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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 볼: 오늘의 에세이-유전자 망상

 

유전자 망상

The gene delusion

 

―― 필립 볼(Philip Ball)

 

과학에서 비유는 파악하기 어려운 것으로 악명이 높지만, 특히 생물학자들은 생물학적 비유가 함축하는 바에 서툴게 대응하는 듯 보인다. "무엇에 대한 유전자"라는 오도된 그림에 대한 집착은 그들의 유산들 가운데 하나이다.

 

번개에 맞는 것은 순전한 불운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몇몇 사람들은 번개에 맞는(SBL, struck-by-lightning) 유전자에 시달린다. 확실히, 다양한 유전자적 조건의 경우와 꼭 마찬가지로, 누군가가 SBL 유전자를 지니고 있다면 그것이 곧 그 사람이 번개에 맞을 것이라는 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유전자가 없는 사람들보다 번개에 맞을 확률이 더 높다(예컨태 대략 서너 배)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그런데 내게 그것은 꽤 큰 위험 인자인 듯 보이며, 그리고 나는 그 유전자를 지녔기 때문에 알아야만 한다.

 

그런데 아무도 유전자 치료에 관해 연구하고 있지 않다. 언어도단인가? 정말로 그렇지 않은데, SBL은 배아를 남성으로 발달하게 만드는 Y 염색체의 성 결정 유전자, 즉 SRY로 더 잘 알려진 유전자로 판별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남성이 더 자주 번개에 맞는데, 그것은 그들의 행동―비가 오는 날 골프장과 축구장에서 뛰어다니기―으로 인해 번개에 맞을 확률을 더 높아지기 때문이다. 그것을 정형화라고 부르자. 통계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유전학자 스티브 존스(Steve Jones)는 이 사례를 사용하여 "무엇에 대한 유전자"라는 개념의 부조리성을 지적했다. SRY가 하는 작용에 관해 그밖의 것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번개에 맞는 것과 관련된 유전자를 찾기 위한 통계적 탐색에서 그것이 드러났다면, 우리는 그것이 SBL 표지를 보장한다는 결론을 내릴 것이다. 그런데 번개에 맞는 것과의 관련성은 특수한 환경에서 그 유전자의 효과가 발현되는 방식의 부산물일 뿐이다. 마찬가지로 SRY는 범죄성, 살인, 대머리, <탑 기어(Top Gear)>를 시청하기에 대한 유전자로 잘못 귀속될 수 있을 것이다.

 

"유전학에서 가장 위험한 낱말은 '무엇에 대한'이라는 낱말"이라고 존스는 말했다. "불과 오십 년 전에 사람들은 암, 심장 질환 또는 당뇨병에 대한 유전자들을 찾아낼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런데 의학의 큰 비밀은 우리가 그것들을 찾아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그것들을 찾아내지 못한 까닭은 그것들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2000년에 미소짓는 과학자들 옆에서 빌 클린턴(Bill Clinton)이 인간 유전체의 해독은 "점차적으로 의사들이 질환의 유전자적 근원을 공격함으로써 알츠하이머 질환, 파킨슨 질환, 당뇨병 그리고 암 같은 질환들을 치료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을 의미한다고 전망하는 것과 비교하자.

 

이것은 널리 소문난 "맞춤형 의학"―현재 수천 달러의 비용으로 해독될 수 있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서 모든 사람의 건강 기록에서 혈액형과 콜레스테롤 수치처럼 일반적인 특징이 될 개인 유전체에 알맞게 처방되는 의료―의 시대에 대해서 무엇을 의미하는가? 대답은 복잡하다. 유전자 데이터는 어떤 의학적 조건에 대한 우리의 고유한 성향에 관해 많은 것을 드러낸다. 그런데 그것이 어떤 중요한 의미에서 우리가 그런 조건에 대한 "유전자"―"근원"에 놓여 있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는 유전자―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반드시 의미하지는 않는다.

 

잘 규정된 개인적 속성에 대한 원인을 유전자에 할당하는 경향은 유전체 이후 의학의 물을 그저 흐리는 것만이 아니다. 그것은 유전학을 둘러싼 공적인 담론과 거의 틀림없이 유전체가 자연선택에 의해 형성되는 방식을 둘러싼 공적인 담론 전체를 왜곡한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를 악명 높은 우생학의 역사에서 유전자들이 인종에 의해 영향을 받는 방식과 관련하여 반복하여 나타나는 지뢰밭까지 어떤 어두운 지역으로 끌고 내려간다. 전직 뉴욕 타임즈 과학 기자 니콜라스 웨이드(Nicholas Wade)가 <<골칫거리 유전: 유전자, 인종 그리고 인류 역사(A Troublesome Inheritance: Genes, Race and Human History)>>에서 표현한 견해들을 둘러싼 격정은 이런 진행 중인 이야기에서 가장 최근의 작은 접전일 뿐이다. 웨이드는 인간 사회들 사이에서 나타나는 사회적 행동과 특징의 차이점들은 유전자적으로 암호화되어 있을 것이라고 넌지시 주장한다. 옛 인류학에서 표현된 것보다는 덜 조악하게 표현되었지만 그런 주장―서구 문화의 지성적 및 경제적 헤게모니는 타고난 생물학적 차이까지 내려간다―은 오래된 주장이다. 과학자들은 동조하여 웨이드의 책을 맹렬히 공격했지만, 그것이 제기하는 논란이 많은 의문들―이른바 지능, 합리성 그리고 사회적 응집에 있어서의 차이들은 인간의 유전자들에 계승되는가?―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사라지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유전자들이 무엇에 대한 것인지와 유전자가 수행하는 작용를 구별짓는 점들에 대처할 때까지는 많은 진척이 없을 것이다.

 

그런 식으로 태어나다

 

현재 유전학자들은 "무엇에 대한 유전자"의 발견을 공표하는 나쁜 저널리즘에 이를 간다. 그런데 이런 어구에 대한 유죄 책임은 연구 공동체 자체에 놓여 있다. 생물학자들의 문헌 또는 발표문에서 "무엇에 대한 유전자"에 대한 암시적 언급 및 명시적 언급들을 찾아내기는 어렵지 않다. 그것들은 언제나 "게이 유전자"에 대한 유전자 시험이 여성에게 그 유전자를 지니고 있는 아이를 낙태할 기회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DNA 선구자 제임스 왓슨(James Watson)의 주장만큼이나 무분별한 것은 아니다. 그런데 질환에 대한 감수성과 인성 같은 특질들은 반드시 하나 또는 소수의 유전자들에 의해 결정된다는 함축이 그 분야에 널리 퍼져 있다. 예를 들면, 그런 종류의 기능적 자율성이 없다면, 이기적 유전자 같은 관념이 어떻게 정합적일 수 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인간 유전체 계획 동안 이루어진 청사진, 즉 부분들과 지침들의 목록에 대한 언급들은 동일한 인상을 낳았다.

 

이런 습관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는 알 수 있다. 현대 유전학이 등장하면서 초파리, 쥐 그리고 다른 실험실 동물들에서 유전자들을 변이시키고, 덧붙이거나 침묵시킴(이것은 "녹아웃" 실험으로 불린다)으로써 특수한 유전자들의 효과를 조사하는 것이 가능해짐에 따라 연구자들은 한 유기체의 유전체와 전체 유기체의 어떤 특질들에서 어떤 유전자 변이―간략히 나는 부주의한 관행을 좇아서 그냥 "유전자"라고 말할 것이다―의 존재 또는 부재 사이의 명료한 연결 관계들을 찾아내기 시작했다. 만약에 어떤 유전자가 존재할 때는 어떤 특수한 특질이 나타나지만 그것이 부재할 때에는 그런 특질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어떤 의미에서는 그 유전자가 그 특질에 "대한" 유전자라고 추리하는 것은 확실히 유효한가?

 

글쎄,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이른바 유전자 암호화는 특수한 단백질들―생물분자적 기구를 구성하는 효소들과 신체의 단백질 얼개들―을 만들어내기 위한 지침들을 포함한다. 그것들이야말로 유전자들이 정말로 "지향하는" 유일한 것이다. 거미는 "실크에 대한 유전자"를 지니고 있다. 인간은 "유당 락토오스의 소화에 대한 유전자"를 지니고 있다. 이런 유전자들의 돌연변이가 유전 가능한 조건에 대한 원인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유전자 돌연변이로 인한 어떤 특수한 효소의 부족 또는 기능 장애는 신체에 복잡한 연쇄 효과를 초래할 수 있다. 게다가 대부분의 유전자들은 암호화되어 있지 않는데, 그것들은 단백질 생산을 함호화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대신에 다른 유전자들의 활성을 조절하는데, 그 결과 유전자 상호작용들의 복잡한 연결망들이 만들어진다. 인간의 대부분 특질들은 이런 연결망에서 비롯되며, 이것이 "무엇에 대한 유전자" 그림을 흐릿하게 만든다. 가짜 "SBL 유전자"가 보여주듯이, 상관관계로부터 인과관계를 이끌어내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그것은 그저 연결망 내에서 올바른 유전자들을 찾아내는 일의 어려움이 아니다. 몇몇 특질들의 경우에는, 그것들이 유전자적으로 암호화되어 있더라도, 유전자 층위에서 인과적 메커니즘과 설명들을 이야기하는 것이 부적절할 수 있다.

 

사실상 유전자 녹아웃 연구들은 "무엇에 대한 유전자" 그림을 확증하기보다는 그것의 기반을 약화시키는 경향이 있었다. 거듭해서 유전학자들은, 명백히 어떤 유기체의 활력에 필수적인 어떤 특징에 "대한" 유전자를 침묵시킨다면, 그 유기체는 거의 눈도 깜짝 안 하는 듯 보인다는 점을 알아내곤 했다. 이제 우리는, 이것이 최소한 부분적으로는 중복성을 내장하고 있는 유전자 연결망들의 막대한 복잡성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연결망의 일부가 파괴된다면, 런던 지하철 역이 폐쇄되는 경우와 꼭 마찬가지로, 동일한 목적지에 이르는 대체 경로가 존재할 것이다.

 

여기서 공학자들을 놀라게 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그들은 그런 중복성과 안전 장치 메커니즘들이 화학 플랜트이든 컴퓨터이든 간에 복잡한 체계의 강건함의 본질적인 부분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1960년대 이래로 유전자들이 자기조절 연결망에서 작동한다는 점을 알고 있는 유전학자들을 놀라게 했을 필요가 있는 것도 전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1990년대 초에 나는 새로 게재가 결정된 논문이 이것을 행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한 유전자가 이제는 저것도 행하는 것으로 밝혀진 결과를 보여주는 논문으로 숨이 막힐 듯하게 서술되는 <<네이처>>의 수많은 편집 모임들에 참석했다. "무엇에 대한 유전자"라는 언어는 여전히 확고히 남아 있었는데, 그런 유전자들은 다중 작업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 시기에 일어난 "무엇에 대한 유전자"에 관한 가장 악명 높은 일화들 가운데 하나는 미합중국 국립암연구소에 소속된 일단의 유전학자들에 의해 수행된 1993년 연구였는데, 그들은 최고의 저널 <<사이언스>>에 "99.5% 확실하게도 X 염색체의 [특수한] 영역에 남성을 이성애자가 되도록 미리 결정하는 유전자(또는 유전자들)이 존재한다"는 주장을 발표했다. 다시 말해서, 사실상 "게이 유전자"가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유전자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미 그런 착상을 수용할 태세가 되어 있었다. 1970년대 이래로 유전학자들은 이성애 성향에 대한 유전적 기초에 관해 말하고 있었으며, 그리고 1982년에 출판된 <<확장된 표현형(Extended Phenotype)>>이라는 책에서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는 그 가능성을 활용하여("논증을 위해") 어떤 유전자가 상이한 환경에서 상이한 결과를 낳을지도 모르는 방식에 관한 관념을 탐구하였다. 도킨스의 경우에, 이런 환경적 영향은 어떤 특수한 특질 또는 행동에 "대한" 유전자가 존재한다는 관념 전체가 무의미할 것이라는 점이 아니라, 어떤 유전자가 "지향하는" 것과 관련된 우연성을 인식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줄 뿐이다.

 

유전자가 수행하는 일에 대한 신흥 견해에 있어서의 이런 복잡성은 인간 유전체 계획의 완수가 막 발표될 시점인 1999년에 출판된 매트 리들리(Matt Ridley)의 책 <<게놈(Genome)>>에서 효과적으로, 그리고 아마도 우연히 포착된다. 리들리는 23개의 인간 염색체들 각각과 관련된 유전 가능한 특질들에 대한 작은 초상을 제공한다. 리들리는 헌팅턴 무도병과 연관된 유전자가 어떻게 철저히 조사되는지에 대한 자신만만한 서술로 시작했다. 여기에는 확실히 "무엇에 대한 유전자"가 존재하는데, 불행하게도 특수한 돌연변이를 지니고 있지 않다면 그 병이 발현될 것이다.

 

그런데 그 다음에 리들리는 천식, 지능, 동성애 성향 그리고 "새로움 추구"를 다루기 시작한다. 모든 것이 물려받은 성분을 지니고 있는 듯 보인다. "1980년대 말에 자신만만하게 '천식 유전자'를 추구한 다양한 과학자 집단들이 있었다"고 리들리는 적고 있다. 1998년 경에 그들은 하나가 아니라 열 다섯 개의 유전자를 찾아내었다. 오늘날에는 수백 개의 유전자들이 관련되어 있을 것이라고 인정하는 연구자들이 있다. 나머지 경우에는 아직 판단하기 이르다고 리들리는 시인했다. 그런데 더 이상 그렇지 않다. 오늘날, 그가 지능, 동성애 성향 그리고 새로움 추구와 관련하여 언급했던 모든 후보자 "유전자"는 배제되어 버렸다. 이것은 기묘하지 않은가? 과학 작가(이례적으로 정통한) 리들리는 복잡한 개인적 특질에 "대한" 특정 유전자 탐색은 헛된 노력이라고 선언하면서도 여전히 그런 것들을 찾아내려는 유전학자들의 노력에 관해 보고할 수 밖에 없었으니 말이다.

 

지능 시험

 

지능에 대한 유전자들에 관해 리들리는, 1998년에 지능지수와 IGF2R이라고 하는 유전자 사이의 연관성을 보고한 로버트 플로민(Robert Plomin)의 연구을 언급했다. 그 유전자가 매우 일상적이고 평범한 세포 기능을 담당하고 있는 단백질을 암호하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는 사실은 그 연결 관계가 기껏해야 간접적이라는 단서를 제공했었을 것이다. 이전에 그 유전자가 간암과 관련지어 졌었다는 사실은 또 하나의 단서를 제공했었을 것이다. 그런데 리들리는 여전히 지켜봐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2002년에 우리는 알게 되었다. 플로민과 다른 연구자들은 IGF2R과 지능지수와의 연관성을 재현할 수 없었다고 보고했다(언론은 거의 주목하지 않았다). "그것은 잘 된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고 2008년에 리들리는 말했다.

 

"질환과 유전자 사이의 연결 관계에 대한 증거를 얻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것을 보고할 의무가 있다"고 리들리는 적었다. "그것이 착각인 것으로 판명되더라도 피해는 거의 없다." 결국 그런 것이 과학이 작동하는 방식이 아닌가? 확실히 그렇지만, 단순한 오류와 거짓 단서가 피해를 끼치는지 여부는 그것들이 보고되는 방식에 매우 크게 의존한다. 플로민의 연구 같은 연구들은 동기부여가 잘 되어 있고 가치가 있으며, 그는 스스로 "무엇에 대한 유전자" 그림을 개탄했었다. 그런데 생물학자들이 유전자들이 수행하는 일과 관련하여 존재하는 대단히 오도된 서사를 바로잡는 더 나은 일을 할 수 없다면 이런 연구가 그런 연관성을 피할 것이라는 희망은 거의 없는데, 그런 서사는 그 일을 설명하는 것에 대해 생물학자들이 흔히 나타내는 현실 안주적인 태도에서 번성했다.

 

착각에 불과한 유전자 연관성의 해악을 알고 싶다면, 최근에 마이클 고브(Michael Gove)의 교육 보좌관 도미닉 커밍스(Dominic Cummings)가 제기한, 지능의 물려받은 타고난 측면에 관한 발견 결과(특히 플로민의 연구)가 무시당하고 있다는 주장을 고려하라. 우선, 유전학에 대한 언급 자체가 합리적인 논증을 내팽겨친 듯 보였다. 일부 좌파 인사들은 짜증을 내면서 우생학에 관해 음울하게 투덜거리거나, 또는 일부러 이유를 설명하지 않은 채 그런 생각을 "선동적"이고 무도한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런 이유 때문에 <프로스펙트(Prospect)>에 글을 쓰는 질 부셰(Jill Boucher)가 커밍스의 발언에 대한 "정치적으로 올바른" 공격을 혹평했을 때 일리가 있었다. 그런데 부셰가 아이들은 각자 타고난 능력이 다르다는 점을 부인하거나, 또는 모든 아이를 잠재적인 노벨상 수상자로 간주하는 교육학자나 교사를 지적할 수 없다면, 그는 일종의 허수아비를 세우고 있는 것이다.

 

커밍스의 발언과 관련된 진정한 문제는 그 발언이 우리의 일부 특성을 유전자에 귀속시킨다는 것이 아니라 유전학이 기정 사실―올바른 유전자를 지니고 있지 않다면 거의 아무것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이라는 인상을 주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유전자는 자체 환경과 상호작용하면서 결과를 낳는다는 현재 수용된 합의에 반한다. 지능지수는 흔히 대략 50% 유전 가능한 것으로 인용되지만, 가난한 집안 출신의 아이들의 경우에 유전학과의 연관성은 훨씬 더 약하다. 환경이 좋지 않다면 좋은 유전자도 그렇게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높은 지능지수" 유전자를 판별하기 위한 연구는 고무되어야 한다는 커밍스의 제안과 관련하여 원칙적으로 잘못된 점은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 그가 그런 연구가 이미 찾아낸 것(그리고 때때로 다시 무화된 것)을 조금 더 깊이 살펴보았다면, 커밍스는 그것이 교육 정책에 제시하는 바가 무엇인지 궁금하게 여겼을 것이다. 2012년의 한 연구는 지능과 특정한 유전자 사이의 연관성에 대한 이전의 주장들 대부분이 철저한 조사에 견딜 수 없다는 점을 지적했다. 수행하는 사람들로부터의 고무적인 결과도 거의 없다. 올해 9월에 뉴욕 소재 코넬 대학교의 다니엘 벤자민(Daniel Benjamin)이 이끄는 국제 컨소시엄은 전통적인 조사의 약점들을 극복하는 새로운 통계적 방법을 사용하여 수행한 인지 능력과 관련된 유전자들에 대한 탐색에 관해 보고했다. 그 방법은 그런 추정상의 연관성을 "프록시 표현형"―조사받고 있는 것을 "대리" 할 수 있는 특질―에 대해 대조 검토한다. 이 경우에 인지 실행력에 대한 프록시는 수만 명의 시험 대상자들이 교육에 소요한 햇수였다.

 

이전 연구에서 주장된 지능과 관련된 유전자들에서 단 세 개의 유전자만이 이 조사에서 살아남았다. 더 중요한 점은, 그 세 유전자가 지능지수에서 유전 가능한 차이들 가운데 매우 작은 부분만 설명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우호적인" 유전자 변이들 가운데 세 가지 모두의 사본 두 개를 지니는 축복을 받은 사람은 이런 변이들을 전혀 지니고 있지 않은 사람에 비해 지능지수가 겨우 1.8점 오를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었다. 저자들이 스스로 시인했듯이, 세 개의 유전자 변이들은 "효과 크기가 너무나 작기 때문에 어느 특수한 개인의 실행력을 예측하는 데 유용하지 않다".

 

그렇다면, 매체는 이것들을 "지능지수 유전자"라고 부르지 않도록 자문을 받는 것이 최선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부른 것에 대해 용서할 수 있을 것인데, 매체는 그 논문의 저자들 가운데 한 사람인 하버드 대학교의 유력한 인지과학자 스티븐 핑커(Steven Pinker)의 말을 반복했었을 뿐이기 때문이다. 유전자-지능 연관성에 대한 대부분의 흥미로운 후보자들이 틀렸다는 점과 유전 가능성에 거의 무시할 정도로 기여하지 않는 것은 소수라는 점을 보여주는 연구에 대한 적절한 반응은 확실히 "마침내 그것들이 존재한다"가 아니라 "제기랄, 이것이 존재하는 전부인가?"이다.

 

그런데 물려받은 성분의 나머지는 어디에 있는가? 추정컨대 그것은 미치는 영향이 너무나 미묘하여 현재의 방법으로는 탐지될 수 없는 일단의 유전자들 사이에 자리잡고 있음에 틀림없다. 그런 유전자들은 확실히 다른 생리학적 기능들에 관여할 것이며, 그것들이 지능에 미치는 영향은 대단히 간접적일 것이다. SRY가 번개에 맞는 것에 대한 유전자가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그 어떤 유의미한 견지에서도 그것들은 "지능에 대한 유전자"가 아니다.

 

그래서, 커밍스에게는 실례지만, 이런 종류의 연구가 어떤 아동들은 다른 아동들보다 학습 능력이 뛰어나다는 통상적인 견해에 무엇을 덧붙이는지 분명하지 않다. 무엇 때문에 그것이 모든 아동들이 최선의 능력을 다해서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을 성취하도록 돕는다는 목적을 변경해야 하는지 분명하지 않다. 그런 발견 결과는 개별 학생의 유전적 재능의 강점과 약점에 알맞는 교육이 실행될 것이라는, 원칙적으로는 건전한, 플로민의 희망에 매우 어두운 전망을 제공한다.

 

인종 문제

 

이제 유전학이 폭력 성향이나 사회적 제도의 조직 같은 특질들에서 인종적 차이를 유발한다는 웨이드의 주장을 검토하자. 웨이드의 책이 보여주었듯이, 인종과 유전자에 대한 쟁점은 지금까지 여전히 명확한 목적을 지니고 있다. 한편으로, 무작위적인 개체들 사이의 전체적인 유전자적 변이 가운데 대략 90%는 단일한 대륙―예컨대 아시아―의 인구들에 이미 존재하며, 겨우 10%만이 유럽인, 아프리카인 그리고 아시아인들을 합친 것에서 비롯될 것이다. 이것이 인종이라는 관념을 생물학적으로 무의미하게 만든다고 주장하는 생물학자들이 있다. 그런데 조상은 우리의 유전체에 흔적을 새기는데, 예를 들면, 락토오스 과민증은 아프리카와 아시아에서 더 흔하고, 겸상 적혈구성 빈혈은 아프리카 출신 사람들에서 더 흔하며, 그리고 낭포성 섬유증은 북유럽 백인들에서 더 흔하다. 그런 이유 때문에 의학적 위험 평가와 진단에 대한 대리물로서 인종이라는 개념이 유용하다. 그 밖에, 유전자 변이의 통계적 다발들과 관련된 주장들은 인종에 관한 문화적으로 관행적인 지표들―예컨대, 피부색과 눈 모양―이 유전적으로 결정된다는 사실을 변경하지 않는다.

 

이 문제에 있어서 무엇을 강조할지 그리고 무엇을 무시할지 선택하는 것은 대체로 과학의 문제가 아니라 이데올로기의 문제이다. 그런데 웨이드가 제기하는 것과 같은 주장들은 유전자들이 표현형과 어떻게 관련되는지에 관한 지나치게 단순화된 관념들에서 강점을 끌어낸다. 이 경우에 합당하게 낭포성 섬유증 또는 겸상 적혈구 유전자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인종 집단들 사이에서 발생 빈도가 다르다(발생 조건이 단일한 유전자 돌연변이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고 알려져 있다. 또한 우리는 점진적이지만 유전자 변이가 지리적으로 균일하지 않다는 점을 알고 있다. 예컨대, 그런 변이들이 지능에 대한 유전자를 포함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런데 그런 특질들의 유전자적 구성이 정말로 그렇게 분산되어 있다면, 이것은 어떤 거대한 더미에서 백 개의 스크래블 패를 거머쥐고서 그것들이 이 문장을 이룰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과 약간 비슷하다. 아, 그런데 그런 무작위적인 패들은 자연선택에 의해 유의미한 배치들로 걸러진다고 웨이드는 주장하는데, 자본주의나 종족주의에 대한 경향을 만들어내는 유전자들은 어떤 인구들에서는 다른 인구들에서보다 더 유용할 것이다. 우선 그런 특수한 유전자들이 존재하는 것의 불가능성을 무시하면 이 관념은 유전 가능한 모든 특질은 선택될 수 있다는 가정에 의존하게 되는데, 그것은 그런 특질에 "대한" 유전자들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과거에 인류의 개선을 위한 우생학적 주장들―범죄성, 어리석음, 부정직성에 대한 유전자들을 제거할 수 있다―을 뒷받침한 오류이다.

 

웨이드의 테제가 과학자들과 다른 정통한 논평가들에 의해 포괄적으로 해체되는 것을 바라보는 것은 우리를 안심시켰지만, 그들의 반응을 모든 인종은 "대등한 이성 능력"을 공유하고 있다는 관념은 망상이라는 2007년의 제임스 왓슨의 주장에 대한 반응과 대조하지 않기가 어렵다. 왓슨이 "흑인 고용인들을 다루어야 하는 사람들"의 경험이라고 주장되는 것만을 "증거"로 인용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그는 "편협하고 완고한 사상 경찰"에 의한 마녀 사상의 희생자로 옹호받았다. 왓슨의 발언들에서 진정한 편견과 습관적인 진보주의자 사냥을 구분하기가 어렵지만, 여기서 우리가 정말로 보고 있는 것은 왓슨이 확정되는 것을 도왔고 처음에는 이끌었던 인간 유전체 계획의 기반을 이루는 "무엇에 대한 유전자"와 "지침서" 심성의 자연스러운 한 귀결점이다.

 

암흑 유전체

 

유전 가능한 지능의 분산된 "다(多)유전자적" 본성은 최소한 우리가 관심을 갖는 다양한 특질들의 경우에 유전학의 규범일 확률이 높다. 정신분열증과 다발성 경화성 같은 다양한 유전 가능한 의학적 조건에도 거의 마찬가지로 적용될 수 있는데, 천식과 마찬가지로 그것들도 많은, 아마도 심지어 수백 개의 유전자들의 작용에서 비롯되는 듯 보이고, 그래서 주범으로 판별될 수 있는 하나의 유전자, 또는 심지어 소수의 유전자들이 존재하지 않는다. 때때로 유전체의 "암흑 물질"이라고 불리는 이런 "잃어버린 유전 가능성"은 유전체 이후 시대의 약속된 맞춤형 의학에 대한 가장 큰 난제들 가운데 하나이다. 그런데 또한 그것은 유전학 자체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 "무엇에 대한 유전자" 그림에 대한 더 나쁜 오해들을 무효화하는 일과 관련하여 왕성한 활동을 펼친 존스는, 유전학 분야가 대단히 복잡해졌기 때문에 이제 그는 자신의 뛰어난 책 <<유전자 언어(The Language of the Genes)>>(1994)와 비슷한 방식으로 유전학이 실제로 어떻게 작동하는지 설명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라고 시인한다.

 

그런데 더 진지하게 고려되기만 한다면, 언어학적 유추―낱말로서의 유전자와 책으로서의 유전체―는 여전히 유용한 것일 것이다. 많은(전부는 아닌) 복잡한 특질들에 대한 유전자들을 찾아서 유전체를 자세히 조사하는 것은 햄릿의 우유부단함이 나타나는 낱말들을 찾기 위해 <<햄릿>>을 분석하는 것과 약간 비슷한 듯 보인다. 확실히, "사느냐 죽느냐(To be or not to be)"라는 구절에 많은 것이 달려 있지만, 그것을 삭제하더라도 그의 망설임은 지속된다. 한편으로, "to"라는 낱말은 그 연극에서 다른 많은 작용을 하고, 그래서 그것은 그 어떤 유의미한 측면에서도 "우유부단한 햄릿"이라는 낱말이 아니다.

 

아이러니는, 가장 최근의 "지능지수 유전자"를 보고한 것과 같은 연구는 "무엇에 대한 유전자" 그림의 부적절성을 여전히 다시 보여주지만 그것을 영속화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다. 존스가 지적했듯이, 그런 연구는 흔히 더 중요한 사회경제적 원인들―이것과 관련하여 우리는 많은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로부터 우리의 관심을 멀어지게 하면서 교육적 성취에 있어서의 차별 또는 차이 같은 사회적 문제들을 초래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유전자적 근거―이것과 관련하여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에 대한 인간들의 매혹을 부추기는 불행한 부작용을 낳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