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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비 브라이언트: 오늘의 에세이-비판 이론의 유형들와 그것들 사이의 긴장

 

비판 이론의 유형들와 그것들 사이의 긴장

Strains of Critical Theory and the Tensions Between Them

 

―― 레비 브라이언트(Levi Bryant)

 

I. "비판적 사고"

 

이론과 철학 분야 내에서 "비판(critique)"이라는 술어는 대단히 모호하며 다양한 상이한 것들을 의미한다. 확실히 이것은 많은 논쟁들의 원천이다. 물론, 많은 주류 교육 기관들이 퍼뜨리는 것을 듣게 되는 "비판적 사고(critical thinking)"라는 안이한 술어가 존재한다. 당연히 이것은 이론가들이 "비판 이론"에 관해 이야기할 때 지칭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사실상, 교육 기관(교회, 가족 그리고 매체와 더불어)을 사회가 자체의 생산 조건을 재생산하는 이데올로기의 주요한 현장들 가운에 하나라고 지칭한 점에 있어서 알튀세르(Althusser)가 옳다면, 비판 이론이 교육 정책을 주재하고 "비판적 사고"를 교육 과정의 주요한 부분으로 할 것을 요청하는 정부 고위 관리들에 의해 따뜻하게 수용될 것 같지 않다. 그들의 의미에 따른 비판적 사고는 그 술어에 대한 알튀세르의 의미에서 이데올로기의 명령에 매우 잘 복무할 것이다.

 

II. 칸트와 이성 비판

 

철학자들 가운데, "비판"이라는 술어를 들을 때 떠오르는 첫번째 철학자는 물론 칸트(Kant)이다. 내가 알기에, 비판 철학이라는 기획을 최초로 명명한 철학자는 칸트였다. 거의 글자 그대로 그 기획의 씨앗은 이미 데카르트와 특히 흄에게서 감지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하지만 말이다. 칸트의 경우에 비판 철학이라는 기획은 우리가 어떤 지식 형식들을 가질 수 있게 하는 조건에 대한 탐구였다. 예를 들면, 널리 알려져 있게도, 칸트는 "선험적 종합 판단(synthetic a priori judgment)이 어떻게 가능한가?"라고 물었다. 주부의 개념 속에 이미 술부가 포함되어 있고―예를 들면, "모든 총각은 결혼하지 않은 남성이다"―그래서 우리의 지식을 확대하거나 증가시키지 못하는 분석 명제와 달리, 선험적 종합 명제는 우리의 사유가 경험에 독립적으로 명제의 주부에 포함되어 있는 것을 넘어서는 것인데, 그래서 우리의 지식을 확대하거나 증가시킨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수학의 경우처럼 마음이 사유를 통해서 지식을 증가시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경험을 통해서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이해하기는 쉽다. 나는 아루굴라를 한 입 먹고, 그것의 시큼한 맛을 느끼며, 이제 아루굴라가 시큼한 맛으로 특징지워진다는 것을 안다. 따라서 아루굴라에 대한 내 지식은 확대된다. 나는 아루굴라에 관한 새로운 것을 알게 되었고, 내 마음은 영원히 아루굴라를 시큼함이라는 성질과 관련시킨다.

 

사유가 사유만을 통해서 지식을 어떻게 확대하거나 확장할 수 있는지―사유가 어떻게 새로운 것을 알아낼 수 있는지―이해하기는 훨씬 더 어렵다. 그런데 칸트는 이것이 바로 물리학의 많은 판단뿐 아니라 대부분의 수학적 판단에서 일어나는 일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지식체들은 분석 판단들(그것들은 그저 정의이기 때문에 선험적인 것과 관련하여 아무 문제도 제기하지 않는다)로만 구성되어 있는 것도 아니고, 경험적인 선험적 종합 판단들(사실상 수학은 무엇이든 경험적 판단을 전혀 포함하고 있지 않은 듯 보인다)로만 구성되어 있는 것도 아니라, 경험이 아니라 사유를 통해서 지식이 확대되는 이런 기묘한 차원의 선험적 종합 판단들이 밀집되어 있다. 오래 전부터 철학은 "아무것도 무에서 비롯될 수 없다"고, 즉 먼저 투입된 정도만큼 무언가로부터 얻을 수 있을 뿐―또는 경험주의자들은 환영술사나 마술사들의 지혜를 좇아서 그러하듯이, 모자에 먼저 토끼를 집어넣지 않은 채 모자에서 토끼를 끄집어낼 수는 없다―이라고 주장했지만, 선험적 종합 명제에서는 사유의 결과로부터 애초의 사유보다 더 많은 것을 얻는 듯 보인다. 그런 일이 어떻게 가능한가? 칸트는 그런 판단이 어떻게 가능한지 결정하기 위해서는 마음의 구조를 탐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것이 그의 비판 개념의 한 가지 핵심 요소가 발견될 수 있는 지점이다. 그래서 이것이 칸트의 비판 개념의 첫번째 차원이다. 우리가 어떻게 그런 판단들을 내릴 수 있는지 알아내기 위한 마음―세계가 아니라―에 대한 반성적 탐구. 여기서 칸트에 대한 데카르트와 흄의 영향이 나타나는데, 두 경우 모두에서 우리는,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와 스피노자주의자들이 행할 것처럼, 세계, 존재에 대한 탐구에 직접 착수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에 대한 주장을 제시하기 전에 세계를 탐색하는 마음의 본성에 관해 먼저 성찰해야 한다(그러므로 '반성적' 분석). 우리는 이른바 거울이 반사하는 것이 아니라 거울 자체를 탐구한다(물론 칸트는 거울로서의 지식이라는 은유를 박살낼 것이지만).

 

여담. 수학에 대한 칸트의 의문은 흔히 인지되는 것보다 훨씬 더 심대하다. 그것은 그저 우리가 어떻게 사유 속에서 수학적 판단을 내릴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이 아니다. 만약에 그렇다면, 우리는 수학과 관련된 규칙 따르기 또는 문법에 대한 이론으로 만족할 수 있을 것이다. 수학과 관련하여 참으로 두드러진 것은 우리가 어떤 규칙들을 따르면 변함없이 어떤 결론들에 이른다(방정식을 풀기 위해 우리가 따르는 단계들은 하나의 논증이다)는 것이 결코 아니라, 물리적 실재 자체가 수학적 구조를 나타낸다는 것이다. 어쨌든 내가 보기에, 이것이 수학은 구성물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람들과 수학은 허구물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놓치는 것이다. 사유는 수학을 통해서 실재의 구조를 예상한다. 예를 들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은 자체의 방정식을 통해서 블랙홀―그 이론 이전에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으며, 초기에는 자연에서 가능할 수 없는 이론의 터무니없는 결과로 일축당한 것―의 가능성을 예상했다. 이런 기괴한 존재자들의 현존은 물론 확인되어야 했지만, 블랙홀은 방정식에 존재하고 있었다. 수학에 대한 칸트의 의문은 사유가 어떻게 경험에 독립적으로 실재의 구조를 예상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으로 똑같이 특징지워질 수 있을 것이다. 칸트의 비판을 논의할 때 때떄로 서술되듯이, "경험의 가능성에 대한 조건은 경험 대상의 가능성에 대한 조건이기도 하다."

 

물론 칸트는 그저 수학과 물리학의 선험적 판단들이 어떻게 가능한지에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결국, 입증 방법들이 분과학문들 자체에 내재하고 그것들이 거둔 성공으로 증명되었기 때문에 이 분과학문들은 다소간 스스로 말하며 철학자에 의한 입증의 필요성이 정말 존재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철학자에게 수학에 대한 입증을 요청하는 것은 계약적 합의에서의 입증에 대한 입증을 요구하는 것과 비슷하다. 계약 자체가 합의를 입증한다(어쨌든 우리는 희망한다). 수학과 물리학과 관련하여 칸트의 관심을 끈 것은 그것들이 형이상학의 가능성을 조명할 수 있는 빛이었다. 형이상학은 선험적 종합 판단들로 밀집되어 있다고 칸트는 주장했다. 왜? 1) 그가 이해한 바에 따르면, 경험을 넘어선 사물들에 대해 탐구하는 한에 있어서 형이상학은 경험에 근거를 두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형이상학적 지식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선험적이어야 한다. 그런데, 2) 형이상학은 단순히 정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선험적 분석 명제들로 구성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대신에 우리 지식을 증가시키거나 확대한다(사실상 형이상학적 지식이 정말 존재한다면 말이다. 이것은 칸트 이후에 대단히 논란이 많은 가정이다). 따라서, 3) 형이상학적 지식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선험적 종합 명제들로 구성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칸트의 논증 구조가 나타난다. 물리학과 수학이 철학자(칸트)에게 흥미로운 까닭은 그것들이 선험적 종합 지식에 대한 논란의 여지가 없는 사례들이기 때문이다. 이 사례들에서 선험적 종합 지식이 어떻게 가능한지 증명할 수 있다면, 형이상학적 지식―논쟁과 갈등으로 갈가리 찢어져 있는(예를 들면, 데카르트, 스피노자 그리고 라이프니츠의 경우에 신에 대한 전적으로 상이한 설명들)―이 어떻게 가능한지 증명하고 이런 논쟁들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또한 우리는 이런 전적으로 상이한 형이상학적 체계들이 어떻게 발생하는지, 이성 속에서 그리고 이성을 통해서 작업하는 사상가들 사이에서 수학과 물리학에서 일어나는 합의 대신에 이런 논쟁들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설명해야 한다고 칸트는 주장한다. 수학과 물리학은 왜 다른가? 여기서 우리는 칸트적 비판의 두번째 차원을 만나게 된다. 비판은 "가능성 문제에 대한 조건", 권리 문제(quid juris)에 대답할 뿐 아니라, 이성의 한계(선험적 종합 명제들을 통해서 이성이 알 수 있는 것의 한계)도 규정해야 한다. 따라서 모두가 선험적 이성을 통해서 지식에 이르렀다고 주장하는 형이상학자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내적으로 모순이 없는 경쟁 체계들은 형이상학자들이 이 한계를 넘어서 선험적으로 알 수 없는 것을 안다고 주장할 때 발생한다고 증명될 것이다. 우리가 그런 한계 내에 머무르고 있는 한, 합의와 지식이 가능하다. 그러므로 칸트적 비판의 두번째 차원은 지식의 한계, 즉 선험적으로 알 수 있는 것과 알 수 없는 것을 구별짓는 선험적 경계를 규정하는 것에 놓여 있다. 이것이 칸트의 배리, 이율배반 그리고 신의 존재에 대한 증명들의 작업이다.

 

그런데 칸트적 비판에 대한 세번째 차원도 존재한다. 내적으로는 모순이 없지만 서로 일치하지 않는 형이상학적 체계들(예를 들면, 데카르트, 스피노자 그리고 라이프니츠)이 어떻게 발생할 수 있는지 결정해야 할 뿐 아니라, 이성이 왜 그렇게 끈덕지게 이성의 경계를 넘어가는 것에 끌리는지, 이성은 왜 그렇게 끈덕지게 알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지식을 추구하는지도 설명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선험적 변증법에 대한 작업(이성의 한계에 대한 칸트의 노작)은 우리가 어떻게 영혼, 전체로서의 세계 또는 신에 대한 지식을 가질 수 없는지 보여주는 부정적인 것일 뿐 아니라 긍정적인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이런 세 가지 대관념들(Ideas)―칸트의 술어로―이 어떻게 경험적 탐구와 도덕에 대해 이성에 내재하는 기능을 수행하는지 보여주는데, 이것들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지식을 항상 증대시키고 체계화하도록(그저 이산적인 백과사전적 지식들을 산출하기보다는) 노력하게 만들고 도덕적 완벽을 향해 분투하게 만든다. 그래서 이런 대관념들이 이런 목적들을 향해 정향되어 있는 한, 이성은 잘 작동한다고 칸트는 주장한다. 사물들이 어긋나고, 내적으로는 모순이 없지만 서로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 둘 다 내적으로 모순이 없는 형이상학적 체계들을 산출하지만, 전적으로 상이한 결론에 이른다) 경쟁하는 형이상학적 체계들 사이에서 결정할 수 없게 되는 형이상학자들의 끝없는 논쟁들이 벌어지는 것은 바로 이성이 초월적인 것을 알려고 노력할 때이다.

 

III. 진정한 의미의 비판 이론: 니체, 프로이트 그리고 마르크스

 

비판 이론에서 칸트가 핵심적으로 중요한 인물이지만, 칸트의 비판 철학은 일반적으로 우리가 "비판 이론"에 관해 말할 때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성의 한계에 대한 서술과 선험적 종합 지식이 가능한 조건이라는 의문에 대한 대답이라기보다, "비판 이론"은 억압적인 사회적 조건으로부터의 해방을 겨냥하는 사회 이론을 가리킨다. 그래서 비판 이론은 최소한 세 가지 차원을 갖는다. 그것은 1) 우리를 억압하는 것에 대한 이론, 2) 우리가 이 족쇄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방법에 대한 이론 그리고 3) 자유로운 소외되지 않은, 또는 억압받지 않는 실존이 어떤 모습일지에 대한 이론을 포함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에피쿠로스, 에픽테토스, 루크레티우스, 스피노자, 돌바크 그리고 루소―물론 다른 사람들도 많이 있다―는 비판 이론의 초기 주자들로 간주될 수 있다. 여기서 나는 이 이론가들 사이에 합의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서둘러 덧붙인다. 이것들은 억압과 해방에 대한 경쟁 이론들이지만, 그럼에도 해방에 대한 이론들이다. 게다가, 이 세 가지 의문들이 최소한의 조건이지만, 모든 비판 이론들이 그 의문들 모두에 대답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대부분의 현대 비판 이론들은 첫번째 의문에 대답하면서 우리를 억압하는 것에 대한 이론을 제시하지만, 우리가 어떻게 스스로를 해방시킬 것인지 또는 소외되지 않은 실존이 어떤 모습일지에 대한 이론은 거의 제공하지 않는다. 그것들이 두번째 의문과 세번째 의문에 대답하지 않는데도 왜 여전히 그것들을 비판 이론이라고 부르는가? 그것들이 억압에 대한 이론을 명시적으로 표명한다는 바로 그 사실이 그것들이 해방에 대한 이론과 소외되지 않은 실존이 어떤 모습일지에 대한 이론을 사실상 포함하고 있다는 점을 함축한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이다.

 

현대 비판 이론들은 니체, 프로이트 그리고 마르크스(리쾨르가 세 명의 의심의 해석학자들이라고 부른 인물들)의 사유에 입각하여 분류될 수 있다. 나는 비판 이론들을 분류하기 위한 불완전한 발견법적 도구로서 이것을 제안할 뿐이다. 분명히 이런 표제어들 가운데 어느 것에도 매끈하게 또는 쉽게 속하지 않는 인물들과 이런 정향들 가운데 두 개 이상에 걸쳐 있는 사상가들(들뢰즈와 가타리, 리오타르 그리고 마르쿠제가 떠오른다)이 존재할 것이다. 분류는 항상 불완전하다. 그런데, 그것이 아무리 불완전할지라도, 어떤 분류 도식의 가치는 그것 덕분에 정향들 사이에 존재하는 긴장을 조명할 수 있게 되고, 그래서 더 나은 비판 이론을 만들어내며 해결할 필요가 있는 문제들에 집중할 수 있게 된다. 무엇보다도, 여기서 내 목적은 이런 다양한 정향들의 장점과 단점을 논의하는 것도 아니고, 정확한 주석을 수행하는 것도 아니다[...].

 

니체, 프로이트 그리고 마르크스는 각각 권력, 욕망 그리고 경제에 대한 비판 이론으로 특징지워질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의 이론들 각각은, 정화된 방식으로 다루어질 때, 사회적 관계들을 구성하는 것에 대한 이론을 제공한다. 예를 들면, 니체(그의 계승자들은 푸코, 부르디에 그리고 버틀러일 것이다)의 경우에는, 사회적 관계들을 구성하는 것은 권력이다. 이런 점에서, 니체는 <<도덕의 계보>>에서 도덕이 실제로는 어떻게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전적으로 다른 것에 관련되어 있는지 보여주려고 시도한다. [...] 이타주의와 선과 관련되어 있기는커녕, 니체는 그가 노예로 일컫는 자들이 그가 주인으로 일컫는 자들에 대해 승리를 거둘 수 있게 하는 것은 그들을 통제하고 그들의 우수성에 대항하여 복수하기 위한  권력의 기술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니체는 도덕의 핵심에 더러운 비밀이 숨어 있으며, 그것은 전혀 좋은 의도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마찬가지로, 푸코의 경우에, 신체에 대한 처벌에서 벗어나 그 대신에 재활을 향해 움직인 감옥 개선책들은 더 큰 자비와 인도주의의 반영이 아니라, 실제로는 영혼 자체를 겨냥한 권력의 기술이었는데, 그것은 간수들이 결코 필요하지 않을 정도로 영혼 자체를 감옥으로 변환시킨다. 이런 변환은 일련의 규율 기법들을 통해서 발생했으며, 그리고 그것은 감옥뿐 아니라 학교, 군대, 공장 그리고 일반 민중에 이르는 사회 전체를 통해서 일어난 변화를 반영한 것이었다고 푸코는 주장한다. 자비로운 변환인 듯 보이는 것이 그 대신에 통제와 권력의 더 효과적인 기법이라고 푸코는 주장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프로이트 이론에서는 사회적 관계들의 핵심에 욕망이 놓여 있다. 사람들이 살아가고 관계를 맺는 방식을 구성하는 것은 권력이 아니라 욕망과 욕망의 교착 상태이다. 프로이트의 비판 모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신과 종교에 대한 프로이트의 해설(종교는 그저 일련의 믿음이 아니라, 일련의 사회적 관계와 사회적으로 살아가는 방식이다)을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된다. 종교는 두 가지 기능을 수행한다고 프로이트는 주장한다. 한편으로, 종교는 주체할 수 없는 욕망을 규제하는 일련의 통제 메커니즘으로 작동하는데, 사회가 우리가 리비도에 따라 산다면 발생할 혼돈 상태로 빠져들지 못하게 막는다. 다른 한편으로, 종교는 안전 밸브로 작동하는데, 그런 희생이 요구되지 않을 다른 세계(천국)을 구상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사회로의 입장 허가에 요구되는 욕망과 향락의 희생을 참을 수 있게 한다. 마찬가지로, 신에 대한 믿음은 욕망의 견지에서 설명된다. 프로이트는 신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그리고 특히 아버지에 대한 유아의 관계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주장한다. 프로이트는 유아는 스스로를 무력하다고 체험하고 세계를 위협적인 것으로 만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유아는 자신을 보호하고 자신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강한 아버지를 꿈꾼다. 발달 과정 동안 이런 유아적 욕망과 불안은 법칙과 변덕스러움의 원천과 더불어 보호자로서의 신이라는 관념으로 전환된다.

 

마르크스의 경우에는 매우 상이한 종교 이론을 얻게 된다. 신성한 것과 초자연적인 것에 대한 우리의 관념들은 경제적 관계들의 반영물이다. 프로이트의 경우에 종교가 보호에 만족에 대한 우리의 갈망을 반영하는 동시에 우리의 욕망을 규제하는 통제 메커니즘으로 작동하는 대단히 애매한 것과 마찬가지로, 마르크스주의적 종교 분석도 애매하다. 매우 조악한 견지에서, 한편으로 종교는 생산의 가능성을 재생산하기 위한 조건과 계급 관계들을 유지시키는 이데올로기적 메커니즘들 가운데 하나이다. 예를 들면, 우리의 참된 종착지는 내세에 놓여 있으며 현세는 원죄 때문에 본질적으로 타락했다고 가르침으로써 우리가 비참한 사회적 조건과 부당한 사회적 관계들에 이의를 제기할 가능성이 더 작아진다. 마찬가지로, 종교는 우리로 하여금 너무 많은 의문을 제기하지 않은 채 권위에 복종하라고 가르친다. 마르크스적 사유가 대체로 무신론과 관련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은 틀리지 않는데, 억압적인 사회적 조건으로부터의 해방의 일부는 그런 계급 관계들을 유지시키는 이데올로기적 구조들―그것들 가운데 많은 것이 종교에서 발견된다―을 뒤엎는 것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이 이야기의 전부가 아니다. 또한 마르크스주의자는, 종교가 은폐되고 소외된 형식으로 정당한 사회에 대한 우리의 유토피아적 열망을 포함하고 있으며, 그것을 깨닫지 못한 채 부정의를 넘어서는 것이 사유되는 주요한 현장들 가운데 하나라고 주장할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종교는 왜곡되고 물화된 형식이지만 해방적 정서를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을 것이다. 포이어바흐의 방식에 따르면, 이것을 극복하는 것은 이런 유토피아적 열망이 천국 같은 다른 세계를 가리키는 것도 아니고, 영성적 해방을 가리키는 것도 아니라, 물질적 실천을 통해서 이 세계의 변형과 부정의의 근절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깨닫는 것을 필요로 한다. 포르노그래피(종교)와 대체 만족물의 환상 세계에 살기보다는 실재적 관계들(공정한 생산 체계를 만들어내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 정치적 투쟁)의 세계로 이동해야 한다고 마르크스주의자는 주장할 것이다. 근본적으로, 모든 사회적 악은 생산 체계로 귀결된다고 마르크스주의자는 주장한다. 그러므로, 예를 들면, 공정한 생산 체계가 만들어진다면, 우리는 범죄, 인종차별주의, 성차별주의 그리고 민족주의적이고 근본주의적인 폭력의 종식을 보게 된다. 따라서 이런 부정의를 극복하기 위한 실제적인 정치적 투쟁은 자본주의적 생산 체계에 맞서는 투쟁에 놓여 있다.

 

IV. 긴장

 

명백히 니체, 마르크스 그리고 프로이트는 앞에서 내가 제시한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다. 게다가, 비판 이론이라는 표식 아래에 느슨히 포섭되는 모든 사상가들을 이런 세 가지 범주 가운에 어디에 위치시킬지 알기는 어렵다. 예를 들면, 기호학이 비판 이론의 한 형식이라고 가정할 때, 바르트 같은 기호학자들은 어디에 위치시킬 것인가? 마찬가지로, 데리다적 해체는 어디에 위치시킬 것인가? 이런 분류적 난점들은 제쳐놓고, 정말 흥미로운 의문은 이런 정향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긴장들(마르쿠제와 들뢰즈와 가타리 같은 비판 이론가들이 잘 인식했고 해결하려고 노력했던 쟁점)에 놓여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 세 가지 정향들에는 나름의 진실이 있고 그것들은 모두 상이한 형태의 해방을 요구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문제는 그것들이 서로 자명하게 정합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예컨대 푸코와 마르크스를 생각하자. 푸코적 시각에서 바라보면, 우리는 실제로 경제 체계를 변환시켜서 공산주의 같은 것을 성취할 수 있을 것이지만, 사회에 만연하는 규율적 권력 관계들이 처리되지 않은 채로 여전히 그대로 있다면 해방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들뢰즈와 가타리의 저작 <<앙티 오이디푸스>>가 몰두한 것들 가운데 하나이다(그들은 그것을 그들의 욕망 이론의 견지에 입각하고, 들뢰즈는 푸코에 비판적이며, 그들은 욕망이 권력보다 더 근본적이라고 간주하더라도 말이다). 사회주의 정당들을 괴롭히는 미시파시즘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그것에 대해서는 경제 체계를 겨냥하는 것―이것도 필요하지만―은 충분하지 않으며,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의 억압을 추구하고 오이디푸스적/권위주의적 형태들의 사회 조직을 바라게 하는 욕망과 권력의 관계들도 겨냥해야 한다. 이런 두 가지 모두가 처리될 때에만 진정한 해방이 일어날 수 있다고 그들은 말하는 듯 보인다. 요약하면, 마르크스주의적 분석은 자체의 억압 이론에서 빠뜨린 것―권력과 욕망― 존재하며, 그리고 이런 간과가 바로 스탈린주의적 공포 같은 것들을 설명한다.

 

프로이트와 마르크스 사이에는 갈등이 더 두드러진다. 프로이트(그리고 덜한 정도로 라캉)은 해방적 기획에 대한 비관주의로 유명한데, 프로이트와 라캉은 사회적 억압 대부분의 원천이 욕망과 관련된 근절할 수 없는 갈등에 놓여 있는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종교의 경우에 명백히 나타난다. 매우 조악한 판본의 마르크스는, 우리가 자본주의를 극복하여 공산주의적 생산 체계를 만들어낼 수 있다면, 미신, 근본주의, 종교 그리고 종교적 폭력은 사라질 것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은 계급 불평등에서 비롯되는 왜곡된 결과라는 주장이 이어질 것이다. 그런데, 프로이트가 맞고 종교가 우리의 유아적인 무력감과 아버지(상징물: 대장, 지도자 등)에 대한 권위주의적 애착 의식에서 비롯되는 것이라면, 이런 경제적 변환이 일어날 수 있더라도 이런 현상들은 여전히 그대로 나타날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이런 현상들은 인간의 욕망이 구성되는 방식의 근본적인 구조들의 결과이다. "인간 조건에 대한 치료제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고 프로이트는 진술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프로이트의 답변은 우리를 괴롭히는 사회의 억압적 구조들과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방법에 집중하는 것이 더 좋을 것이라는 것이 될 것이다. 여기서 프로이트는 우리가 세계에 관해 생각하는 방식을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스토아학파 철학자들과 비슷한 반면에, 마르크스는 매우 많은 불만을 만들어내는 세계를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에피쿠로스학파의 진영에 속할 것이다(에피쿠로스에 의해 구상된 좋은 삶을 성취하는 데 "정원"―에피쿠로스학파 철학자들의 일종의 유토피아적 사회―이 중추적인 요소였다는 점을 기억하자).

 

또 다시, 쟁점은 이런 사상가들 가운데 어느 누구를 선택하고 나머지 다른 사람들을 버리는 것이 아닌데, 이런 정향들 모두에 진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판 이론의 주요한 기획은 종합의 기획, 즉 이런 정향들을 함께 생각하는 방법의 기획이다. 물론 이것은 들뢰즈와 가타리와 마르쿠제가 잘 이해한 기획이었고, 여기서 나는 새로운 것을 전혀 말하고 있지 않다. 그렇지만, 쟁점이 어느 누구를 선택하고 나머지 다른 사람들을 버리는 것이 아닌 한편, 종합은 그것이 종합하는 요소들을 변화시키지 않은 채 그대로 남겨두지 않는다는 점을 인식하는 것도 대단히 중요하다. 프로이트, 마르크스 그리고 니체에 대한 충성을 유지하는 것이 프로이트, 마르크스 그리고 니체의 모든 요소들을 유지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들 사유의 정신은 보존하는 반면에, 틀렸거나 과장된 것으로 판명되는 그들의 비판 이론의 요소들은 버려야 한다. 이것은, 이 사상가들 각각에서 어떤 요소들이 프로이트주의자, 마르크스주의자 또는 니체주의자이기를 포기하지 않는다면 버릴 수 없을 정도로 협상 불가능한 것인지라는 의문과 무엇을 단절할 수 있는 것인지이라는 의문을 제기하는 것을 필요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