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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튜 차머스: 오늘의 에세이-양자 불확정(실)성은 오로지 마음에 있는가?

 

양자 불확정(실)성은 오로지 마음에 있는가?

Is Quantum Uncertainty All in the Mind?

 

―― 매튜 차머스(Matthew Chalmers)

 

"물리학자는 원자가 자체를 바라보는 방식일 뿐이다."

―― 닐스 보어(Niels Bohr)

 

가장 어린 유아들에게서 장난감을 빼앗을 때의 반응은 여러분은 실망시킬 가능성이 높다. 대부분은 그 객체가 그냥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결론짓는 듯 보인다. 상황은 빠르게 변한다. 대략 일 년도 지나지 않아서 까꿍놀이도 즐거운 일이 된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아이들은 우리가 물건을 쳐다보고 있지 않을 때에도 그것이 변함없이 존속한다는 점을 파악한다.

 

당연히, 그 나이에 우리는 양자 이론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 표준적인 이야기에 따르면, 물리 이론들 가운데 시험을 가장 잘 거친 이 이론―성인 영혼들이 즐기는 컴퓨터, 레이저 그리고 휴대폰의 원천―은 실재의 기본적 구성물들이 아무도 보고 있지 않을 때 매우 다른 막연한 형태를 띤다고 알려 준다. 전자, 쿼크 또는 전체 원자들은 쉽게 상이한 두 장소에 동시에 있을 수 있거나, 아니면 여러 특성들을 동시에 나타낼 수 있다. 우리는 그 많은 가능한 것들 가운데 어느 것을 보게될지 확실히 예측할 수 없는데, 그것은 전적으로 확률의 무작위적인 손에 달려 있다.

 

그것은 우리가 자란 고전적 세계가 작동하는 듯 보이는 방식이 아니고, 그래서 물리학자들은 당혹스러운 불일치를 설명하기 위해 거의 일 세기 동안 주위를 뒤졌다. 헛수고였다. 가장 근본적인 층위에서 실재를 직면할 때 우리는 결국 허튼소리를 다시 지껄인다.

 

데이비드 머민(David Mermin)은 자신에게 분별 있는 말할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 뉴욕주 이타카 소재 코넬 대학의 원자 물리학자인 그는 자신의 반 세기 경력의 대부분을 양자 이론의 본성에 관한 철학적 숙고를 거부하며 보냈다. 그런데 그는 계시를 체험했다. 양자 난제들을 해결하는 길은 우리가 언제나 실재에 대한 객관적 견해를 얻을 수 있다는 뿌리 깊은 생각을 버리는 것이다. 이런 도발적인 관념에 다르면, 세계는 불확정이지 않다. 우리가 불확정적이다.

 

적절히 제어된 측정을 행함으로써 세계에 대한 객관적인, 보편적으로 타당한 견해를 얻을 수 있다는 관념은 근대 과학의 가장 기본적인 가정일 것이다. 그것은 거시적인 고전 세계에서는 충분히 잘 작동한다. 축구공을 차면, 누가 그것을 관찰하고 있든 어떻게 관찰하고 있든 간에 뉴턴의 운동 법칙들이 그것이 나중에 어디에 있을지 말해줄 것이다.

 

그런데 전자 또는 쿼크 같은 양자 입자를 때리면, 확실성은 사라진다. 기껏해야, 양자 이론은 그 입자의 상태를 서술하는 다면적인 파동함수에 암호화되어 있는 많은 것들에서 나타나는 한 결과에 대한 확률을 계산할 수 있게 한다. 동일한 입자에 대해 동일한 측정을 행하는 다른 한 관찰자는 매우 다른 것을 측정할 수 있을 것이다. 무엇이 일어날지 확실히 말할 길은 전혀 없다.

 

그렇다면 아무도 보고 있지 않을 때 양자 객체는 어떤 상태에 있는가? 가장 널리 수용된 해답은 코펜하겐 해석인데, 그것은 초기의 많은 양자 숙고들의 현장을 본떠 명명되었다. 슈뢰딩거의 악명 높은 고양이는 그것의 결론을 예시한다. 방사성 붕괴 같은 무작위적인 양자 사건에 의해 배출될 수도 있고 배출되지 않을 수도 있는 치사 가스가 든 병 하나를 상자 속에 넣고 잠그면, 그 불행한 고양이는 중간 상태, 즉 살아 있는 동시에 죽은 상태에 처하게 된다. 누군가가 그 상자를 개봉할 때에만 그 고양이의 파동함수가 자체의 가능한 다중 상태들에서 단일한 현실적 상태로 "붕괴"한다.

 

이것은 상황을 더 복잡하게 만든다. 아인슈타인은 쥐의 관찰이 파동함수를 붕괴시키는 데 충분할 것인지 신랄하게 물었다. 그렇지 않다면, 인간의 의식과 관련하여 그렇게 특별한 것은 무엇인가? 우리의 측정이 정말로 실재에 영향을 미친다면, 또한 그것은 "유령 같은 원격작용"―한 파동함수를 관찰하는 것이 어떻게 겉보기에 우주의 반대편에 있는 다른 한 파동함수도 동시에 붕괴시킬 수 있는지 서술하는 아인슈타인의 부정적인 어구―같은 효과들에 대한 문을 개방한다.

 

그 다음에 원자와 입자들이 분열된 성격들을 분명히 취할 수 있는 듯 보이지만, 원자와 분자들로 이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양이 같은 거시적 객체들은 명백히 그럴 수 없는 방식에 대한 불가사의가 있다. 슈뢰딩거가 고양이를 도입한 의도는 양자 세계와 고전 세계 사이의 설명할 수 없는 이런 분리를 강조하는 것이었다. 그런 분열은 존재할 뿐 아니라, 양자 이론가 존 벨(John Bell)의 말에 따르면 "붙잡기 어려운" 것이기도 하다. 예를 들면, 물리학자들은 항상 더 큰 객체들을 흐릿한 양자 상태들에 처하게 하려고 궁리하는데, 그래서 그 경계에 어디에 놓여 있는지 규정할 정해진 방법은 없다.

 

코펜하겐 해석은 이런 양자적 불가사의들을 그저 무시할 따름이고, 그래서 그 해석은 1989년에 기고한 한 논문에서 머민이 "입 닥치고 계산하라" 접근방식이라고 부른 태도로 이어진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자신을 옹호자로 간주했다. 대안들―무엇이든 관찰될 때마다 우주가 상이한 행로들로 갈라진다고 가정하는 다세계 해석 같은―이 존재했지만, 정말로 아무것도 핵심적인 불가사의를 해결하는 듯 보이지 않았다.

 

빈번하게 틀리다

 

이제 머민은 한 해석이 해결하는 듯 보인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그의 착상이 아니다. 사실상 그는 그것의 주창자들, 즉 앨버커키 소재 뉴멕시코 대학의 칼튼 케이브즈(Carlton Caves), 캐나다 워털루 소재 페리미터 이론물리학 연구소의 크리스토퍼 푹스(Christopher Fuchs) 그리고 런던 대학 로얄 홀로웨이 칼리지의 뤼디거 샤크(Rudiger Schack)와 함께 그 해석에 대해 논쟁하는 데 십 년 이상의 시간을 보냈다.

 

양자 베이즈주의로 알려져 있는 그 해석의 관념들은 겉보기에 양자 세계를 관장하는 파동함수 확률들의 의미를 재평가하는 데서 비롯된다. 통상적으로, 이런 확률들은 "빈도주의적" 확률들로 간주된다. 앞면 아니면 뒷면을 나타내는 동전의 많은 사례들을 세어서 확률이 50/50이라고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양자 계에 대한 많은 측정이 그것의 다중 상태들이 나타나는 상대적인 빈도를 말해준다.

 

자체의 한계점들―특히 단일한 개별적 사건들을 다룰 때―에도 불구하고, 관찰자를 전적으로 객관적인 셈 기계로 변환시키는 방식 때문에 빈도주의적 확률은 과학 전체에 걸쳐 널리 퍼져 있다. 그런데 확률에 대한 더 오래된 대안적 접근방식이 18세기에 영국 목사 토머스 베이즈(Thomas Bayes)에 의해 고안되었다. 이것은 "오늘 비가 올 확률이 40%이다" 같은 문장에서 나타나는 그런 종류의 확률이다. 그것의 값은 객관적이거나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기압과 비슷한 날씨 체계들이 과거에 전개된 방식 같은 변화하는 다양한 인자들에 의거한 유동적인 평가이다. 새로운 한 조각의 정보―예를 들면, 아침에 커튼을 열었을 때 험악한 구름 층을 보는 것―를 획득하면, 비가 올 확률이 90 내지 100%라고 예상을 갱신할 것이다. 비가 올 실제 가능성은 변하지 않았지만, 그것에 관한 여러분의 지식 상태는 변했다.

 

양자 베이즈주의, 즉 큐비즘의 중심 주장은 더 주관적인 유형의 이런 확률을 양자 세계에 적용함으로써 전적으로 새로운 풍경이 열린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보이지 않는 전자의 스핀을 측정하면, 새로운 지식을 얻게 되고, 그래서 불확실한 것에서 확실한 것으로 확률에 대한 평가를 갱신하게 된다. 양자 층위에서는 아무것도 변할 필요가 없다. 양자 상태, 파동함수 그리고 양자역학의 다른 모든 확률론적 장치는 실제 세계의 존재자와 관련된 객관적 진리를 나타내지 않는다. 그 대신에 그것들은 우리가 측정을 수행하기 전에 측정과 관련된 우리의 불확실성을 조직하는 데 사용하는 주관적인 연장들이다. 다시 말해서, 양자 기묘함은 전적으로 마음에 있다. "상황은 정말 단순하다"고 머민은 말한다.

 

명심하자. 최종적으로 머민에게 그가 항상 양자 베이즈주의자였다는 점을 납득시키는 데에는 작년에 남아프리카에서 푹스와 샤크와 나눈 6주 간의 집중적인 토론이 필요했다. 작년 11월에 그들은 얻어진 결론을 함께 출판했다(arxiv.org/abs/1311.5253).

 

머민의 경우에, 그 착상의 아름다움은 양자역학을 괴롭히는 역설들이 그냥 사라진다는 점이다. 측정은 실제 세계―그것이 무엇이든 간에―에서 일어나는 일의 "원인"이 아니라, 우리 머리 속에서 일어나는 일의 원인이다. 유령 같은 원격작용도 환상이다. 자발적 변화라는 외양은 자체의 지식 상태를 갱신하는 측정들을 독립적으로 수행하는 두 당사자의 결과일 뿐이다.

 

붙잡기 어려운 분리에 대해서, "고전" 세계는 측정 행위들이 연속적인 세계인데 우리 자신의 눈으로 상황을 보기 때문이다. 그런데 미시적인 "양자" 세계는 정보를 얻기 위해 적절한 장비를 이용한 명시적인 측정 행위가 필요한 세계이다. 이 경우에 결과를 예측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보고 있지 않을 때 진행되고 있을 모든 상황을 고려할 수 있는 이론이 필요하다. 양자 베이즈주의자의 경우에, 양자-고전 경계는 실제 세계에서 진행되고 있는 것과 그것에 대한 여러분의 주관적인 체험 사이의 분리이다.

 

관찰자의 종말

 

메사추세츠주 윌리엄타운 소재 윌리엄스 칼리지의 양자 이론가 윌리엄 우터즈(William Wootters)는 이것이 양자역학과 관련하여 여러 해 동안 출현한 해석들 가운데 가장 흥미로운 해석이라고 생각하며 역사적 선례들을 가리킨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주관적 체험이 물리과학에서 명시적으로 배제되어 왔다는 슈뢰딩거의 우려를 다루며, 그리고 체험하는 주체을 위한 자리를 필요로 하는 동시에 제공한다"고 그는 말한다.

 

다른 사람들은 관심이 덜하다. 1996년에 프랑스 엑스 마르세이유 대학의 카를로 로벨리(Carlo Rovelli)관계적 양자역학(relational quantum mechanics)으로 불리는 비슷하지만 덜 극단적인 관찰자 의존적 착상을 제시했다. 그는 큐비즘이 18세기 독일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가 옹호했던 철학―사물들에 대한 직접적인 경험은 존재하지 않으며, 그것은 우리 마음에서 감각적 입력물들로부터 구성하는 것이다―에 너무 많이 의지한다고 우려한다. "나는 무언가를 관찰하는 인간들이 전혀 존재하지 않더라도 이치에 맞을 양자 이론에 대한 해석을 선호할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사우스 캐롤라니아 주 클림슨 대학의 안토니 발렌티니(Antony Valentini) 역시 그것이 그른 방향으로 움직인다고 생각한다. 그는 누군가가 어떤 입자의 에너지를 측정하기 위해 장비를 설치한 다음에 차를 한 잔 마시기 위해 나가는 장면을 묘사한다. 차를 마시는 동안, 그 장비의 눈금판 위 바늘은 특정한 아무 방향도 가리키지 않았는가? 양자 베이즈주의자는 아무 방향도 가리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말할 것인데, 경험이 우리에게 눈금 같은 거시적 객체는 항상 어떤 특정한 방향을 가리킨다고 말해주더라도 말이다. 그런 견해는 진지하게 고려될 수 없다고 발렌티니는 말한다. "물리 이론은 그저 어떤 담론이 아니라 물리적 세계를 서술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샤크는, 저쪽에는 하나의 세계만 있을 뿐이고, 그래서 우리는 그것에 대한 고전적 해석과 양자적 해석을 통일하는 길을 찾아내야 한다고 반박하는데, 비록 그것이 어떤 권역에서도 실재에 대한 객관적인 접속을 행할 수 없다는 점을 수용한다는 것을 의미하더라도 말이다. "큐비즘은 자연이 초연한 관찰자의 시각에서 적절히 서술될 수 있다는 관념을 포기한다"고 그는 말한다.

 

그에게 큐비즘이 제대로 하고 있다는 가장 강력한 표지는 위그너의 친구라고 불리는 사고 실험이다. 한 친구가 슈뢰딩거의 고양이가 담긴 상자를 막 열려고 하는 폐쇄된 방 바깥에 여러분 자신이 서 있다고 상상하자. 여러분의 친구는 명료한 결과―고양이가 살아 있는 상태이거나 아니면 죽은 상태이다―를 목격한다. 그런데 여러분은 고양이의 모든 가능한 상태들과 그 친구가 고양이와 관련하여 제시할 보고들의 중첩에 근거하여 일단의 확률들을 할당해야 한다. 누가 옳은가? 둘 다 옳다고 양자 베이즈주의자들은 말한다. 측정 결과가 항상 그것을 체험하는 사람에 대해 사사로운 것이라면 아무 역설도 존재하지 않는다.

 

개종자의 모든 열정을 다해 최근에 머민은 양자 베이즈주의적 추리를 양자 이론 및 확률과 아무 관련도 없는 한 존재자, 즉 시공간(space-time)의 문제들에 적용함으로써 비방자들을 납득시키려고 시도했다.

 

그런데 오스트리아 비엔나 대학의 카슬라프 브루크너(Caslav Brukner)는 그런 접근 방식들이 얼마나 멀리 나아갈 수 있을지 의심한다. "나는 큐비즘에서 양자 이론이 지금 그대로의 바로 그 수학적 및 개념적 구조를 갖는 이유를 설명할 수 있는 능력을 찾지 못한다"고 그는 말한다. 가장 근본적인 층위에서의 세계에 대한 다른 이론들도 비슷한 베이즈적 기반을 갖출 수 있을 것인데, 왜 특정하게 양자 이론이 올바른 해답들을 제공하는가? 양자역학의 하부 구조를 검토한 많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브루크너는 핵심적인 일단의 원리 또는 공리들로부터 그것을 재구성하는 것을 선호할 것이다.

 

양자 이론이 세계를 서술하고 기술적 혁신을 제공하는 놀랄 만한 작업을 수행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 모든 것이 중요한지 의문이 들 것이다. 그것은 어느 정도까지 참이라고 로벨리는 말한다. 그러나 직관적인 이해의 결여는 가장 작은 규모에서 가장 큰 규모까지 물리학 전체를 포괄할 수 있는 어떤 더 큰 이론에 대한 탐색을 저지한다. "세계를 더 잘 이해하기를 바란다면, 예를 들어, 양자 중력 또는 우주론의 경우에 그것은 중요하다"고 그는 말한다.

 

과학적 객관성의 포기에 대한 전망에 직면할 때, 닥치고 계산하라는 유혹은 여전히 강할 것이다. 그런데 양자 베이즈주의는 양손에 떡을 다 쥘 수 있는 길을 제시할 것이다. 양자 이론의 기묘함을 우리 자신의 마음으로 이동시키는 것은 그것의 계산 능력을 감소시키지 않지만, 그것이 정말 얼마나 충격적인지에 대해 그저 침묵하게 만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