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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이브 해밀턴: 오늘의 에세이-기후 변화는 사회과학의 종말을 알리는 전조이다

 

기후 변화는 사회과학의 종말을 알리는 전조이다

Climate change signals the end of the social sciences

 

―― 클라이브 해밀턴(Clive Hamilton)

 

전국 평균 최고 기온이 40.33℃에 이른 [2013년] 1월 7일에 오스트레일리아 전체의 신기록을 세운 열파에 대응하여 기상청은, 뒤돌아 보면, 오스트레일리아 대학들에서 가르치는 모든 사회과학에 대한 조종처럼 들리는 성명을 발표했다.

 

"현재 기후 체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과거보다 1도 더 더운 행성에서 발생하고 있습니다." 기상청의 기후 감시 관리관이 말했다.

 

작년에 저명한 미합중국 기후 과학자 케빈 트렌버스(Kevin Trenberth)는 동일한 주장을 더 철저히 제기했다.

 

어떤 사건이 기후 변화에 의해 초래되는지 여부에 관해 흔히 제기되는 물음에 대한 대답은 그것이 잘못된 물음이라는 것이다. 모든 날씨 사건들은 기후 변화의 영향을 받게 되는데, 그것들이 일어나는 환경이 과거보다 더 온난하고 더 축축하기 때문이다.

 

트렌버스의 논평은 우리로 하여금 인간이 유발한 기후 변화에 관해 생각하는 방식을 재구성하도록 요청한다. 우리는 더 이상 어떤 사건들은 "자연"이라고 표기된 상자 속에 그리고 어떤 사건들은 "인간"이라고 표기된 상자 속에 집어넣을 수 없다.

 

이런 두 상자의 발명이 근대성을 규정짓는 특징인데, 그것은 근대성에 관한 데카르트와 칸트 철학에 정초한 관념이다. 그것의 출현은 과학학에 의해 지식 창조의 지저분한 과정과 정제된 과학 사이의 모순에서도 추적되었으며, 결과적으로 인간과 자연의 분리는 환영이고,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는 브뤼노 라투르(Bruno Latour)의 난감한 주장으로 이어진다.

 

이제 기후 과학은 그런 분리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으며, 자연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은 뒤섞이고 그것들의 영향은 매끈하게 구별지을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기후 체계에 대해서 참인 것만으로도 충분할 것이지만, 이런 인간-자연 혼성물은 기후 체계의 경우뿐 아니라 행성 전체에 대해서도 참이다. 지구 체계 과학이라는 새로운 분과학문으로부터 우리는 기후 변화가 날씨뿐 아니라 지구의 수권(물로 이루어진 부분들), 생물권(살아있는 생명체들) 그리고 심지어 암석권(지구의 지각)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안다. 그것들은 모두 지구를 매우 역동적으로 만드느 거대한 자연적 순환과 과정들에 의해 연결되어 있다. 요약하면, 모든 것이 작동 중에 있다.

 

기후 변화와는 별도로, 인간 활동이 심대한 방식으로 지구를 변형시켜버렸다는 것이 명백하다. 이제 바다 속 호르몬에서 대기 중 불화탄소와 핵무기 시험으로 인한 토양 속 방사능까지 모든 입방 미터의 공기와 물, 모든 헥타르의 토지에 인간의 자국이 찍혀 있다.

 

매년 인간들은 자연의 거대한 부식 및 풍화 과정들보다 열 배나 더 지구 전체에 걸쳐 암석과 토양을 변화시킨다. 토지 표면의 절반은 인간들에 의해 변경되었다. 1930년대 이래로 이루어진 댐 건설은 대양의 수면을 삼 센티미터 더 낮게 유지하기에 충분한 물을 가두었다. 이제 멸종은 자연적 멸종보다 100배 더 빠른 속도로 일어나고 있다.

 

지금까지 인간들의 영향이 매우 심대하여 최근에 윌 스테펜(Will Steffen) 같은 지구과학자들은 지구가 새로운 지질 시대에 진입했다고 선언했는데, 그것은 "전지구적 환경에 찍힌 인간의 자국이 이제 너무 커고 적극적이어서 지구 체계의 작동에 미치는 영향에 있어서 자연의 거대한 힘들 가운데 일부에 필적한다"는 사실에 의해 규정되는 시대이다. 인류세, 즉 인간의 시대로 알려져 있는 그것은 충적세, 즉 문명의 번성을 가능하게 한 두드러진 기후 안정성과 온화함을 나타낸 10,000년 동안의 시기의 종말을 특징짓는다.

 

현대 사회과학―사회학, 심리학, 정치학, 경제학, 사학 그리고 철학도 덧붙일 수 있다―은 인간 삶의 거대하고 단조로운 사건들은 활기 없는 자연이라는 배경에 대해서 일어난다는 가정에 의존한다. 인간들만이 행위주체성을 갖추고 있다. 분석할 가치가 있는 모든 것은 "사회적인 것"이라는 밀봉된 세계에서 일어나며, 그리고 자연은 느껴지게 되는 것―환경사, 사회학 또는 정치학에서―에 비하여 "환경"은 움벨트, 즉 우리를 둘러싸고 때때로 우리 계획에 침범하지만 항상 분리된 채로 있는 "저쪽의" 자연적 세계이다.

 

18세기 유럽에서 출현한 "사회과학"의 독특한 점은 과학에 대한 자체의 열망보다도 오히려 "오로지 사회적인" 관심 영역이었다.

 

그래서 인류세의 도래는 현대 사회과학의 영역인 사회적 분석의 자기충족적인 세계를 산산히 부수고, 그 영역 속에 남아 있는 지식인들이 왜 과학에 어긋나지 않는 방식으로 기후 변화의 정치, 사회학 또는 철학을 "분석하는" 것이 불가능한지 설명한다. 그들은 결국 낡은 범주들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획기적인 일, 즉 산업 혁명 또는 문명 자체의 출현의 규모에 해당하는 파열이 일어났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소수의 사람들이 근대주의(modernism)라는 안개를 뚫고 응시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신기원을 특징짓는 개입으로, 시카고 대학 사학자 디페쉬 차크라바르티(Dipesh Chakrabarty)는 우리가 자연사와 인간사 사이에 설정한 구별짓기는 이제 붕괴되었다고 주장한 적이 있다. 인류세가 도래함으로써 두 종류의 역사가 수렴하여 "본래적 의미에서의 모든 역사는 인간사의 역사이다"라는 것은 더 이상 참이 아니게 되도록 인간들은 지질학적 힘이 되었다.

 

역사에 대한 E. H. 카(E. H. Carr)의 유명한 규정은 이제 폐기되어야 한다.

 

인간들이 자연적 과정들―계절의 순환, 인간 평생―이 아니라 인간들이 의식적으로 관여하고 의식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일련의 특정한 사건들의 견지에서 시간의 이행을 생각하기 시작할 때 역사는 시작된다.

 

지금부터 인간 역사는 인간들의 영향을 받지만 대체로 인간들이 통제할 수 없는 "자연적 과정들"에 의해 점점 더 주도될 것이다. 인간 미래는 지구의 지질학적 진화의 미래와 얽히게 되었다. 어떤 책에서 내가 주장하듯이, 근대주의적 신념과는 대조적으로, 우리가 만들어낸 단계가 이제 역동적이고 변화무쌍한 힘으로서 작동하게 되어버렸기 때문에 인간들이 자신들의 역사를 만든다는 것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다.

 

그리고 행위자들도 새롭게 꼼꼼히 검토되어야 한다. 인류세의 혼성물 지구에서는 인간들을 합리적 동물, 신이 선택한 피조물 또는 그저 또 하나의 종으로 특징짓는 것이 더 이상 지지를 받을 수 없다면, 우리는 어떤 종류의 존재인가?

 

우리 대학들에서 가르치는 사회과학은 이제 "인류세 이전의" 것으로 분류되어야 한다. 사회과학을 재발명하는 과정―예술 학과들에서 가르치는 것은 과학 학과들에서 출현한 것과 어긋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은 부단하고 고된 지성적 기획일 것이다. 결국 40.33℃에 의해 초토화되는 것은 그저 풍경이 아니라 근대주의 자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