밀도에서 더 큰 차이를 나타내고, 그래서 그 두 지역 생태계들의 복잡성은 달라지게 된다.

 

이 모든 것은 상식이 되어야 한다. 물론 그렇지 않은데, 교육에 관한 산업 세계의 관념들이 윌리엄 캐턴이 "중요한 것은 과정들이다"라고 불렀던 것―즉, 지구에서의 우리 현존을 나타내는 근본적인 생태 법칙들―을 무시하고, 우리 모두를 계속 생존하게 하는 자연적 과정들에 대한 가장 당혹스런 종류의 무지를 조장하는 방식들로, 교과 과정에 편입되는 수많은 과목들에 접근하기 때문이다. 조금 나중에 우리는 그것을 훨씬 더 상세히 논의할 것이다. 그런데 당분간 나는 방금 제시된 주장들을 취하여, 대체로 캐턴이 수행했던 방식으로, 산업 문명의 난국에 체계적으로 적용하고 싶다.

 

인간 사회는 하나의 생태계이다. 여느 생태계와 마찬가지로 그것은 자체의 생존을 위해 에너지의 흐름들에 의존하고, 여느 생태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것의 복잡성에 대한 상한선은 궁극적으로 그것에 들어오는 에너지와 그것의 폐열이 흩어지는 배경 사이의 밀도 차이에 의존한다. [이 마지막 주장은 인간 생태학의 근본적인 원리들 가운데 하나인 화이트의 법칙(White's Law)의 따름정리인데, 화이트의 법칙은 한 사회의 경제적 발전은 그것의 인구당 에너지 소비에 정비례한다고 주장한다.] 산업 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그 상한선은 다른 생태계들의 복잡성의 상한선보다 그다지 더 높지 않았는데, 인간 생태계들이 자체 에너지의 대부분을 비인간 생태계들과 동일한 원천―녹색 식물들에 쏟아진 태양광―에서 끌어내었기 때문이다. 인간 사회들이 태양 에너지의 다른 흐름들―풍차를 돌리고 대양을 가로지르는 배를 운행하는 풍력, 제분기를 돌리는 수력 등―을 활용하는 방법을 파악함에 따라 그 상한선은 조금씩 더 상승하였지만, 급격히 상승하지는 않았다.

 

화석 연료를 기계적 에너지로 변환시킬 수 있게 만든 발견들 덕분에 그 방정식은 완전히 바뀌어버렸다. 오억 년 동안의 태양광을 석탄, 석유 그리고 천연가스로 비축한 지질학적 과정들은, 지구의 주위 온도를 몇 도 이상 상승시키지 않은 채, 산업 사회들이 이용할 수 있는 에너지 입력의 밀도를 거의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증가시켰으며, 그리고 마찬가지로 상상할 수 없는 복잡성의 증가를 추동한 에너지 밀도의 거대한 차이를 낳았다. 복잡성에 대한 어떤 척도―이산적인 직업 범주들의 수든 어느 주어진 재화나 용역의 생산, 분배 그리고 소비에 관여하는 평균 인구 수든 무엇이든 간에―를 선택하든지 간에, 산업 혁명의 여파로 그것은 즉각적으로 치솟았다. 그것은 열역학적으로 바로 예상되는 것이다.

 

입력과 출력 사이 에너지 밀도의 차이가 복잡성의 상한선을 규정한다는 점은 반복해서 말할 가치가 있다. 다른 변수들은 문제의 체계가 그 상한선에 도달할 것인지 여부를 결정한다. 인간 사회로 불리는 생태계들에서 지식은 그런 다른 변수들 가운데 하나이다. 고도로 농축된 에너지원이 있고 그것을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을 아직 알지 못한다면, 그 사회는 가능한 만큼 복잡하게 되지 않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산업화가 진행된 삼 세기 동안, 유용한 지식의 생산이 승리 전략이었는데, 그것 덕분에 산업 사회들은 밀도 차이에 의해 규정된 복잡성의 상한성을 향해 꾸준히 상승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상한선에는 결코 도달하지 않았고―수확 체감의 법칙을 만나게 된다―그래서 불가피하게도 산업 사회들은 결국 지식만으로 인간 생태계의 복잡성을 증가시킬 수 있다고 믿게 되었다. 결국 지식에는 상한선이 없기 때문에 그런 믿음 체계는 캐턴이 풍요 신화라고 불렀던 것, 즉 지식의 축적량이 충분히 빨리 증가하기만 한다면 자원은 항상 충분히 존재할 것이라는 망상을 추동한다.

 

그런데 에너지 입력과 배경 사이의 밀도 차이가 매우 높게 유지되는 한, 그런 믿음은 작동하는 듯 보였다. 쉽게 입수할 수 있는 화석 연료가 부족해지고, 그래서 남아 있던 것을 채굴하는 데 있어서 더욱 더 많은 에너지와 다른 원천들을 투입해야 했을 때, 문제들이 돌출하기 시작했다. 자연적 형태의 타르 샌드(tar sands)와 셰일 오일(oil shales)은 유황분이 적은 경질 원유만큼 농축된 에너지원이 아니다. 그것들이 일단 정제되면, 그 차이는 최소화되지만, 각 에너지원이 체계에 진입하는 순간에 에너지 밀도에 대한 전체적 체계 분석이 개시되어야 한다. 여전히 모래를 함유하고 있는 미가공된 타르 샌드 일 입방미터 또는 여전히 암석에 갖혀 있는 셰일 오일 일 입방미터를 고려하면, 유정에서 갓 채굴된 유황분이 적은 경질 원유 일 입방미터에서 얻을 수 있는 에너지보다 더 적은 에너지를 얻게 될 뿐이다.

 

그런 차이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현대 문화의 신조이지만, 그것은 풍요 신화의 다른 한 측면일 뿐이다. 타르 샌드나 셰일 오일에서 석유를 얻는 데 필요한 에너지는 어딘가에서 와야 하고, 그리고 결국 그런 에너지는 다른 용도에 활용될 수 없다. 아무리 개념적으로 속이더라도, 그 결과는 복잡성의 상한선이 하강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추상적인 듯 들리지만, 수많은 대단히 구체적인 비참한 것을 의미하는데, 이미 인식했듯이, 한 사회의 복잡성이 그 사회가 지지할 수 있는 상이한 전문직들의 수, 주어진 재화 또는 용역의 생산과 분배에 관여하는 고용인들의 수 등과 같은 것들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인간 생태계의 복잡성에 대한 일상적인 척도들의 지속적인 수축을 가리키는 유용한 술어가 존재하는데, 그것은 "경제적 불황"이다.

 

다시 말해서, 오늘날 산업 세계를 더욱 더 자주 흔들고 있는 경제적 곤경은 우리의 남아 있는 밀도 차이가 지지할 수 있는 복잡성의 수준과 우리가 선호하는 이데올로기들이 우리가 가져야 한다고 고집하는 복잡성의 수준 사이의 파멸적인 불일치의 증상이다. 그런 두 가지 수준이 충돌할 때, 그것들 가운데 어느 쪽이 승리할 것인지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우리의 전체 지식 저장량을 늘리는 것은 결과를 바꾸지 못할 것인데, 지식은 경제적 팽창을 위한 필요 조건이지만 충분 조건은 아니기 떄문이다. 열역학 법칙들에 의해 설정된 복잡성의 상한선이 지식 기반이 지탱할 수준 아래로 떨어지면, 후속적인 지식 기반의 확대는 사람들이 이론적으로 행하는 방법을 아는 것들의 수가 증가할 것이지만 실제로 행할 수 있는 자원을 갖춘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다시 말해서, 지식은 마법의 지팡이, 대리 구세주 또는 기적의 원천이 아니다. 그것은 에너지를 더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길을 열 수 있고 이전에는 결코 사용되지 않았던 에너지 자원을 사용하는 방법을 파악할 수 있지만, 느닷없이 에너지를 불러 낼 수는 없다. 그것에 관해서는, 에너지 자원이 존재하더라도, 다른 인자들이 자원이 사용되지 못하게 막는다면, 자원의 사용 방법에 대한 지식은 전혀 위안이 되지 않는데, 오히려 정반대이다.

 

바로 이 점이 윌리엄 캐턴의 경력의 비극을 요약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는 알고 있었고, 그래서 산업주의가 자체의 몰락을 초래하게 될 이유와 그것의 난파로부터 무언가를 구조하기 위해 행할 수 있는 일을 대단히 명료하게 설명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런 지식은 상황이 바꾸는 데 충분하지 않았는데, 언제나 소수의 사람들만이 경청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귀를 막고서 예전에 레이건이 유행시킨 "랄랄라, 당신의 말은 들리지 않아요"라는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었고, 그래서 모든 인간들이 방대한 비참함을 겪지 않게 할 수 있었을 행위들은 결코 실행되지 않았다. 2011년에 내가 그에게 말을 건넸을 때, 그는 자기 평생의 작업이 산업 사회를 심연을 향한 쇄도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데 본질적으로 아무 것도 행하지 못했다는 점을 완전히 자각하고 있었다. 그것은 생애의 마지막 나날에 사색하기에는 틀림없이 씁쓸한 것이었고, 그래서 나는 그가 마침내 밤이 점점 다가온 지난 달에 다른 것을 생각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