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레비 브라이언트: 오늘의 에세이-차이 존재론을 향하여, 1부

 

차이 존재론을 향하여, 1부

Notes Towards a Difference ontology: Part 1

 

―― 레비 브라이언트(Levi Bryant)

 

존재한다는 것은 다르다는 것이다. 우리는 언어에 매혹당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우리는 존재(being)와 생성(becoming)을 구별하기를 바랄 것인데, 존재는 변하지 않는 것으로 간주하고 생성은 변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그런데 "존재"라는 술어와 관련된 그 어느 것도 정지 상태를 함축하지 않는다. 존재는 현존(existence)을 나타내고, 그래서 아마도 수학적 존재자들처럼 생성되지 않는 그런 존재자들을 제외한 모든 현존하는 존재자들은 생성된다. 대체로 현존은 퓌시스(phusis)이다. 여기서 퓌시스라는 개념은 데모크리토스와 현대의 물리과학 및 생물과학에서 비롯되는 유물론적 전통에 비추어 재고되어야 할지라도 말이다. 우리는 생기론의 활력설을 피해야 한다. 생성을 지지한다는 이유로 존재론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특히 짜증나는 까닭은 그들은 자신들이 존재 또는 현존의 본성에 관한 존재론적 주장을 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존재는 다양한 방식으로 다르다. 여기서 나는 존재는 상대적인 차이에 의해 특징지워진다는 진부한 테제를 제시하고 있지 않다. 그 테제는 사과는 오렌지와 다르다는 것이 아닌데, 이것이 참일지라도 말이다. 그런 테제는 존재자들의 핵심, 그것들의 내부 구성, 존재자라는 것의 본성에 이르지 못할 것이다.

 

존재자들은 구성적으로, 내부적으로 다르다. 우선 존재자들은 어떤 경계을 구성함으로써 차이가 난다. 경우에 따라서, 어떤 존재자를 구성하고 존재자가 존재자로서 현존하는 데 필요한 경계는 피부 또는 눈꺼풀 같은 막이다. 그렇지만 경계가 막일 필요는 없다. 경계는 조작과 힘일 수도 있다. 예를 들면, 도시가 존재자라면 그것은 물론 막을 갖춘 존재자가 아니다. 확실히 지도 위에 선이 존재할 것이지만, 베이트슨이 말하듯이, 지도는 영토가 아니다. 그렇지 않다. 도시의 경계, 즉 도시를 별개의 존재자로서 구성하는 것은 자체의 조작들이다. 이런 조작들은 도시 정부와 기관들의 행정 기능, 도시가 내부와 외부를 분류하는 방식, 시민들이 그 도시에 속하는 것과 속하지 않는 것 사이의 차이를 규정하는 방식 등에 놓여 있다. 도시와 제도는 막 같은 물리적 경계를 갖추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부와 외부, 속하는 것과 속하지 않는 것, 내부에서 비롯되는 것과 외부에서 비롯되는 것을 분류하는 활동과 조작에 관여한다.

 

그렇다면 경계가 존재자를 구성하는 최초의 차이이다. <<논리학>>의 서두에서 헤겔이 지적하듯이, 경계는 존재자의 가능성을 위한 필요 조건인 동시에 존재자에 속하기도 하고 속하지도 않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역설적인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경계는 자기이자 타자이다. 그렇다면 이것이 존재자의 두 번째 변별적 특징이다. 자체 경계 내에서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존재자는 외부와 내부를 변별하는데, 외부를 몰아내는 동시에 내부 또는 내면을 만들어낸다. 존재자는 환경 또는 주변 영역과는 별개로, 다른 존재들과 별개로 존재하면서 주변 영역을 외부화하는 내부 영역으로서 분별된다. 그것은 마치 존재자들이 세계 내에서 이루어지는 접힘과 같은 것처럼 보이는데, 현존의 연속적인 표면을 취하는 역동적인 종이접기를 수행하고 주름을 만들어서 내부의 장을 구성한다.

 

존재자가 자체의 독립성을 구성하는 것, 존재자가 자체를 하나의 "객체"로 형성하는 것―그리고 여기에는 지향성이 전혀 존재하지 않기 않기 때문에 여기서 나는 은유적으로 말하고 있다―은 바로 이런 조작들을 통해서이다. 그런데 이 독립성은 기묘한 종류의 독립성이다. 과거에 나는 객체는 자체가 맺는 관계들에 독립적이라고 주장했다. 오늘 나는 이 견해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다. 물론 존재자는 항상 다양한 관계들과 단절할 수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생태계는 매우 취약하다. 자체를 접을 때―또 다시 은유―존재자는 독립된 영역, 즉 비(非)관계를 구성한다. 그런데 그것은 기묘한 비관계이다. 자체를 변별할 때, 외부를 몰아낼 때, 내부 영역을 형성할 때, 비관계를 만들어낼 때, 사실상 존재자는 관계를 맺기 때문이다. 비관계는 관계, 즉 세계에 대한 개방성이다.

 

경계 구성은 일회성 행위가 아니다. 모든 존재자는 운동, 과정, 진행 중인 활동이며, 그리고 이런 이유 때문에 단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 게다가 이것은 존재자가 자체 내에 차이를 생성하는 또 하나의 방식이다. 과정들은 명멸하고, 끊임없이 다르며, 끊임없이 변화한다. 존재자가 먼저 경계를 구성하고, 그것이 이루어진 다음에 다른 것들에 착수할 수 있다는 것은 맞지 않다. 경계는 매 순간 거듭해서 재생산되어야 하고 결코 단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 경계는 끊임없이 붕괴될 위험이 있는데, 그 시점에 존재자는 그것이 접히게 된 연속체 또는 장 또는 판으로 다시 용해된다. 경계는 결코 끝나지 않는다.

 

독립성과 내부성의 영역을 이룩함에도 불구하고, 존재자가 진공 포장되어 있거나 물러서 있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확실히 경계는 하나의 벽, 차이나기, 거리두기, 타자화이다. 그렇지만 또한 경계는 하나의 체, 계면, 또는 항구이다. 모든 종류의 사물들이 경계를 가로질러서 흐른다. 어떤 존재자들―전부는 아니지만―에서는 모든 종류의 기호 또는 정보가 경계를 가로질러서 통과한다. 일(물리학에서 사용되는 의미에서)을 수행하는 데 사용되는 에너지가 없으면 그 어떤 조작 또는 활동도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에 존재자가 계속 존재하는 데 필요한 에너지의 흐름들도 존재한다. 존재자는 물질로 이루어져 있다거나, 아니면 에너지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하는 것은 거의 중요하지 않은데, 그 둘은 동일하기 때문이다. 경계를 가로지르는 이런 흐름들을 통해서 부분적으로 존재자는 자체의 현재 상태에서 벗어나서 다른 한 상태로 진입함으로써 다르게 된다. 예를 들면, 기호들은 정보를 사용하는 체계의 조직에 있어서 새로운 체계 상태를 초래한다. 이전에 체계는 고요한 상태에 있었지만, 이제는 기호와의 만남을 통해서 모든 것이 혼란에 빠지고 일련의 새로운 인지적 및 정동적 상태들이 구체화되면서 특정한 행위를 요청한다. 존재자는 달라지게 되는데, 즉 이전의 접힘에서 벗어나는 새로운 접힘를 겪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