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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스트리븐스: 빅 퀘스천-지식과 이해의 차이

 

지식과 이해의 차이는 무엇인가?

What Is the Difference Between Knowledge and Understanding?

 

―― 마이클 스트리븐스(Michael Strevens)

 

모든 사람은 무언가를 안다. 어떤 사람들은 많이 안다. 그런데 명백히 왓슨(Watson), 즉 텔레비전 퀴즈쇼 <제퍼디(Jeopardy)>의 가장 위대한 챔피언들을 경기에서 패배시킨 IBM 컴퓨터만큼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고대 시대에 사용된 아이올리스 방언은 이것의 한 방언이라는 힌트가 제시되었을 때, 왓슨은 손쉽게 고대 그리스어(또는 오히려, <제퍼디>의 질문으로서의 대답 형식을 사용하면, 고대 그리스어는 무엇인가?)라고 대답한다. 여성 대법관인 클래식 캔디 바라는 힌트가 제시되었을 때, 왓슨은 베이비 루스 진스버그(Baby Ruth Ginsburg)라고 응대했다. 매우 인상적이다. 그런데 왓슨은 자기가 무엇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는지 이해하는가? 그런 의문들에 대한 대답은 단순한 지식과 참된 이해 사이의 구별짓기에 이르는 길을 가리킬 것이다.

 

갱단의 이 "벌레"는 1930년대와 40년대에 머더 인코퍼레이티드의 실제 살인 청부업자였다는 힌트가 제시되었을 때, 왓슨은 제임스 캐그니(James Cagney)라고 대답했다. 확실히 왓슨은 제임스 캐그니가 배우였지 "실제" 갱단의 일원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는가? 그리고 미합중국 도시들(U.S. Cities)이라는 범주의 한 질문에 대답할 때, 왓슨은 토론토(Toronto)라고 대답한 것으로 악명이 높다. 그래서 그것은 아이올리스 방언이 일종의 고대 그리스어라는 것은 알지만, 토론토가 캐나다에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가?

 

나중에 논평가들이 설명했듯이, 왓슨은 이런 의문들에 대한 해답들을 인간들이 하는 식으로 알아내지 않는다. 인간들은 일련의 갱들 또는 미합중국 도시들을 환기한 다음에 그것들이 힌트에 명시적으로 부과되거나 암묵적으로 제시된 나머지 기준들을 충족하는지 자문하는 반면에, 왓슨은 신문 기사에서 백과사전 항목들에 이르기까지 저장된 방대한 문서 더미에서 추출된, 낱말들 사이의 통계적 연관들의 복잡한 목록을 참조한다. 아이올리스 방언은 그것이 나타나는 몇몇 문서에서 고대 그리스어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베이비 루스캔디 바의 경우에도 그리고 물론 루스 베이더 진스버그대법관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왓슨은 그 중첩을 알아볼 만큼 충분히 영리하다. 불행하게도, 조직 범죄와 관련된 다양한 술어들과 제임스 캐그니 사이에서도 마찬가지로 강한 연결이 발견된다. 왓슨은 조직 폭력 행위, 갱단 영화 그리고  두 부문에서의 핵심 인물들에 관한 많은 정보를 사이버네틱스적으로 쉽게 처리하지만, 실제 갱단의 일원이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듯 보인다.

 

그런데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통계적 연관들의 목록이 어떻게 사실과 허구 사이, 살인과 가상 사이의 차이를 이해할 수 있는가?

 

지식은 사실들의 빠른 신뢰할 만한 검색의 문제라고 가정하면, 왓슨은 많은 것들을 안다. 그런데 왓슨은 자기가 아는 것들을 거의 또는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왓슨은 아이올리스 방언이 고대 그리스의 방언이라는 점은 알지만, 방언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또는 심지어―그것이 낱말들에 의해서만 외부 세계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언어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왓슨은 (최소한 퀴즈쇼의 맥락에서) 지구에서 가장 유식한 몇몇 사람들처럼 정보를 제공하면서 정확하게 말할 수 있지만, 그것이 전달하는 사실들에 대한 파악은 최근의 모든 서평들을 읽었지만 책 자체는 한 페이지도 결코 보지 않은 칵테일 파티 단골의 파악보다 훨씬 덜 확실하다.

 

왓슨은 무엇을 결여하고 있는가? 나는 그것에 이름을 부여했다. 이해. 그런데 이해란 무엇인가? 두 가지 종류가 있다. 언어에 대한 이해와 세계에 대한 이해. 이 문장을 생각하자. Δεδυκε μεν α σελαννα. 아이올리스 그리스어를 읽지 못한다면 이 문장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내가 그 문장은 "달이 졌다"라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해준다면, 여러분은 그 문장이 무엇에 관한 것인지 즉각적으로 파악한다. 여러분은 달이 지평선 아래로 사라진다는 것이 무엇인지 안다. 여러분은 (아이올리스 방언을 말하지 못한다면) 그 문장을 이해하지 못하지만, 그것은 그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기 떄문일 뿐이지 그것의 주제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은 아니다.

 

왓슨의 문제는 그것이 세계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왓슨은 언어도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한다고 주장할 철학자들도 있겠지만, 나는 그 문제는 보류한다.) 왓슨은 해답을 제시하지만, 무엇이 자기 해답을 옳게 만드는지는 전혀 파악하지 못한다.

 

자신이 이해하지 못한 채 알고 있다는 것을 깨닫기 위해 컴퓨터가 될 필요는 없다. 살아 있는 실제 사람들이 왓슨과 같은 식으로만 알고 있는 사실들이 존재한다. 여러분은 바흐가 푸가를 작곡했다는 점을 알고 있지만, 푸가가 무엇인지는 이해하지 못하고 있을 것인데, 더욱이 여러분이 음치라면 말이다. 다른 한 사례를 제시하면, 내가 소년이었을 때 과학에 중독되었던 나는 물 속의 수소 분자와 산소 분자들이 공유성 결합으로 묶여 있다는 점을 알고 있었지만, 내게 공유성이라는 술어는 매혹적인 전문 용어에 지나지 않았다.

 

얼마 후에 나는 단일한 전자가 상이한 두 장소에 동시에 위치하는 중첩 상태에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모든 물리학자들은 이것을 알고 있지만, 거의 틀림없이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말로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아직 아무도 없을 것이다. 중첩 상태를 나타내는 문장 또는 수학적 표현들은 있지만, 우리는 이런 문장들이 본질적으로 무엇에 관해 말하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해하고 싶어하지 않는가? 지식은 좋은 것이지만, 여전히 이해가 훨씬 더 좋지 않는가?

 

그렇지만 나는 이해를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분석해야 한다. 왓슨이 영화와 관련하여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어린 시절의 내가 공유성 결합과 관련하여 파악하지 못한 것은 무엇인가? 양자 중첩과 관련하여 사실상 아무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이런 의문에 대답하는 한 방식은 왓슨 식으로 단순히 알고 있는 사실과 참으로 이해하고 있는 사실을 어떻게 구별할 수 있는지 묻는 것이다. 우리 자신의 지식과 관련하여, 내면에서 그런 구별짓기를 행하는 것은 쉬운 듯 보인다. 어린 시절에 나의 거리끼는 마음은 내가 화학적 전문 지식을 갖춘 체하고 있을 뿐이라고 말했다. 비음악적인 아는 체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푸가가 무엇인지 정말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잘 인식하고 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우리 모두는 우리가 월몰을 파악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눈을 감고 상상해보자. 친숙한 구체가 서서히 아래로 이동하고 지평선으로 빨려 들어가며 사라진다. 또는 생각해보자. 지구가 자전함에 따라 지구 표면 위에 정지한 관찰자들은 달을 향해 다가간 다음에 멀어진다. 결국 지구는 달을 완전히 차단하게 된다. 또는 느껴보자. 월몰은 시간의 경과, 헤어진 연인이 여행한 거리, 삶의 지나감을 나타낸다.

 

왓슨은 그런 것을 전부 결여하고 있다고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무슨 문제가 되는가? 왓슨은 특이한 점들이 많다. 그것은 보지 못하고, 연인이 없으며, 이론적으로 불멸자이다. 그런데 확실히 이런 것은 전혀 이해를 방해하지 못한다. 우리는 우리 감각과 정서를 통해서 달과 관계를 맺을 것이지만, 다른 존재자들은 상이하지만 마찬가지로 심원한 접근방식을 취할 수 있지 않겠는가?

 

이해에 대한 다른 한 시험은 내면적 상상, 느낌 그리고 사유가 아닌 능력들을 탐구한다. 공유성 결합에 대한 소년 마이클의 파악에서 중요한 것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을 알아채기는 쉽다. "공유성"을 규정하라는 요청을 받으면 나는 더듬거렸을 것이다. 아니면 더 낫게도, 소년 마이클에게 양자화학의 문제들을 푸는 방법을 설명하도록 요청하거나, 또는 바흐의 위키피디아 항목을 막 읽었지만 음악에 아무 관심도 없는 사람에게 푸가와 파사칼리아를 구별하도록 요청하라. 이해의 간극이 충분히 빨리 드러난다.

 

왓슨은 그렇게 쉽게 맥을 못추지 않을 것이다. 그저 <제퍼디>에서가 아니라, 일반적인 질문들에 능숙히 대답하는 더 다재다능한 판본의 왓슨―바로 IBM이 왓슨 기술을 사용하여 제작하고 있는 유형의 전문가 체계―을 상상하자. 그런 체계는 공유성, 푸가 또는 제시되는 어떤 다른 술어들도 규정하는 데 아무 어려움을 겪지 않을 것이다. 추정컨대, 올바른 조처와 잘못된 조처를 구별짓기 위해 <제퍼디>에서 매우 잘 작동하는 동일한 통계적 기법들을 사용하여 그것은 과학 수업에서 문제들을 풀거나 음악 작품들을 분류하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왜 그 기계는 이해에 이르지 못한 듯 보이는가? 한 가지 대답은 그것의 전문 지식이 기생적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그것의 프로그래머들이 제공하는 방대한 텍스트 더미에서 이미 이루어진 조처들을 검토함으로써 올바른 조처들을 알게 된다. 그렇지만, 거의 틀림없이, 우리 대부분도 비슷한 정도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대부분은 우리 스스로 파악하기보다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배운다. 더 깊은 대답은, 왓슨의 통계적 앎의 방식들과 관련하여 이해에 부합되지 않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왓슨과 인간은 모두 사물들 사이의 연관성들을 앎으로써 질문들에 대답한다. 그런데 그것들은 상이한 종류들의 연관성들이다. 왓슨은 구체의 회전과 세계의 나머지 부분에 대해 끊임없이 바뀌는 관점을 갖는 구체 표면 위 고정점 사이에 상관관계가 있다는 것을 그것이 읽는 텍스트들에서 포착한다. 인간은 이런 상관관계가 존재하는지 파악하며, 지구의 불투명성, 빛의 직진성 그리고 구체 자체의 기하학 사이의 연관성을 이해한다. 인간의 경우에 통계는 정말로 중요한 것, 즉 사물들, 사람들 그리고 그것들이 행하고 말하는 것들 사이에 맺어지는 물리적 및 인과적 관계들의 부산물이다. 그런 관계들을 파악하는 것이 이해가 놓여 있는 곳이다. 왓슨은 그런 관계들이 부재하는 세계 속에서 살아간다. 그것이 보는 전부는 통계이다. 왓슨은 많은 것을 예측할 수 있고, 그래서 많은 것을 알 수 있지만, 그것이 결코 파악하지 못하는 것은 자기 예측이 사실이 되는 까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