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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비네 호센펠더: 오늘의 에세이-과학적 방법은 수정될 필요가 있는가?

 

 

과학적 방법은 수정될 필요가 있는가?

Does the Scientific Method need Revision?

 

―― 자비네 호센펠더(Sabine Hossenfelder)

 

이론 물리학은 문제가 있다. 그것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할 일이 아무것도 남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특히 고에너지 물리학과 양자중력 분야에서 진보는 1970년대 중반에 표준 모형이 개발된 이래로 기본적으로 교착 상태에 빠져버렸다. 그렇다. 때때로 새로운 입자가 발견되었다. 그렇다. 대량의 데이터가 수집되었다. 그러나 우리 이론들의 근본적인 구성 요소들, 즉 양자장 이론과 리만 기하학은 그때 이래로 변하지 않았다.

 

상황이 왜 이런지 그리고 그것과 관련하여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 모든 사람이 나름대로 자신이 애호하는 설명을 제시한다. 한 가지 주요한 인자는, 낮게 매달린 열매들은 다 땄고, 그래서 나무 위로 더 높이 올라가야 함에 따라 진보는 느려진다는 확신이다. 오늘날에는 새로운 범위의 매개변수 공간을 시험하고 있는 실험에 수십 억 달러를 투자하고, 충돌기를 건설하고, 망원경을 궤도에 올리며, 슈퍼컴퓨터를 돌려야 한다. 욕조가 넘치는 것을 관찰함으로써 역사가 이루어지는 시대는 지나가버렸다.

 

다른 한 인자는 거의 틀림없이 문제들은 기술적으로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는 반면에 인간의 뇌는 거의 변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렇다. 현재 인간들을 도와줄 컴퓨터가 있지만, 이것들은 최소한 당분간은 우리가 먹여주는 음식을 씹고 소화할 뿐이지 스스로 요리하고 있지는 않다.

 

함께 고려하면, 이것은 우리가 자연에 관해 더 많이 알게됨에 따라 투자 수익율이 감소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의미한다. 별로 놀랄 일은 아니다.

 

그런데, 그것은 실망스러운 상황이고, 그래서 우리는 진보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에 대한 다른 이유들, 즉 우리가 그것들과 관련하여 무언가 할 수 있는 이유들이 있는지 의심하게 된다. 특히 판세를 뒤집는 것, 어떤 획기적인 기술, 청정 에너지, 워프 드라이브, 운반 장치가 정말 필요하다! 우리로 하여금 페이스북으로 가는 길, 즉 자기 파괴로 가는 길을 벗어나게 해 줄 것이 정말 필요하다.

 

우리는 공간, 시간, 물질 그리고 그것들의 양자 거동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인해 자연이 우리에게 제공한 것을 더 잘 사용하지 못한다. 그리고 바로 이런 실망으로 인해 공동체 안팎의 사람들이 우리가 무언가 잘못하고 있고, 그 분야의 사회적 동학이 곤경에 처해 있고, 우리가 길을 잃어버렸으며, 비과학적인 이론들에 관해 계속 연구하고 있기 때문에 진보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고 주장하게 된다.

 

정말 그러한가?

 

우리가 공간과 시간의 양자적 본성을 알아내는 것을 진전시키려고 노력하지 않았던 것은 아닌 듯 보인다. 고에너지 물리학과 양자중력 분야는 매일 새로운 착상이라고 추정되는 것으로 가득차 있다. 그런데 여태까지, 양자중력에 대한 현존하는 접근방식들 가운데 지지 증거를 갖고 있는 것은 단 하나도 없다.

 

이런 일이 일어난 이유는 내게 명백하다. 우리는 양자중력을 실험적으로 시험하는 일에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실험적 입력이 없다면 과학적 이론을 개발할 수 없다. 그런 일은 과거에 일어난 적이 전혀 없으며, 미래에도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데이터가 없다면 이론은 과학이 아니다. 실험적 시험이 없다면 양자중력은 물리학이 아니다.

 

현재 양자중력 현상학에 더 많은 주의가 집중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나도 그런 말, 즉 자신들의 환상에 계속 잠겨 있기를 바라는 사람들에 의한 입에 발린 고백들을 들었다. 그런데 현실은 양자중력 현상학에 대한 연구비 지원이 전혀 없고 일자리도 전혀 없다는 것이다. 양자중력 현상학이 구인 공고에서 언급되는 것을 본 적이 있는 드문 경우에도 그 자리는 이론에 관해 연구하는 사람, 물리학이 아니라 수학에 관해 연구한다고 말하고 싶은 사람으로 채워졌다.

 

연구비 지원 기관들이 양자중력의 실험적 시험이 아니라 양자중력의 이론을 개발하는 데 연구비를 투자하는 것은 내 힘이 미치지 않는 일이다. 그렇다. 양자중력의 실험적 시험은 당치 않은 일이다. 그런데 양자중력을 시험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면, 이론에도 연구비를 투자하지 말아야 한다. 그렇다. 연구비 지원 기관들이 전문가들의 의견에 의존하기 때문에 그것은 공동체 문제가 된다.

 

설상가상으로, 최근에 철학자 리처드 다위드(Richard Dawid)는 아무튼 그 어떤 실험적 시험도 없이 어떤 이론의 전망을 평가하는 것이 가능하고, 따라서 물리학자들은 그가 "비경험적 사실들"이라고 부르는 것을 고려함으로써 과학적 방법을 수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으로 그는 우리가 흔히 내적 일관성으로 느슨하게 간주하는 것―이론 물리학은 수학의 비중이 크고, 그래서 매우 엄격한 논리를 갖추고 있다―을 의미하는 듯 보인다. 이것 덕분에 소수의 가정들로부터 많은, 흔히 놀라운 결과들을 도출할 수 있게 된다. 명백히, 어떤 이론의 유용성 또는 타당성의 범위를 평가할 때 이런 점이 고려되어야 하며, 그리고 고려되고 있다. 그런데 도출된 결과들의 어떤 측면들을 관찰할 수 없다면 그 결과들은 이론의 용도와 아무 관게도 없는데, 과학적 이론의 용도를 구성하는 것은 자연을 서술할 수 있는 능력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물리학자들은 관련 데이터를 명시적으로 수집하지 않는 경험적 사실들을 활용하기 때문에 다위드는 이 문제를 혼동했을 것이다. 예를 들면, 불안정한 진공, 특이점 또는 복소수 값을 나타내는 관측 가능량들을 갖는 이론은 폐기된다. 이런 점이 내적 모순이기 때문에 이론이 폐기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내적 모순이 아니다. 이것은 수학적으로 정말 멋지게 다룰 수 있다. 그런 것은 결코 관측된 적이 없기 때문에 이론이 폐기된다. 이론이 우리가 보는 것을 서술할 것이라고 간주되지 않기 떄문에 이론이 폐기된다. 이것은 비경험적 평가가 아니다.

 

경험적 사실의 결여와 관련된 대단히 큰 문제는 이론이 공리적으로 구속되지 않은 채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물리학자들은 일련의 공리들로 항상 시작하는 것은 아니지만, 원칙적으로는 이렇게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어떤 공리도 갖추고 있지 않다면 아무 이론도 갖추고 있지 않은 것이고, 그래서 어떤 공리들을 선택할 필요가 있다. 물리학의 핵심은 관찰을 서술하는 어떤 이론을 구성하기 위해 공리들을 선택하는 것이다. 이것은 이미, 만물 이론에 대한 착상은 불가피하게 현재 "다중 우주"라고 불리는 것에 이를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해준다. 그것은 이론이 모호해질 때까지 공리들을 제거한 결과일 뿐이다.

 

도중에 어딘가에서 많은 물리학자들이 관찰적 입력 없이 순수 논리학과 어떤 미학적 감각에 기반을 두고 이론을 구성하는 것이 가능함에 틀림없다고 믿게 되었다. 그들은 자신의 뇌가 우주와 불가사의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순수한 사유 능력이 자연 법칙들을 말해줄 것이라고 믿음에 틀림없다. 그런데 어떤 이론에 대한 공리들을 선택하는 유일한 논리적 요구 조건은 공리들이 서로 상반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관찰 결과를 고려하지 않는다면 우리 우주를 서술하는 이론에 결코 이를 수 없다. 끝. 공리들을 너무 많이 줄이려고 하는 시도는 예측들의 전체 "다중 우주"를 낳을 뿐인데, 그것들 대부분은 우리가 도대체 보게 될 것을 전혀 서술하지 않는다.

 

(유일한 다른 선택지는, 테그마크가 주장하듯이, 오로지 수학을 사용하는 것이다. 그것이 마음에 들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만, 최소한 그것은 논리적으로 정합적이다. 그런데 그것은 다른 이야기이며 따로 논의될 것이다.)

 

그런데 하나 이상의 우주를 포함하는 이론을 품고 있다면, 바로 우리 우주 같은 우주에 우리가 처할 가능성이 얼마나 되는지 알아내려고 시도할 수 있다. 그러므로 다중 우주 옹호자들은 과학적 방법에 대한 수정, 즉 확률론적 예측들을 고려하는 것을 지지하는 논변을 전개한다. 그러나 그것으로부터 얻게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다중 우주에서 확률을 계산하는 것은 하나의 공리, 이 경우에는 확률 분포에 대한 공리를 부가하는 또 하나의 방법일 뿐이다. 이것과 관련하여 잘못된 것은 전혀 없지만, 그것을 수용하기 위해 과학적 방법을 바꿀 필요는 없다.

 

오늘 발간된 <네이처> 논평에서 조지 엘리스(George Ellis)와 조 실크(Joe Silk)는 물리학자들이 시험할 수 없는 이론들을 추구하는 추세가 우려스러운 문제라고 주장한다. 나는 이 의견에 동의하는데, 이전에 나는 우려스러운 부분은 물리학자들이 시험 가능성에 대해 충분한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 그리고 그들은 여하튼 논문을 출판하고 보상을 받고 있기 때문에 명백히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다.

 

그런데, 사실상 그 문제의 기원은 선임 연구자들이 자신의 학생들에게 물리학은 오로지 자연을 서술하는 것과 관련된 것이라는 점을 가르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그 대신에 학생들은 사례를 통해서 충분한 수학으로 포장하는 한 노골적인 당혹스러운 추측들을 출판하며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끈 이론가가 아름다움과 우아함에 관해 말하기 시작할 떄마다 나는 움츠리게 된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들은 인간의 미적 감각이 자연의 근본적인 법칙들과 어떤 관련성이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는가?

 

과학적 방법은 가설을 구성하고 시험하는 순환으로 흔히 인용되지만, 나는 이것이 오해를 낳을 소지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어떤 하나의 과학적 방법이 있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유일한 것은 자연을 서술하는 이론의 용도를 정직하게 평가하는 것이다. 그것이 유용하다면 그 이론을 간직하라. 그렇지 않다면 다른 이론을 시도하라. 이 방법은 바뀔 필요가 없으며, 더 일관되게 적용되어야 한다. 어떤 과학적 이론의 용도는 그 이론을 관찰과 비교하지 않은 채 평가할 수 없다.

 

어떤 이론은 자연을 서술하는 것이 아닌 다른 용도들을 갖추고 있을 수도 있다. 심지어 그것은 아름답고 예술적일 수도 있다. 그것은 사유를 불러 일으킬 수도 있다. 그렇다, 그것은 아름답고 우아할 수도 있다. 그것은 너무 훌륭하여 참일 수도 있고, 영원히 유망한 이론일 수도 있다. 그것이 여러분이 추구하고 있는 것이라면, 내게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나는 이런 이론들이 추구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지 않다. 그것들을 수학, 예술 또는 철학이라고 부르자. 그렇지만 그것들이 자연을 서술하지 못한다면, 그것들을 과학이라고 부르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