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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시모 피글리우치: 오늘의 에세이-스토아주의를 권함

 

스토아주의를 권함

Why not Stoicism?

 

―― 마시모 피글리우치(Massimo Pigliucci)

 

스토아주의는 내가 매우 젊었을 때부터 내 마음 속에 남아 있었는데, 처음에는 그것이 고대 로마인들 사이에서 널리 퍼진 철학이었다는 명백히 지역적인 이유, 즉 넓게 해석된 나의 문화적 유산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한편 인도에서는 불교가, 중국에서는 유교가, 그리고 일본에서는 신도가 매우 대중적인 것도 같은 이유에서이다.)

 

그런데 최근에 다양한 이유 때문에 스토아주의가 서서히 나의 인식적 시야의 전면으로 나오게 되었다. 처음에 나는 철학적 상담에 관심을 갖게 되어 전미철학실천협회 강좌를 수강하고, 놀랍도록 성공적이고 즐거운 실천인 것으로 판명되고 있는 것을 시작하는 상황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더욱 더 많은 상담자들을 보면 볼수록, "정신이 온전한 사람들을 위한 치료"에 대한 선호적 접근 방식으로서 나는 고대 그리스 철학, 특히 스토아주의(약간의 미덕 윤리학과 에피쿠로스주의를 갖춘)에 이끌리게 된다.

[...]

한편, 또한 나는 엑시터 대학교가 주관하는  "스토아 주간(Stoic Week)"이라는 연례 행사(그리고 관련된 사회학적 연구)에 관해 듣게 되었다. 그것에 대한 나의 최초 반응은 약간 회의적이었지만, 지금은 트위터 스트림과 블로그의 규칙적인 팔로어가 되었다.

 

그런데 마지막으로―과민하게 들리지 않기를 의도한다―나는 내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기 시작할 필요가 있다. 나는 막 50이 되었고, 그래서 나는 몇 십 년 더 살 것으로 충분히 예상하지만(스토아 철학자들이 말하곤 했듯이, 운명이 허락한다면), 키티움의 제논의 추종자들에 따르면 그러해야 하듯이, 죽음은 항상 내 마음 속에 있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나는 도중에 나의 에우다이모니아 탐구를 개선할 수 있게 하는 동시에 그런 방향으로 나를 도와줄 접근 방식을 탐색하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물론 나는 삶, 우주 그리고 만물에 대한 지침으로서 단일한 철학적 체계에 의존할 수 있다고 생각할 만큼 소박하지는 않다. 또한 나는 고대 스토아주의를 과학적으로 특징지워지는 현대 기술 세계에 그냥 수입하여 그것으로 끝낼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내가 발달시키고자 노력하고 있는 것은 그 주제에 관심 있는 다른 사람들이 얼마 동안 추구해온 것인데, 그것은 가능한 한 원래 관념의 가치의 많은 부분을 유지하지만, 지난 23세기 동안 인류가 획득하고 발견할 수 있었던 최고의 것들을 충분히 이해하는 일종의 신스토아주의(neo-Stoicism)이다. 그것은 진행 중인 기획이지만, 나는 이 글에서 그것의 몇 가지 구성 요소들을 공유하고 싶고, 조만간에 다른 글들도 이어질 것이다.

 

스토아주의의 일반 이론은, 우리는 자신의 삶을 체계적으로 그리고 정합적으로 살 수 있으며, 그리고 사실상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고, 또한 삶은 일단의 이상적인(이루지 못할 가능성도 있지만) 목표 또는 열망들을 겨냥하여 진행되는 기획과 비슷하다는 것이다. 스토아 철학자들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의 목표들이 무엇인지라기보다 오히려 우리가 자신의 목표들을 이루기 위해 취하는 방식이다. 이것은 미덕과 탁월함(그리스어로 아레테)을 추구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스토아 철학자들은 미덕이 인간 삶의 근본적인 질을 표현한다고 생각했으며, 그리고 대부분의 다른 고대 그리스인들과 마찬가지로 네 가지 미덕―용기, 정의, 자기규율, 그리고 지혜―의 존재를 인정했다.

 

스토아 철학자들의 경우에, 인간은 타고난 사회적 존재자이고, 그래서 에우다이모니아적인 좋은 삶은 자기(정신과 육체 둘 다)에서 시작해서 쉽게 그리고 자연스럽게 가족과 친구를 포함하여 확대되는 관심 영역의 발달을 필요로 하는데, 그것은 동료 시민, 인류 전체,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자연 전체로 확대되어야 한다. 스토아 철학자들은 이 개념을 "박애(philanthropy)", 또는 인류애라고 불렀다.

 

대체로 스토아주의는 좋은 감정을 강조하고 부정적 감정을 제어하려고 노력하는 철학이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사랑과 관심의 철학이다. 흥미롭게도, 가장 유명한 허구적 스토아주의자는 스타 트렉의 스폭(Spock)이다. 진 로덴베리(Gene Rodenberry)는 스폭을 스토아적 모형에 기반을 두고 만들어냈다고 말했는데, 그는 또한 "완벽한 사람을 구상하여 그를 세 부분으로 나누었는데, 용감한 관리적 부분은 선장(커크)에게, 논리적 부분은 과학 장교(스폭)에게, 그리고 인간주의적 부분은 의사(맥코이)에게 할당하였다"고 덧붙였지만 말이다.

 

스토아주의의 토대를 이루는 교훈은 우리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우리 자신의 태도와 행위)과 우리가 영향을 미칠 수 없는 것(외부 사건) 사이를 구별짓는 것이다. 그렇다면 행복은 자신이 제어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는 사람이 얻을 수 있다. 이것은 "본성(자연)을 따르는" 일반 관행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데, 스토아 철학자들에게 그것은 나무 껴안기 또는 팔레오 식단 같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성에 대한 인간의 타고난 성향을 발달시키는 것과 무엇이든 일어나는 일은 세계가 작동하는 방식에 부합된다는 점을 수용하는 것을 의미하고, 그래서 그것에 이의를 제기하거나 그것 때문에 분노하게 되는 것은 합당하지 않은 것이다.

 

스토아 학파적 신조는 불합리한 두려움과 욕망의 극복, 고뇌의 부재(아타락시아), 그리고 매끈한 삶의 흐름의 성취를 비롯한 다양한 실천적 목적이 있다. 여기서 유명한 스토아적 유보 조항, 즉 "운명이 허락한다면"이라는 구절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

 

내가 이전에 언급했듯이, 스토아주의는 하나의 완전한 철학적 체계였으며, 대체적으로 실천적 지혜(프로네시스)에 집중했다. 자체적으로 그것은 구별되지만 서로 연결된 세 가지 탐구 영역으로 이루어졌다.

 

윤리학. 이것은 선의 본성과 에우다이모니아적 삶을 성취하는 방법에 관한 연구로 간주되었다.

 

논리학. 이것은 형식 논리학, 변증술(대화술), 그리고 지식론에 관한 연구를 포함했다.

 

자연학. 이것은 오늘날 자연과학이라고 부르는 것과 형이상학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이루어졌다.

 

이것들 각각에 대해서 약간 말할 것인데, 특히 통찰력이 있는 원래의 정신에 여전히 가까이 있으려고 하면서 스토아주의를 갱신하고자 하는 견지에서 말할 것이다.

 

윤리학에 대한 스토아 학파적 관념은 물론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주류 관념이었고, 근대 철학에서 그 술어가 의미하는 것과 상당히 다르다. 그렇지만 나는 이것에 대해서 고대인들이 옳았다(또는 더 나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윤리학을 무엇을 행하는 것이 올바른지(또는 그른지) 파악하는 일로 간주하는 반면에, 고대 그리스-로마인들은 그것을 우리가 의미 있는 삶을 영위해야 하는 방법에 관한 지침에 대한 탐구로 이해했으며, 그리고 그들에게 이것은 도덕적인 사람이 되는 것, 미덕을 계발하는 것, 그리고 탁월함을 추구하는 것과 절대적으로 결합되어 있었다. 후자는 약간 엘리트주의적인 듯 보이며, 그리스 세계에서는 부분적으로 그러했지만, 또한 그것은 자신이 능숙한 것 또는 성향적으로 끌리는 것에 최선을 다하고자 노력하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음악, 철학, 스포츠를 좋아하는가? 그렇다면 가능한 한 최고의 음악가, 철학자 또는 운동 선수가 되려고 노력하라. 그렇지만 최고의 집단 학살자 또는 독재자가 되는 것은 선택지가 아닌데, 그것은 유덕한 도덕적 삶이 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논리학―그들은 이것을 현대 분과학문보다 훨씬 더 넓게 이해했다―에 대해서 스토아 철학자들은 인류를 규정하는 특질은 이성이며, 그리고 이성(그런데 가장 명확하게 감정에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파괴적 감정에만 대립되는 것으로 간주된다)만이 우리를 에우다이모니아적 행로로 데려다준다고 믿었기 때문에 논리학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그것 자체로 지식론을 발달시키는 것뿐 아니라 논리학을 공부하고 실천하는 것이 중요해진다. 공교롭게도 스토아 철학자들은 이것에 매우 성공적이었다.

 

사실상, 솔로이의 크리시포스 같은 스토아 철학자들은 일종의 진리에 관한 축소적 견해를 승인한 듯 보이며, 그리고 특히 "말할 수 있는 것(sayable)", 즉 우리가 생각하는 모든 것의 의미의 근저에 놓여 있는 것에 관심을 가졌다. 말할 수 있는 것의 한 부분집합은 진리값으로 규정되는, 이른바 언명할 수 있는 것(assertible)들로 구성된다. 그 다음에 언명할 수 있는 것은 연역 체계의 가장 작은 표현이고, 그래서 논리학에 그것들을 포함하는 것은 논증이 언명할 수 있는 것들로 이루어지는 명제 논리학의 체계를 낳는다. 또한 스토아 철학자들은 삼단논법 체계를 발달시켰고, 그래서 그들은 모든 타당한 논증들이 삼단논법인 것은 아니라는 점을 인식했다. 그런데 그들의 삼단논법적 추론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그것과 다르며, 현대의 적실성 논리학과 공유하는 점들이 더 많다. 그리스 논리학의 이런 두 전통, 즉 이른바 "소요 학파"(즉, 대체로 아리스토텔레스적인)와 스토아 학파는 2세기에 갈레노스에 의해서 결합되었는데, 그는 최초로(그리고 대체로 불완전하게) 그것들을 종합하려고 시도했다. 갈레노스 이후에 스토아 학파 논리학은 6세기 경까지 거의 대부분 시야에서 사라졌으며, 마침내 20세기 동안에 명제 논리학에 대한 관심의 회복 덕분에 또 다시 등장했다.

 

형이상학의 경우에는 어떠한가? 일견, 스토아 학파 형이상학은 완전히 낡은 듯 보인다. 인류의 아버지로서로서의 제우스에 대한 이야기에 너무 많이 주목하지 말아야 하더라도, 스토아 철학은 신학, 또는 자연에서 목적인이 작동한다는 관념에 경사되어 있다는 것은 명확하다.

 

스토아 철학자들은 로고스, 또는 운명, 또는 보편적 이성이라고 부르는 것의 존재를 믿었다. <<신들의 본성에 관하여>>에서 키케로에 의해 인용된 크리시포스의 말은 이렇다.

 

"우주 자체가 신이고 자체 영혼의 유출이다. 그것은 사물들의 공통 본성과 모든 존재를 포섭하는 전체와 더불어 마음과 이성에서 작동하는 이 동일한 세계의 지도 원리이다. 게다가 미래의 미리 정해진 힘과 필연성이다. 게다가 불이고 에테르의 원리이다. 게다가 물, 흙, 그리고 공기처럼 유출과 변천의 상태를 자연적 상태로 갖는 그런 원소들이다. 게다가 태양, 달, 항성들이다. 그리고 만물이 포함된 보편적 존재자이다."

 

그리고 유명한 로마 황제이자 <<명상록>>의 저자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말은 이렇다.

 

"언제나 우주를 하나의 실체와 하나의 영혼을 지닌 살아 있는 한 존재자로 간주하라. 그리고 만물이 하나의 지각, 즉 이 살아 있는 한 존재자의 지각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관찰하라. 그리고 만물이 하나의 움직임에 어떻게 작용하는지 관찰하다. 그리고 만물은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대한 협동적 원인들이다. 또한 끊임없는 실잣기와 그물의 구조를 관찰하라."

 

이제, 잠깐 동안 21세기의 회의적인 세속적 태도를 버리고 이런 관념이 너무나 편한 후험적 합리화를 초래하지 않은 채 현대적 술어로 어떻게 번역될 수 있는지 살펴보자. 사실상, 내가 제시하려고 하는 것은 대단히 명확하게 내가 고대 그리스-로마 사상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현대 과학과 철학을 감안하여 그들의 사유를 합당하게 갱신한 것이다.

 

그래서, 근본적으로, 그리고 매우 조야하게, 불필요한 것을 모두 제거한 형태의 스토아 학파 형이상학은 다음과 같은 관념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a) 우주는 합리적 원리들에 따라 구성되어 있다(로고스).

 

b) 세계는 결정론적 방식으로 작동한다(운명).

 

c) 만물의 근본적인 통일성, 또는 상호연결성이 존재한다.

 

위 관념들의 현대적 번역은, 우주는 논리-수학적 견지에서 이해할 수 있다(a), 우주는 예외 없는 일반 법칙들에 따라 작동한다(b), 그리고, 양자역학적 술어를 사용하면, 우주는 단일한 파동함수로 서술된다(c)고 말할 것이다.

 

물론, 더 사변적으로, 스토아주의는 수학적 플라톤주의 같은 더 강한 존재론적 관념들, 존재자적 구조적 실재론(ontic structural realism) 같은 더 급진적인 형이상학, 그리고 시뮬레이션 가설 같은 대단히 사변적인 철학적 관념들과 양립 가능하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인데, 스키엔티아 살롱의 독자들이 알고 있듯이, 나는 그것들 모두에 대해서 개방된 관심과 결합된 다양한 정도의 회의주의를 견지한다.

 

그건 그렇다 치고, 스토아주의는 대체로 윤리학과 실천적 지혜와 관련되어 있고, 논리학과 "자연학"은 둘 다 스토아 철학자들에 의해 에우다이모니아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 있어서 필수적인 기여 요소들로 간주되었다. 그러므로 나는 내 자신에 대한 실험으로서 가까운 미래에 실천하려고 완전히 마음먹고 있는 스토아 학파의 "정신적" 훈련들(더 나은 술어가 없기에)의 간략한 목록으로 결론을 내릴 것이다.

 

1) 이른 아침 명상. 5-10분 동안 하루를 미리 연습하고, 철학적 격언을 되풀이하며, 특정한 미덕에 집중하라. 가능하면 밖에서 산책하며 이것을 행할 수 있는 조용한 장소를 골라라.

 

2) 이상적인 현인에 대한 사색. 동경하는 사람들의 목록을 작성하고, 모범 현인을 고르며, 특정한 힘든 상황에서 그는 어떻게 행동했을지 자문하라.

 

3) 불필요한 것들을 모두 제거하는 방법. 관련 상황을 염두에 두고, 그것을 가장 기본적인 요소들로 분해하여 그것이 사실상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명료하게 살핌으로써 판단을 가릴 수도 있는 불필요한 세부 사항들을 제거한다. 그 상황의 윤리적 핵심은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을 처리하는 데 어떤 성질(미덕)들이 필요한지 자문한다.

 

4) 자신에게로 침잠하기. 5-10분 동안 방해받지 않을 장소를 찾아라. "우리가 제어할 수 있는 것들이 있고, 제어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와 같은, 집중할 스토아적 격률을 선택하라. 주변 환경을 의식하고 눈을 감아라. 자신의 호흡에 집중하고 격률을 암송하라.

 

5) 동심원들. 눈을 감고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빛의 원을 상상하라. 그 원을 천천히 확대하여 자신의 가족과 친구들, 동료 시민들, 그리고 궁국적으로 인류 전체를 포함하라.

 

6) 위에서 바라보기. 큰 그림, 우주 속에서의 자기 위치를 그려라.

 

7) 철학적 일기. 자신의 삶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총체적인 윤리적 틀과 관련지으려고 노력하면서 윤리적으로 강조된 일기를 작성하라.

 

8) 잠자리에서의 반성. 잠들기 전 5-10분 동안 오늘 하루와 주요 사건들을 되돌아보라. 이런 훈련에 대해서는 일기를 계속 작성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잘못한 일이 무엇인지, 제대로 한 일이 무엇인지, 그리고 빠뜨린 일이 무엇인지 자문하라. 어떻게 더 잘할 수 있었는지 생각하고, 잘한 일에 대해서는 자신을 칭찬하라.

 

내게는 위의 목록이 두드러지게 실제적인 듯 들리며, 대단히 명확하게 신비주의적이지도 않고 "뉴에이지적"이지도 않다. 납득하지 못한다면, 스토아주의가 합리적-정서적 행동 치료(Rational-Emotional Behavior Therapy)뿐 아니라 그것을 계승한 인지적 행동 치료(Cognitive Behavior Therapy)의 창시자인 앨버트 엘리스(Albert Ellis)에게 직접적으로 영감을 불어넣었다는 점을 염두에 두라. 공교롭게도, 후자는 사람들의 행동, 태도, 그리고 정서적 반응들을 수정하는 데 실제로 작동하다는 강한 경험적 증거가 존재하는 소수의 심리치료 형태들 가운데 하나이다.

 

이제 괜찮다면, 나는 잠자리 명상을 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