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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덤 프랭크: 오늘의 에세이-과학의 힘과 과학주의의 위험

 

과학의 힘과 과학주의의 위험

The Power of Science And The Danger of Scientism

 

―― 애덤 프랭크(Adam Frank)

 

여러분은 집요한 과학 옹호자이면서 문화 속에서 과학이 전유되는 방식을 여전히 미심쩍게 여길 수 있는가? 여러분은 과학의 실천과 약속에 대해 열정적이지만, 다른 믿음과 가정들이 과학이라는 이름 아래 고지되는 방식에 여전히 괴로워하는가? 그런 일이 가능한다면, 여러분은 친과학적이지만 반과학주의적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맞다면, 여러분은 스티븐 핑커(Steven Pinker) 때문에 열받았을 것이다. 그런데, 알게 되다시피, 그것은 말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오늘날 과학주의는 많은 주목을 받고 있다. 과학주의는 언급하고 있는 사람에 따라 다양한 의미를 띠기 때문에 파악하기가 어려운 낱말이다. 메리엄-웹스터 온라인 사전에 따르면, 과학주의는 다음과 같다.

 

모든 탐구 영역(철학, 사회과학 그리고 인문학 같은)에 적용되는 자연과학의 방법들의 효험성에 대한 과장된 믿음.

 

그러므로 과학주의는 "과학이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다"(또는 최소한 "과학이 중요한 모든 것을 설명한다")는 관념인데, 종교, 철학 그리고 인문학의 가치 등과 관련된 논증에서 일부 사람들이 취하는 입장이다.

 

그런데 스티븐 핑커(Steven Pinker)가 "과학은 당신의 적이 아니다: 방치된 소설가, 교전 중인 교수 그리고 종신 재직권이 없는 역사가들에 대한 절절한 탄원"라는 제목의 에세이를 <<뉴 리퍼블릭(New Republic)>>에 기고함으로써 과학주의 논쟁에 끼어들었다. 그리고 핑커의 경우에는 과학주의 같은 것은 정말 존재하지 않는데, 그는 그것이 "정합적인 신조를 가리키는 낱말이 아니라 금기어"라고 주장한다.

 

핑커의 에세이와 관련된 문제는 그의 주요한 목적이 인문학(역사, 문학 등)의 동료들에게 대학의 과학 부문에서 비롯된 방법들을 채택하는 것은 그들의 분과학문들에 아무 위협도 제기하지 않는다는 점을 납득시키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그는 역사 기록물에서 정보를 추출하는 것은 역사의 메커니즘들을 새롭게 밝힐 것이라고 주장하곤 했다. 그리고 핑커가 다음과 같이 진술할 때 그는 인문학의 중요성에 대해서 분명한 입장을 나타낸다.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 누구도 개화된 민주주의에 필수적인 인문학에 대해 우리 사회가 투자을 중단하는 것에 무관심하지 말아야 한다.

 

이것이 과학주의 논쟁들과 관련하여 전개된 전부라면, 적어도 나는 관여할 필요를 별로 인식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 에세이에서 핑커는 두드러지게 합당한 것을 많이 이야기한다. 그런데 과학과 문화와 관련하여 훨씬 더 깊은 문제가 존재하며, 핑커는 깨닫지 못한 채 울퉁불퉁한 바닥 바로 위로 발을 내디딘 듯 보인다.

 

핑커는 인간의 삶 속에서 과학이 차지하는 지위로 인한 과학에 대한 비난 의식에 관해 말한다. 그는 하버드 대학 교수로서 겪은 그런 태도에 대한 자신의 경험을 이렇게 인용한다.

 

2006년에서 2007년까지 하버드 대학이 교양 필수 교육을 개혁했을 때, 예비 위원회 보고서는 인간 지식에서 과학이 차지하는 지위에 대해서는 아무 언급도 없이 과학 교육을 소개했다. "과학과 기술은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 학생들에게 긍정적 및 부정적 영향을 직접적으로 미친다. 그것들은 구명 의학, 인터넷, 더 효율적인 에너지 저장 그리고 디지털 오락을 낳았다. 또한 그것들은 핵무기, 생물학적 무기, 전자 도청 그리고 환경 훼손을 선도했다." 유용한 것과 사악한 것 사이의 이런 기묘하게 애매한 표현은 다른 분과학문들에는 적용되지 않았다. (고전 음악이 경제 활동을 창출하기도 하며 나치를 고무하기도 했다고 강조함으로써 고전 음악 연구에 동기를 부여하는 것을 잠깐 생각해보자.) 그리고 우리가 무지와 미신보다 과학과 전문적 지식을 선호할 좋은 이유들이 있을 것이라는 점을 전혀 인정하지 않았다.

 

이 단락에서 핑커가 이해하지 못한 것은, 과학이 과학의 이름으로 말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남용하게 되는 독특한 처지에 처하게 된 것은 바로 과학의 막대한 힘과 엄청난 성공이라는 점이다.

 

지난 사 세기 동안 과학이라고 불리는 실천은 전례가 없는 방식으로 인간 문명을 전적으로 재구성했다. 과학은 그 자체로 그저 하나의 실천이며, 해답을 구하는 의문들을 제기하는 한 방식이다. 그것은 세계에 접근하는 한 방식이다. 강력한 변화를 만들어내기 위해 그 실천을 이용할 수 있는 능력은 항상 나름의 위험을 수반했다.

 

과학의 효험성은 (흔히 표명되지 않은) 철학적 가정들의 옹호자들에게 강력한 매력을 생성했다. 이들은 자신의 믿음을 과학적 기획의 정당성으로 은폐하고자 하는 사람들이다. 이것이 과학주의가 추악한 손을 들어올리는 지점이다.

 

핑커가 사회적 다윈주의, 우생학 또는 역사의 과학을 찾아냈다는 공산주의적 주장의 어리석음에 대해 과학을 비난할 수는 없다고 주장한 것은 옳다. 그런데 그가 과학주의를 "금기어"로 쉽게 일축하는 것은 과학이 문화 속에서 정말 합당한 정도를 넘어서는 목적을 위해 이용된다는 점을 놓치게 된다. 사실상 과학을 문화적으로 잘못 전유하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바로 과학의 도구들의 효험성이다.

 

이런 잘못된 전유의 일부는 과학이 설명을 제공하는 데 매우 능숙하기 때문에 설명이 중요한 전부라고 생각하는 것에서 비롯된다. 그것은 위험하면서도 슬픈 방식으로 인간의 체험을 균일하게 하는 접근 방식이다. 예를 들면, 인간의 영성과 과학에 대한 논의에서 그것은 누가 우주를 개시했는지를 둘러싸고 리처드 도킨스와 근본주의자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만화 같은 논쟁을 낳는다. 놓치고 있는 것은 사람들이 달이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지 묻는 것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영성적" 갈구를 느끼는 이유의 다양성이다.

 

과학의 힘과 약속은 우리가 그것의 열매 그리고 독으로 포화된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점을 이해한다고 해서 훼손되지는 않는다. 과학주의는 정합적인 신조가 아니라고 말한 점에서 핑커가 전적으로 옳다. 그렇지만 그것이 과학주의라는 술어가 공허한 것이라는 점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과학주의는 과학이 자연 세계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 거둔 성공의 불행한 결과이다. 사실상 과학주의가 표명되는 방식을 분명히 하는 것이 유용할 것이다. 그것은 과학주의가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실제 기획―과학에 의해 충분히 형성된 문화 속 인간의 완전한 스펙트럼에 대한 공간을 구축하는 것―에 끼치는 해악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