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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시모 피글리우치: 오늘의 에세이-진화론의 (진행 중인) 진화

 

 

 

진화론의 (진행 중인) 진화

The (ongoing) evolution of evolutionary theory

 

―― 마시모 피글리우치(Massimo Pigliucci)

 

최근에 <<네이처>> 잡지는 "진화론은 재고할 필요가 있는가?"라는 제목의 "찬반 의견"을 실었다. "긴급하게 그렇다"라는 의견을 지지하는 논변을 펼친 사람들은 케빈 랠런드(Kevin Laland), 토비아스 울러(Tobias Uller), 마크 펠드먼(Marc Feldman), 킴 스티렐니(Kim Sterelny), 게르트 B. 뮐러(Gerd B. Muller), 아민 모체크(Armin Moczek), 에바 야블론카(Eva Jablonka) 그리고 존 오들링스미(John Odling-Smee)이다. "그렇지 않다, 모든 것이 괜찮다"라는 테제를 지지하는 논변을 펼친 사람들은 그레고리 A. 레이(Gregory A. Wray), 호피 E. 회크스트라(Hopi E. Hoekstra), 더글러스 J. 후투야마(Douglas J. Futuyama), 리처드 E. 렌스키(Richard E. Lenski), 트러디 F. C. 맥케이(Trudy F. C. Mackay), 돌프 쉴러터(Dolph Schluter) 그리고 조안 E. 스트라스만(Joan E. Strassman)이다.

 

복도 양편에는 내가 매우 존중하는 동료들인 일류 진화생물학자들이 많이 있다. 내 자신이 옹호하는 것은 많은 논문들과 공동으로 편집한 책에서 분명히 하였다. 지난 얼마 동안 내내 나는 그 논쟁의 온건한 찬성 의견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지지하는 논변을 펼쳤다. 그렇다. 진화론은 갱신될 필요가 있지만(그리고 사실상 갱신되고 있다), 여전히 그 갱신은 본래의 다윈주의(Darwinism)에서 이른바 신다윈주의(neo-Darwinism)와 현대적 종합(Modern Synthesis)을 거쳐 (진행 중인) 확장된 종합(Extended Synthesis)에 이르는 동일한 궤적을 따르는 다른 한 확장이다(잠시 후 이 모든 것들에 관해 더 논의된다). 이런 확장은 자연선택이라는 다윈주의적 신조의 거부, 라마르크주의의 부활 등과 같은 과장된 주장들과는 아무 관계도 없다.(디스커버리 인스티튜트로 하여금 비난 논평을 즉각적으로 시작하라는 신호.) 사실상 나는 라마르크와 다윈주의의 죽음에 관해 언급함으로써 무의식적으로 "보수파"의 반격을 초래한 점에 대해 이른바 더 열광적인 내 동료들 가운데 몇 사람(위에 나열한 저자들 가운데 에바 야블론카를 비롯한)을 여러 번 책망했다.

 

그것은 그렇다치고, 이전에 나는 충분히 여러 번 내 논변을 펼쳤고, 또한 나는 조류가 우리 쪽으로 움직이는 것을 보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네이처>> 논평들에 끼어들어 말하지 않았다. 왜 귀찮게 그러겠는가. 예를 들면, 최근에 내가 미합중국 전역에 걸쳐 대학원생 집단들에 의해 거의 예외 없이 이런 쟁점들에 관한 강연을 해 달라는 초청을 받았지만, 나이 든 동료들의 경우에는 드물다는 점을 알게 되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고, 즐겁기도 하며 으쓱하게도 하는 일이다. (나는 플랑크가 약간 가혹하지만 다음과 같은 유명한 발언을 했을 때 그가 옳았다고 생각한다. "새로운 과학적 진리는 반대자들을 납득시켜 빛을 보게 함으로써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결국 반대자들이 죽고, 그것에 친숙한 새로운 세대가 성장하기 때문에 승리한다.")

 

그렇다면 나는 왜 이 에세이를 쓰고 있는가? 내 친구 션 캐럴(Sean Carroll)(진화발생생물학자가 아니라 우주론자)이 <<네이처>> 기사에 관해 논평하면서 잘못된 쪽의 편을 들었기 때문이다! 내가 놀란 까닭은 일반적으로 션은 공정하고 편견이 없으며, 자기 분야와는 메우 먼 분야들에 관해서는 거의 논평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그가 에세이를 발표하기 전에 내게 확인할 생각이 들지 않았었다는 사실에 약간 분개했다는 것도 인정해야 한다(그것은 오만이 아니라, 나는 흔히 양자역학이나 우주론―알다시피, 그것들은 내 분야가 아니기 때문에―에 관한 글을 쓸 때마다 그에게 확인한다는 것일 뿐이다).

 

그것은 그렇다치고, 나는 션이 잘못된 지점에서 시작한 다음에 상황을 확대하여 더 넓은 그림을 탐구함으로써 그 논쟁을 적절한 맥락에서 볼 수 있게 만들 것이다.

 

논평을 시작할 무렵에 션은 이렇게 말한다. "여기서 나는 완전한 초심자이고, 그래서 내 의견은 거의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그러나 양쪽의 논변들을 읽고 난 후에 나는 이 점에 관해서는 점진주의자들의 편으로 기운다." 최소한 그가 그런 입장을 취한 근거 가운데 일부는 "찬성" 진영이 반대자들에게 인신 공격을 감행했다는 인상에서 비롯된 듯 보이는데, 그것에 대한 일례는 다음과 같다.

 

"너무나 흔히 중요한 논의들은 혼란 또는 잘못된 표현에 대한 비난들이 오고가는 신랄함으로 빠져들게 된다. 아마도 지적 설계라는 유령에 사로잡혀 있는 진화생물학자들은 과학에 적대적인 자들에게 통일된 전선을 보여주고 싶어한다. 국외자들―생리학자 또는 발생생물학자들 같은―이 자신들의 분야로 몰려오면 자신들이 연구비 지원과 인정을 덜 받게 될 것이라고 걱정하는 진화생물학자들도 있을 것이다."

 

나는 이것이 인신 공격성 발언으로 거의 들리지 않는다는 점을 시인해야 한다(그리고 나는 확실히 편견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달갑지 않더라도 논쟁의 근저에 놓여 있는 사회학과 심리학에 대한 합당한 분석이다. 진화생물학자들이 지적 설계라는 유령으로 괴로워하는 것은 명확한 사실이다. NSF의 연구비 지원 승인의 현재 수준이 6%에 불과할 정도로 낮아서 그것 또한 전적으로 의문의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나는 연구비 지원에 관한 문제에 대해서는 그렇게 확신하지 않는다.

 

게다가, 션은 이것을 알지 못했었을 수도 있지만, 반대 편도 상당히 거친 논평에 관여했다. 예를 들면, 2008년에 내 동료 제리 코인(Jerry Coyne)이 <<네이처>>에 말한 것이 있는데, 비엔나에서 내가 조직한 확장된 진화적 종합에 관한 학술회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논평하였다.

 

"자연선택과 관련된 전체가 불완전한 패러다임이라는 것은 대단히 도가 지나친 듯 보인다. 진화에 대한 우리의 견해를 바꿀 흥미로운 새로운 것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그렇지만 현대적 종합이 불완전하다거나 심각한 결함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어리석다. ... 창조론자들을 달래기 위해서가 아니라, 신다윈주의가 어떤 종류의 위기 지점에 이르렀다고 시사하는 것은 창조론자들에게 이롭게 행동하는 것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차이점들을 억눌러야 한다."

 

과학적 논쟁들은 과학에 관련되어 있을 뿐이고, 개성, 사회적 충성, 그리고 물론 돈은 그런 논쟁들에 아무 중요한 역활도 수행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약간 소박하며, 그리고 나는 션이 자신의 글을 다음과 같이 끝맺었을 때 농담을 하고 있었다고 여긴다. "운이 좋게도 물리학자들은 결코 이와 같지 않다! 순수한 이성과 순전한 합리성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것은 힘든 일이지만, 누군가가 그렇게 하기 시작했다."

 

이제 실제 과학적 논쟁의 대상으로 되돌아가자. 이것을 하기 위해 나는 진화론의 역사에 대한 매우 간단한 개요을 제공해야 할 것이다. 이어지는 내 글은 참고 읽을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잘 알려져 있듯이, 이 모든 것은 1858년 린네 학회의 모임에서 찰스 다윈(Charles Darwin)과 알프레드 러셀 윌리스(Alfred Russel Wallace)가 진화와 자연선택에 관한 공동 논문을 발표한 것에서 시작되었다. 그 논문이 발표된 바로 다음 해에 다윈은 급히 <<종의 기원(On the Origin of Species)>>을 출판했는데, 그 책이 베스트셀러가 됨으로써 월리스 본인의 기여는 빠르게 가려지게 되었다.

 

다윈 이론의 기반을 이루는 두 개의 기초적 개념은 공통 유래와 자연선택이다. 그 관념은 모든 생물 유기체들은 서로 관련되어 있고, 시간의 경과에 따른 다양화를 설명하는 주요한(결정적으로 유일한 것은 아닐지라도) 메커니즘은 자연선택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자연선택은 적응, 즉 유기체적 특질과 관련 유기체들이 살아가는 환경 사이의 기능적 조화의 원인이 되는 메커니즘이다.

 

신다윈주의로 알려지게 된(그리고 지금까지 그 분야의 실무자들조차도 더 나중의 현대적 종합과 혼동하는!), 최초의 다윈주의에 대한 첫 번째 주요한 개선은 발생생물학자 아우구스트 바이스만(August Weismann)과 더불어 월리스 본인에 의해 이루어졌다. 알다시피, 문제는 다윈이 유전 메커니즘을 파악하지 못했다는 것이다(그는 몰랐지만, 다윈이 살아서 잘 지내던 1866년에 멘델이 콩 식물에 대한 연구 결과를 발표했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그래서 다윈은 라마르크주의(획득 형질의 유전)를 약간 집적거렸으며, 심지어 자신의 설익은 혼합 유전 이론을 제시했다. 월리스와 바이스만은 라마르크주의적 낙인을 단박에 제거하려고 노력하였는데, 그들은 체세포주(비생식적인)와 생식세포주 사이의 분리라는 바이스만의 유명한 학설을 통해서 달성했다. 환경이 체세포들의 구성에 영향을 주지만, 이것들은 정보를 새로운 세대들에 넘겨줄 방법이 전혀 없고, 그래서 라마르크주의가 배제되었다. (실제로 상황은 훨씬 더 복잡한데, 예를 들면 식물과 수많은 다른 유기체들이 바이스만의 학설을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 원래 판본의 진화론에 대한 두 번째 개선, 즉 현대적 종합(MS)이 이어진다. 현대적 종합은 사실상 두 개의 주요한 단계로 나뉘는데, 첫 단계는 대충 1918년에서 1930년대 초까지 전개되었으며, 나머지 단계는 1930년대 말에서 1950년대 초에 걸쳐 이루어졌다.

 

상당히 단순화하면, 20세기로 전환될 무렵에 신다윈주의 이론은 곤란한 상황에 처했고, 그래서 대체로 과학사가들은 그 시기를 "다윈의 쇠퇴"라고 부른다. 역설적으로, 그 문제는 멘델의 연구 결과를 재발견함으로써 부분적으로 초래되었는데, 처음에 그 결과는 다윈의 통찰을 보완하는 데 필요한 유전 이론이 아니라, 오히려 진화론 체계에 위협이 되는 것으로 해석되었다. 그런 이유 때문에 다윈은 진화적 변화는 항상 점진적이라고(그의 친구이자 옹호자인 토머스 H. 헉슬리에 의한 정반대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역설했었는데, "멘델주의"는 유전 물질이 수많은 이산적인 단위체(물론 그것의 화학적 기초는 여전히 알려져 있지 않았던 유전자)로서 유전되는 것을 보여주는 듯 보였다. 게다가 초기 유전학자들은 돌연변이, 특히 초파리에서 나타나는 돌연변이에 관해 연구하기 시작했었는데, 모든 알려진 돌연변이는 표현형의 급진적인 변화를 생성하는 듯 보였기 때문에, 즉 점진주의라는 관념과 충돌하는 듯 보였기 때문에 다윈에게 돌연변이는 더 많은 문제를 초래하는 듯 보였다. 고생물학자들(그들은 화석 기록에서 장기적 추세를 관찰했는데, 그 추세는 환경 변화의 변덕스러운 부침에 독립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에 의한 다윈주의적 관념들에 대한 저항과 더불어 멘델주의와 돌연변이주의의 결합은 과학자들이 신다윈주의에 치명타를 가하기 직전에 있다는 느낌을 널리 퍼뜨렸다.

 

뛰어난 수리생물학자들의 소집단이 구출하게 되는데, 주요 인물은 로널드 피셔(Ronald Fisher)였고 J.B.S. 홀데인(Haldane)과 시웰 라이트(Sewall Wright)가 뒤를 이었다. 멘델주의, 돌연변이주의 그리고 (신)다윈주의 사이의 화해(즉, "종합")가 이루어진 것은 거의 단독으로 피셔 덕분인데, 그는 표현형적 형질이 비교적 많은 수의 유전자의 영향을 받는다고 가정함으로써 그런 유전자들(그리고 그것들과 환경과의 상호작용들)의 통계적 효과가 바로 다윈이 자연선택이 작동할 수 있게 할 것이라고 생각한 그런 종류의 연속적인 형질 분포를 만들어낸다는 것을 증명했다. 사실상 피셔는 다윈의 통찰을 수학적 형식으로 표현했으며, 오늘날에도 여전히 집단유전학의 기본적인 관념인 것, 즉 자연선택의 근본 정리(Fundamental Theorem of Natural Selection)에 이르렀다.

 

현대적 종합의 두 번째이자 마찬가지로 중요한 단계는 더 다양한 생물학자 집단에 의해 초래되는데, 그들 가운데 가장 저명한 사람들은 테오도시우스 도브잔스키(Theodosius Dobzhansky), 줄리안 헉슬리(Julian Huxley), 에른스트 마이어(Ernst Mayer), 조지 G. 심슨(George G. Simpson) 그리고 G. 레드야드 스테빈스(G. Ledyard Stebbins)이다. 사실상 "현대적 종합"이라는 술어를 만들어낸 사람은 헉슬리(토머스 헉슬리의 손자)였다.

 

현대적 종합의 2단계는 무엇으로 이루어졌는가? 집단유전학(도브잔스키), 자연사(마이어), 고생물학(심슨) 그리고 식물학(스테빈스)에 대한 신다윈주의적 형식으로 주조된 통계 유전학의 새로운 원리들의 적용으로 이루어졌다. 그것은 그 당시에 적절하게도 진화에 대한 다윈-피셔 이론으로 부를 수 있었던 것의 범위를 생물학의 다양한(그렇지만 결정적으로 전부는 아니다) 다른 영역들로 확대했다는 의미에서 일종의 종합이었다.

 

현대적 종합은 오늘날 대체로 학부와 대학원 교과서들에서 배우게 되는 것으로서 생명과학의 표준 모형을 나타낸다. 그런데, 물리학의 표준 모형이 불완전한 것으로 알려져 있고 (션의 농담에는 실례지만) 그것이 어떻게 그리고 언제 대체될 것인지와 관련하여 물리학자들 사이에서 상당한 논란이 벌어져 왔던 것과 꼭 마찬가지로, 현대적 종합 역시 점점 더 심각한 스트레스를 받게 되었는데, 그 시기는 1960년대와 197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1990년대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훨씬 더 강하게 받고 있다.

 

"반대" 진영에 의해 "모든 것이 괜찮다"는 단언에도 불구하고, 스트레스는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주요한 논점들을 간략하게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 발생생물학은 현대적 종합에서 고려되지 않은 것으로 유명했고, 그래서 그것을 포함하여 고려할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하고자 한 체계적인 시도들 덕분에 전적으로 새로운 연구 분야, 즉 통상적으로 "이보디보(evo-devo)"로 알려져 있는 분야가 발달하게 되었는데, 이보디보는 자체의 의제와 원리들을 전개해왔다.

 

● 생태학 역시 현대적 종합에서 주변부적인 것에 불과했고, 그래서 적소 구성 이론(niche construction theory) 같은 최근에 발달된 몇몇 새태학적 원리들은 진화에 대한 우리의 사고방식에서 유기적 위치를 찾아낼 필요가 있다.

 

● 선택이 그저 유기체(다윈) 또는 유전자(현대 집단유전학)의 층위가 아니라 다중의 층위에서 작용할 가능성이 여러 번 제기되었다. "집단 선택"이라는 기표 아래 여러 번 잘못 시작한 후에 이제는 선택과 그것의 작용에 대한 잘 발달된 다중 층위 이론이 존재한다.

 

● 어떤 계보들은 (지질학적으로) 매우 빨리 진화한 다음에 긴 정지 기간 동안 변하지 않은 채 그대로 있다고 주장하는 단속적 평형이라는 엘드리지(Eldredge)와 굴드(Gould)의 관념.

 

● 진화유전체학은 생물학적 종의 유전자적 구성에 관한 테라바이트의 새로운 데이터를 제공했을 뿐 아니라, 조절 유전자 대 구조(살림살이) 유전자의 진화에 대한 새로운 통찰을 제공했으며, 특히 환경을 배경 정보로 간주하면서 단일한 유전자들의 견지에서 생각하기보다는 유전자 연결망들과 그것들이 환경과 갖는 상호작용들의 견지에서 생각할 필요성을 강조했다.

 

● 표현형 가소성(phenotypic plasticity)으로 알려져 있는 광범위한 현상에 대해 많은 연구가 집중되었는데, 그 현상 덕분에 유전체와 환경 사이의 상호작용을 새로운 방식으로 모형화할 수 있게 된다. 가소성은 20세기 초에 발견되었지만, 그 분야는 최근 수십 년 동안에 독자적인 영역을 형성하게 되었을 뿐이다. 많은 저자들이, 특히 메리 제인 웨스트-에버하드(Mary Jane West-Eberhard)가 가소성은 새로운 유형의 진화 메커니즘을 나타낸다고 주장했는데, 최근까지도 대단히 과소평가되었다.

 

● 세 가지 상호연결된 새로운 개념, 즉 진화가능성(evolvability), 강건성(robustness) 그리고 모듈성(modularity)이 제안되었고, 알려진 진화 메커니즘들의 집합을 더 확장하기 위해 경험적으로 탐구되기 시작했다.

 

● 환경 스트레스에 민감한 반응을 나타내고, 알려진 유전자적 유전 체계와 상호작용하며, 최소한 단기적인 진화적 반응들에서 어떤 역할을 담당하기도 하는 한 벌의 후성적(즉, 비유전자적) 유전 체계(명확히 라마르크적 형태는 아니지만)가 존재한다는 증거가 점점 증가하고 있다.

 

● 생물학적 복잡성의 정도는 자연선택과 무관하게 획득될 수 있다. 이것은 "성장과 형태"에 관한 다시 톰프슨(D'Arcy Thompson)의 고전적 연구 이래로 알려져 있었지만, "촉진된 변이(facilitated variation)"라는 이름 아래 이론적으로 정교해졌고 경험적으로 탐구되었다. 이것은 이른바 발생적 제약이 사실상 진화적 변화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는 굴드의 오래된 관념과 관련되어 있지만, 후속적으로 더 강화되었다.

 

● 고생물학자들에게 묻는다면, 거시진화적 현상(즉, 종 층위 이상에서 일어나는 변화)들이 부분적으로 미시진화적 현상(즉, 종 내에서 일어나는 변화)들과 인과적으로 단절되어 있다는 증거가 점점 증가하고 있다. 이것은 청조론자들이 제시하는 허울 좋은 주장들과는 아무 상관도 없으며, 전적으로 종 선택과 집단 층위에서의 특성들과 관련이 있을 뿐이다.

 

빠진 것이 있을 것이지만, 여러분은 감을 잡는다. 그런데, "반대" 진영이 주장하듯이, 앞에서 언급한 모든 것은 현대적 종합이라는 케이크 위에 놓인 체리일 뿐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다른 많은 사람들과 나는 다르다고 말한다. 앞에서 언급한 것은 현대적 종합을 훌쩍 넘어서고 그것이 확실히 함축하지 않는(그렇지만 모순되지 않는) 거대한 일단의 경험적 발견과 이론적 진전을 나타낸다. 이것은 후속적으로 탐구되고, 더 잘 표명되며, 진화론의 일반적 틀에 명시적으로 통합될 필요가 있는 재료인데, 그런 일은 수 년 동안 잘 진행 중이라고 덧붙일 수 있을 것이다.

 

진화생물학에서 확장된 종합에 대한 인식을 추동하는 것의 배후에 놓여 있는 두드러지게 분별 있는 관념은 앞에서 언급한 것이 생명과학에서 신다윈주의와 현대적 종합 사이의 보편적으로 인식된 전환에 의해 나타난 것과 최소한 동일한 정도의 개념적 참신성을 구성하며, 그리고 확실히 최초의 다윈주의와 그 이론에 대한 월리스-바이스만 판본을 분리하는 전환보다는 훨씬 더 큰 정도의 개념적 참신성을 구성한다는 것이다.

 

물론, 결국 그것을 어떻게 부르는지는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표현형 가소성, 진화가능성, 후성유전학, 적소 구성, 촉진된 변이 등은 자리가 잡힐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일반적으로 상이한 판본의 과학적 이론들을 상이한 이름들로 표기하는데, 그것에는 좋은 이유들이 있다. 그것들은 세계에 대한 인간의 이해에 있어서 중요한 진전들을 가리키며, 그리고 물론 그런 진전들이 이루어지게 한 연구뿐 아니라 그런 연구를 수행한 사람들을 인정한다. 분리된 양 진영에서 적대주의에 대한 필요성은 확실히 존재하지 않는데, 우리는 생물학적 후속 연구를 진행하기 위해 모든 연구를 결합할 수 있고 결합해야 한다. 그런데 위에서 언급한 모든 것과 훨씬 더 많은 것을 고려하면, 생물학이 자체 역사의 새로운 단계에 진입하고 있다는 점을 인정하는 것에 대한 이런 완고한 저항을 정당화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지 알기 어렵다. 그것은 매우 흥미로운 단계이며, 감사하게도 곧 오늘날의 대학원생들과 젊은 연구자들이 주도하게 될 단계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