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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머민: 오늘의 에세이-실재와 추상물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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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재와 추상물에 관하여

What's bad about this habit

 

―― 데이비드 머민(N. David Mermin)

 

교회에서 나온 후에 우리는 잠깐 동안 함께 서서 물질의 비존재성과 우주 속 만물은 관념적일 뿐이라는 점을 증명하는 버클리 주교의 교묘한 궤변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우리가 그의 신조가 참이 아니라는 점을 확신하더라도 그것을 논박하기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나는 존슨이 기민하게 응대한 것을 잊지 못할 것인데, 그는 큰 돌을 발로 강력히 걷어차면서 "그러므로 나는 그것을 논박한다"라고 말했다.

―― 제임스 보스웰(James Boswell), <<새뮤얼 존슨의 삶(The Life of Samuel Johnson)

 

실재보다 더 추상적인 것은....아무것도 없다. 

―― 조르지오 모란디(Giorgio Morandi), <<에도아르드 로디티(Edouard Roditi)와의 인터뷰>>

 

나쁜 습관은, 그것을 전적으로 의식하지 못한 채, 필요 이상으로 삶을 더 힘들게 만드는 무언가를 행하는 것이다. 물리학자들의 나쁜 습관은 그들의 가장 성공적인 추상물들을 우리 세계의 실재적 특성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실재적인 것과 추상적인 것 사이의 구별짓기는 불확실한 것으로 악명 높기 때문에 추상적인 것에 실재성을 잘못 부여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궁금할 것이다. 나는 성공적인 추상물들을 부적절하게 물화하는 우리의 습관을 여러 사례들로 예시할 것이다.

 

가장 논란이 적은 사례들은 양자 역학에 의해 제공될 것이다. 양자 상태는 여태까지 우리가 찾아낸 가장 강력한 추상물일 것이다. (여기서 "찾아낸"이라는 낱말은 유용한 낱말인데, 실재-추상 축 상에서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지에 따라 그 낱말이 "발견된" 아니면 "발명된"이라는 의미를 나타내는 것으로 간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양자 상태는 실재적인 것인가?

 

그런 의문이 무엇을 의미할지 고찰함에 있어서 초기에 에르빈 슈뢰딩거(Erwin Schoedinger)는 어떤 입자의 양자 상태―그것의 파동함수 형식으로 표현된―가 고전 전자기장이 실재적인 것만큼 실재적인 장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을 떠올리자. 확산되지 않은 파동다발은 조화 진동자의 특이한 것이고, N개 입자들의 파동 함수는 3N차원 공간 속의 장일 뿐이라는 점을 인식했을 때 그는 그런 견해를 포기한다.

 

그런데 그것이 양자 역학에 대한 드 브로이-봄(de Broglie-Bohm) "파일럿 파동(pilot wave)" 해석의 옹호자들이 N개 입자들의 파동함수를 3N차원 배위 공간(configuration space)에서 실재하는 장으로 간주하는 것을 막지는 못한다. 나머지 사람들이 일반적인 3차원 공간에 귀속시키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그들은 그런 고차원 배위 공간에 물리적 실재성을 부여한다. 고전 전자기장이 고전 하전 입자들의 운동을 제어할 수 있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실재적) 입자들의 운동을 제어할 수 있는 능력에 있어서 파동함수의 실재성은 현시적이다.

 

왜 양자 상태를 물화하는 것이 삶을 필요 이상으로 더 힘들게 만드는가? 파일럿 파동을 진지하게 여기면 배위 공간에서 (물화된) 점이 (물화된) 파동함수에 따라 그리게 되는 궤적에 관해 계산하고 도표를 그리며 관련 정리들을 증명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된다. 그런 궤적들은 궤적이 없는 통상적인 양자 역학을 사용하여 도달할 수 없는 예측들을 전혀 제시하지 못한다. 그것들의 주목적은 양자 상태가 실재적인 것이라는 견해―나쁜 습관―를 강화하는 것이다.

 

입자들을 떠미는 파일럿 파동의 존재를 믿지 않는 사람들의 경우에도 양자 상태를 물화하는 것은 삶을 필요 이상으로 더 힘들게 만들 수 있다. 그것 때문에 그들은 아인슈타인-포돌스키-로젠(Einstein-Podolsky-Rosen)의 유명한 논문에 의해 최초로 주목을 받게 된 그런 종류들의 실험에서 빛보다 더 빠른 영향에 관해 걱정하게 만든다. 그런 실험들에서 한 체계는 그 체계와 더 이상 상호작용하지 않는 멀리 떨어져 있는 두 번째 체계의 근처에 한정된 작용의 결과로서 자발적으로 어떤 상태를 획득한다. 첫 번째 체계의 상태가 그 체계의 실재적 특성이라면, 멀리 떨어진 두 번째 체계의 근처에서 첫 번째 체계로 실재적인 무언가가 분명히 빛보다 빠른 속도로 전달되었다. 그 상태가 그저 유용한 추상물이라면, 오히려 무엇이 그리고 어디로(또는 누구에게) 전달된 것인지 훨씬 더 불분명하다.

 

또한 양자 상태를 물화하는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상태]의 불연속적인 변화 속에 반영되는 것은...우리 지식의 불연속적인 변화이기 때문에...[양자 상태]의 불연속적인 변화가 일어난다"라는 점을 베르너 하이젠베르크(Werner Heisenberg)와 함께 인식하기보다 "양자 측정 문제"에 관한 책을 저술하거나 학술회의를 소집하게 만든다.

 

거의 확실하게도, 양자 상태는 그것이 서술하는 체계의 실재적 특성이 아니라는 점을 인식함으로써 "양자 비국소성"과 "측정 문제"를 초래하는 불편함이 전적으로 제거될 수는 없다. 그런데 양자 상태는 계산 도구이고 어떤 체계의 실재적 특성이 아니라는 점을 인식하게 되면 더 세밀하고 덜 선정적인 견지에서 그런 불편함의 원천들을 표현할 수밖에 없다. 양자 상태에 대한 그런 견해를 취하는 것은 "수수께끼 같은 원격 작용" 또는 "파동함수의 붕괴"의 기저에 놓여 있는 "메커니즘"에 대한 이론적 또는 실험적 탐구를 촉발하는 동기를 감소시킬 것이다.

 

양자 장

 

물론 통상적인 비상대론적 양자 역학은 현상학에 불과한 것으로서 실재적 세계의 구성물에 관해 우리가 갖고 있는 가장 근본적인 이론인 양자 장 이론의 단순화된 판본이다. 그런데 양자 장 이론이 서술하는 양자 장의 존재론적 지위는 무엇인가? 실재는 모든 지점에서 무한 차원의 힐베르트 공간 위 연산자들의 집합체가 존재하는 4차원 시공간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양자 장 이론을 배우는 대학원생이었을 때 나는 양자 장이 세계를 구성하는 실재적 질료라는 뜻밖의 사실에 매혹된 친구가 있었다. 그는 양자 장을 물화했다. 그런데 나는 여러분 자신이 무한 차원의 힐베르트 공간 위 연산자들의 연속적인 장이 아니라는 점에 동의할 것이라고 희망한다. 그 점에 대해서는, 여러분이 읽고 있는 페이지도 여러분이 앉아 있는 의자도 그렇지 않다. 양자 장은 유용한 수학적 도구이다. 그것 덕분에 우리는 상황을 계산할 수 있다.

 

어떤 종류들의 상황인가? 예를 들면, 방전 상자에서의 궤적, 핵 준위 도표, 원자 스펙트럼, 초전도체에서의 터널링 속도가 있다. 동일한 도구―힐베르트 공간 위 연산자들의 장―이 그 모든 상이한 목적들에 대해 작동한다는 것은 놀랍지만, 도구를 그것이 서술하는 데 도움이 되는 실재와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양자 장의 지위가 실재적 사물에서 계산 도구로 격하되면 슈뢰딩거가 애초에 자신의 파동함수가 갖기를 원했던 그런 종류의 실재성을 나타내는 평범한 오래된 고전 전자기장의 실재성은 어떻게 되는가? 고전 전자기학을 배우는 학부생이었을 때 나는 전자기장이 실재적이라는 뜻밖의 사실에 매혹되었다. 어떤 하전 입자들이 다른 하전 입자들을 밀어내는 방식에 대한 영리한 계산 도구가 결코 아니라, 전자기장은, 가장 인상적으로는 전자기 파동의 형태로, 입자들 자체와 꼭 마찬가지로 실재적이었는데, 자체의 에너지와 운동량을 가지며 발생 원천이 사라져버린 지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도 전파할 수 있다.

 

대학원생으로서 내가 맥스웰의 방정식들이 실제로 기술하는 것은 힐베르트 공간 위 연산자들의 장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고전 전자기장의 실재성에 관한 그런 멋진 견해는 종식되었다. 그런 연산자가 양자 장인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양자 장이 실재적인 것이 아니라 놀랍도록 성공적인 계산 도구일 뿐이라는 점에 동의한다. 그래서 실재적인 고전 전자기장은 영리한 계산 도구의 특수한 점근적인 영역(고전적 극한)에서 단순화된 것에 불과하다. 다시 말해서, 고전 전자기장은 또 하나의 영리한 계산 도구이다.

 

시간과 공간

 

당연히 시간과 공간은 우리로 하여금 고전 시공간 궤적을 계산할 수 있게 하는 도구이다. 시공간 자체는 어떠한가? 시공간은 (1+3)차원의 수학적 연속체이다. 여러분이 수학적 플라톤주의자일지라도, 나는 여러분으로 하여금 이 연속체는 개별적 사건들 사이의 관계들을 나타내는 대단히 효과적인 방식일 뿐이라고 생각하도록 촉구할 것이다. 그렇다면 사건이란 무엇인가?

 

사건은 시공간에서 수학적 점으로 유용하게 표현될 수 있는 현상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우리에게 관심을 갖게 하는 의문들 가운데 어떤 것과도 아무 관련이 없는 것으로 우리가 간주하는 내재적인 공간적 및 시간적 연장을 갖는 현상이다. 1905년에 특수 상대성을 도입할 때 아인슈타인은, 양자론의 물리적 실재에 대한 나중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사건의 추상적 특질을 잘 인식했다. 일찌기 자신의 논문에서 아인슈타인은 "(근사적으로) 동일한 장소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의 동시성이라는 개념에 들러붙는 부정확성"에 주의를 환기시키는데, 그는 "사건들은 추상물에 의해 연결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래서 시공간은 무시하는 것이 유용하거나 필요하다고 알게 되는 공간적 및 시간적 연장을 갖는 현상을 근사적으로 나타내는 점들로 이루어진 추상적인 4차원 수학적 연속체이다. 시공간이라는 도구는 매우 강력해서 우리는 흔히 그런 추상적인 기입 구조를 물화하는데, 그래서 우리는 바로 그런 4차원(또는 일부 사람들에게는 10차원) 연속체인 세계에 거주하고 있다고 말한다. 추상적인 시간과 공간의 물화는 우리가 말하는 바로 그 언어 속에 구축되어 있는데, 결과적으로 지적인 수법을 놓치기 쉽게 만든다. (고전) 전기장과 자기장을 물화하는 것은 더 최근의 나쁜 습관인데, 장을 양자 장으로 격상시킨(또는 원한다면, 격하시킨) 양자 전기역학이 도래함으로써 밝혀지기 시작했을 때까지 그것 역시 당연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시공간 연속체를 물화하는 것이 왜 나쁜 습관인가? 글쎄, 그것 때문에 점들로 추상화되는 사건들 가운데 일부의 본성을 간과하게 될 수 있다. 1905년에 아인슈타인은, 누군가가 기차는 7시에 도착한다고 말할 때 그가 의미하는 것은 "내 시계의 시침이 7시를 가리키는 것과 열차의 도착이 동시적 사건들이"라는 것이라는 점도 환기시켰다. 시간을 표시하는 데 사용되는 사건은 거시적인 계시 장치의 거동과 관련되어 있다.

 

거시적인 시계는 거시적인 공간적 연장을 갖는다. 우리가 갖추고 있는 최고의 시계―원자 시계―도 세슘 원자의 천이를 활용하는데, 세슘 원자는 플랑크 길이의 규모는 말할 것도 없이 원자 핵의 규모에서도 거대하다. 그리고 원자의 크기도 원자 시계의 크기를 심하게 과소평가하는데, 세슘 원자들로 시계를 만들기 위해서는 어떤 공동을 천이와 공명하도록 조율해야 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다시 아인슈타인 시계의 거시적 충위로 돌아가게 된다.

 

그래서 나는 시공간이 플랑크 규모에서 거품이 된다는 말을 들을 때 내 총을 향하여 손을 뻗지 않는다. (나는 총이 전혀 없다.) 그런데 나는 그 거품이 시공간을 구성하여 나타내는 거시적인 사건들 및 사건들을 위치시키는 데 사용하는 거시적인 수단들과 무슨 관련이 있는지 궁금하다.

 

우리 자신의 경험

 

그것을 다른 식으로 말할 것이다. 우리 경험의 원료는 사건들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 경험이 직접 접근할 수 있는 덕분에 사건들은 불가피하게 고전적 특질을 갖추고 있다. 시간과 공간과 시공간은 우리가 거주하고 있는 세계의 특성들이 아니라, 고전적 사건들을 조직하는 데 도움이 되기 위해 우리가 발명한 개념들이다. 차원이나 간격, 또는 곡률이나 측지선 같은 관념들은 우리가 거주하고 있는 세계의 특성들이 아니라, 사건들을 조직하는 데 도움이 되기 위해 우리가 발명한 추상적인 기하학적 구성물들이다. 또 다시 아인슈타인이 서술했듯이, "시간과 공간은 우리가 살아가는 조건이 아니라 우리 사유의 양태들이다."

 

또한 몇 가지 측면에서 그 점은 양자 물리학에서 이해하기가 가장 쉬울 것인데, 여기서 시간과 공간은 궁극적으로 정보가 획득되거나, 또는 원한다면, 측정이 이루어지는 시각과 장소를 가리킨다. 아픈 발가락의 실재성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런데 "그러므로 나는 그것을 논박한다"라는 것의 이면은 우리의 직접적인 지각들에 정합성을 부과하는 데 도움이 되는 추상물들의 실재성을 의심하는 것이다. 나는 직접적 지각의 실재성에 대한 존슨의 타당한 긍정이 그런 지각들을 조직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으로 알게 되는 구성물들에 관한 버클리 주교의 회의주의에 대한 논박을 구성한다고 추측한다.

 

청년 시절에 나는 닐스 보어의 철학적 언명들에 대해 거의 공감하지 않았다. 보어의 철학적 저작들에 대한 서평에서 나는 "저자를 힘차게 흔들어서 그 자신의 글을 더 설명하거나 최소한 이전의 표현들 가운데 일부를 바꾸어 서술하기 위해 더 열심히 노력하기를 요구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런데 노년 시절에 나는 그런 장황한 글 속에 몇 가지 진짜 보석들이 묻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자연에 대한 우리의 서술에 있어서 그 목적은 현상의 실제 본질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가능한 한 우리 경험의 다양한 측면들 사이의 관계들을 찾아내는 것일 뿐이다." 그리고 "물리학은 선험적으로 주어진 것에 관한 연구라기보다 오히려 인간 경험을 배열하고 조사하기 위한 방법들을 개발하는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물리학에 대한 보어의 이런 규정은 양자 물리학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고전 물리학의 경우에도 참이라고 나는 제안한다. 당연하게도 고전 물리학에서는 우리가 경험을 배열하고 조사하기 위해 개발한 추상물들이 자체적으로 그런 경험의 일부라는 점을 납득할 수 있었다. 양자역학은 그런 환원 불가능하게 실재적인 경험과 그것을 전부 결부시키기 위해 우리가 찾아낸 아름다우며 대단히 추상적인 상부구조를 분리시킬 필요성을 우리로 하여금 명확히 깨닫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