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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샤비로: 오늘의 에세이-범심론

 

범심론

Panpsychism

 

―― 스티븐 샤비로(Steven Shaviro)

 

최근의 저작에서 나는, 모든 존재자들은 "물리적" 극(physical pole)뿐 아니라 "정신적" 극(mental pole)도 갖추고 있다는 화이트헤드(Whitehead)의 입장은 "그가 때때로 비난받는 까닭인 '범심론'과" 구별지을 필요가 있다고 적었다(p. 28). 이제 나는 이것이 전적으로 그르다는 점을 깨닫는데, 화이트헤드의 입장은 매우 고전적인 의미에서 바로 범심론적인 입장이기 때문에 그런 구별짓기는 이루어질 수 없다. 게다가, 범심론은 존중할 만한 철학적 입장이고, 그래서 그 누구도 "비난받는" 것에 대해서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나는 범심론―어떤 의미에서 "심성"(mentality)이 우주의 모든 존재자들, 또는 물질 자체의 보편적 특성이라는 철학적 신조―에 관한 데이비드 스커비나(David Skrbina)의 책을 읽고서 이런 새로운 이해에 이르게 된다. 스커비나의 책 <<서양의 범심론(Panpsychism in the West)>>은 하나의 철학적 신조로서의 범심론을 옹호하며 이 신조의 방대한 역사를 제시한다. 스커비나는, 범심론이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에서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를 거쳐 한 세기 전의 윌리엄 제임스와 화이트헤드 그리고 오늘날 많은 사상가들에 이르기까지 2500년 동안 서양 사상의 선도적인 계보였다는 점을 보여준다. 세계의 만물이 어떤 식으로 생각한다는 관념은 그것의 "별난" 명성 때문에 가정하게 될지도 모르는 것보다 훨씬 더 널리 퍼져 있다.

 

스커비나가 편집한 자매편 <<머무르는 마음(Mind That Abides)>>은 분석철학자들(그들 가운데 갈렌 스트로슨이 가장 잘 알려져 있을 것이다)에서 화이트헤드 이후의 과정지향적 사상가들을 거쳐 다른 비분석철학적 형이상학자들과 더불어 "사변적 실재론자들"(그레이엄 하만과 이에인 해밀턴 그랜트의 글이 실려 있다)에 이르기까지 현대의 다양한 철학자들의 범심론의 가능성에 관한 에세이들을 포함하고 있다. 이 책들은 범심론의 타당성을 옹호하는 강력한 변론을 제시할 뿐 아니라, 모든 존재자들은 일종의 맹아적 심성을 갖추고 있다는 화이트헤드의 주장이 범심론적 신조의 중요한 표현이라는 점을 명확히 한다.

 

범심론을 옹호하는 논증들은 다양한 형태로 제시되고, 그래서 범심론 옹호자들은 흔히 서로 어긋난다. 그런데 현대의 범심론적 논변에 중요한 흐름이 있다면 그것은 이렇다. 본원적인 몸/마음 이원론을 거부하고, 유물론, 물리주의 또는 다른 형태의 일원론을 수용하면, 마음 또는 심성의 확실한 실존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직면해야 한다. 여기서 나는 가능한 가장 넓은 의미에서 "일원론"을 사용하고 있는데, 나는 일원론이 과학적 물리주의(세계는 전적으로 질량-에너지로 구성되어 있거나, 또는 세계는 현대물리학에 의해 서술되는 아원자 입자들로 환원될 수 있다는 신조)뿐 아니라 "내재론"(immanentism, 세계는 스피노자의 유일한 실체와 같은 것, 또는 베르그송의 다양한 지속들, 또는 윌리엄 제임스의 "급진적 경험주의"에서 이해되는 대로의 "체험", 또는 사실상 순수한 다양체, 또는 그레이엄 하만 풍의 독립적인 객체들의 열린 집합체로 이루어져 있다는 신조)이라고 불릴 수 있는 그 어떤 형태의 것도 포함하도록 규정한다. 다시 말해서, 심성의 실존을 설명하는 방식으로서 초자연주의나 몸/마음 이원론을 거부하는 철학은 무엇이든 어떤 자연주의적이거나, 또는 최소한 내재적인 설명 방식을 찾아내야 한다.

 

또한 나는 "마음" 또는 "심성"도 가능한 한 넓게 규정하려고 작정하고 있다. 이것은 일종의 인지와 인지적 조작들에 있는 것으로 규정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정동에도 있다고 나는 주장할 것이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심성은 현상적 체험(phenomenal experience), 즉 분석철학자들이 "감각질"(qualia)이라고 부르는 것―어떤 특수한 객체의 붉음 또는 딱딱함에 대한 내 감각, 또는 고통이나 즐거움에 대한 내 감각, 또는 단순히 세계 속에 존재한다는 내 감각―에 있다. 현상적 체험은 흔히 의식, 즉 지향성의 상태, 자각의 상태와 융합되는데, 나는 이런 동일시―나중에 다루어질 것이다―에 대해 주저하는 마음이 있지만, 당분간 대충 동일하다고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방식들 가운데 어느 것으로 이해되든 간에, 적어도 심성은 우리 자신의 실존의 환원 불가능한 측면인 듯 보일 것이다. 어떤 다른 존재자들이 심성을 갖추고 있을 것인지에 대한 의문은 미해결 상태로 두자. 철학자들을 괴롭히고 있는 문제는 현상척 체험의 명백한 확실성, 또는 확고부동함(incorrigibility)을 어떻게 설명하느냐이다("확고부동함"은 데카르트가 자신의 철학 전체를 정초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모든 것은 틀리거나 오인할 수 있지만, 내가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은 오인할 수 없다). 물론 데카르트적 이원론은 이 딜레마에 대한 위대한 고전적 해결책이다. 생각한다는 행위 또는 사실을 생각하는 실체으로서 "나"라는 형태로 물화시켰다는 이유로, 그리고 생각하는 마음을 몸, 물질 또는 연장적 실체라는 관념들과 분리시켰다는 이유로 데카르트는 지금까지 수백 년 동안 (올바르게도) 비판받았다. 그런데 이것이 그의 애초 주장의 긴급성을 무효로 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오늘날 데카르트의 이원론적 경로를 기꺼이 취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래서 그 문제는 이렇게 된다. 유물론 또는 일원론에 의거하여 감각질, 또는 현상적 체험, 또는 의식, 또는 "내면" 체험을 어떻게 설명하는가? 현대 사상가들은 소거주의(eliminativism) 아니면 창발론(emergentism)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었다. 소거주의는 환원론적 테제인데, 그것은 감각질, 의식, 지향성 그리고 현상적 체험은 일단 신경학적 메커니즘들이 물리적 층위에서 작동하는 방식을 이해하면 사라지게 될 환상, 즉 언어적 오해일 뿐이라고 주장한다(대니얼 데닛, 토머스 메칭거 그리고 처칠랜드에서 이런 입장의 상이한 판본들을 볼 수 있다).

 

창발론은 심성이란 인간 뇌 속 신경세포들의 거대한 집합체들의 경우에서처럼 어떤 수준의 복잡성을 달성한 상호작용하는 물리적 과정들의 부수현상적 결과라고 주장한다. 현상적 체험은 진화하는 동안 어떤 시점에서 창발하는데, 그것은 동물에 있어서의 신경세포와 신경계의 실존과 관련이 있거나, 아니면 충분한 복잡성을 갖춘 유기체들, 즉 척추동물, 또는 포유류 동물, 또는 인간들에 있어서 신경계의 약간 더 복잡한 발달과 관련되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소거주의와 창발론 둘 다 심성을 실제로 설명하기보다 그것을 "둘러댈" 뿐이라는 점에 대해서 비판받을 수 있다. 화이트헤드가 말하듯이, "둘러대는 뛰어난 위업에 관여할 때 철학은 자체의 유용성을 파괴한다." 소거주의는 심성을 해명하는 것이 아니라, 심성은 너무 사소하거나 환상적이어서 해명할 가치조차 없다고 암시하는데, 그것은 "붉게 타는 저녁놀은 과학자들이 그 현상을 설명하는 데 동원할 분자와 전기적 파동들만큼이나 자연의 일부이어야 한다"는 화이트헤드의 주장을 무시한다.

 

한편, 창발론은 문제를 제기한다는 이유로 비난받을 수 있다. 어떤 물리적 특성들이 다른 물리적 특성들에서 창발한다(스트로슨의 예에서 단일한 물 분자는 그 자체로 축축하지는 않다)고 말하는 것과 심성, 또는 체험, 또는 현상성은 전적으로 비심성의 것, 비체험적인 것, 그리고 비현상적인 것에서 창발할 수 있다는 입장을 고수하는 것은 전적으로 다르다고 스트로슨은 주장한다.

 

더 일반적으로 나는, 오늘날 창발 또는 자기조직화라는 역능에 대한 거의 반사적인 믿음에 이의를 제기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이것에 대한 더 많은 논의를 위해서는 나의 이전 글 <자기조직화에 반대한다(Against Self-Organization)>를 보라). "자발적 창발" 또는 "자기조직화"가 그 어떤 다른 식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포괄적인 설명으로 작동하기는 너무나 쉽다. 창발론적 테제는 "어디에도 없는 곳에서 세계로 흘러 들어오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화이트헤드의 존재론적 원리를 위반할 우려가 있다. 최근에 장 자크 쿠피엑(Jean-Jacques Kupiec)이 제시했듯이, 창발적 자기조직화에 관한 이론들은 미리 프로그램된 최종 상태라는 관념, 또는 선의의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관념을 사건들에 대한 우리 이해에 부당하게 다시 도입하는 방식일 것이다.

 

소거주의자들에 맞서서 범심론적 사상가들은 심성이 실재적이라고 제안한다. 창발론자들에 맞서서 범심론자들은 심성이 무에서 결코 생성될 수 없다고 제안하는데, 여러분이 어디를 보든 간에 심성은 항상 이미 존재한다. 이런 저런 형태로 마음은 위에서 아래로 빠짐없이 존재한다. 범심론자들은 심성, 즉 체험이 자체적으로 물질(아원자 입자들, 질량-에너지의 양자들, 현실적 계기들, 최소의 차이들 등)의 기본적 속성이라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서, 심성은 물리성에서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 동일 공간에 함께 존재한다. 이것에 관해서는, 고전적으로 스피노자적 견지(물질과 정신은 동일한 유일한 실체의 두 가지 속성이다)에서 또는 라이프니츠적 견지(모든 모나드는 물질적인 동시에 정신적인데, 모나드는 세계의 입자이기도 하고 세계에 대한 시각이기도 하기 때문이다)에서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갈렌 스트로슨, 데이비드 스커비나 등은 현대물리학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견지에서 이런 논증들을 재개념화했다. 스트로슨이 서술하듯이, 우주를 구성하는 "궁극적인 것들은 본질적으로 체험을 수반하고 있다... 모든 물리적 질료는 이런 저런 형태로 에너지이고, 모든 에너지는 체험을 수반하는 현상이라고 나는 믿는다."

 

이런 논증 노선은 사변적 실재론자들의 논증들과 흥미로운 방식으로 교차한다. 그 노선은, 심성은 우주 자체에 고유한 것―"우리"(인간, 합리적 정신, 주체들)가 우주에 접근하는 방식의 특징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으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점을 함축하기 때문이다. 심성을 인간(그리고 아마도 어떤 다른 "고등" 동물의 종들)에만 한정하는 것은 근거가 없는 편견이거나, 메이야수가 비난한 "상관주의"의 일례이거나, 또는 하만이 의문시한 인간중심주의의 일례이다.(이것 역시 주체와 객체의 이원성은 상황적인 것이고, 그래서 항상 변하는 것이라는 화이트헤드의 빈번한 주장과 일치한다. 모든 존재자는 어떤 조건이나 관계에서는 "주체이고, 다른 조건이나 관계에서는 "객체"이다.)

 

스커비나의 모음집에서 이에인 해밀턴 그랜트와 그레이엄 하만은 내가 여기에서 제대로 다루기에는 너무나 복잡한 방식으로 실재론과 범심론 사이의 관계에 대해 적고 있다. 그랜트는 위에서 아래로 빠짐없이, 즉 아무 예외도 없이 범심론을 옹호하는 논증을 전개하지만, 그렇게 하면서 그는 창발이라는 문제 전체를 복잡하게 만든다. 한편, 하만은 범심론에 대해 유보적이다. 그는 심성을 관계성, 즉 객체들 사이의 상호작용의 불가피한 성분으로 간주하는데, "객체들은 정보로서 제시되는 이미지들에 의해 간접적으로만 충돌한다." 그런데 객체는 그것이 다른 객체들에 전송하는 "정보"로 환원될 수 없다. 그러므로 하만은 객체가 자체적으로 존재하는 한에 있어서의 객체, 그래서 다른 객체들과 "대리적" 관계들을 맺지 않은 객체에 정보, 즉 심성이라는 특성이 존재하는 것을 부정한다. 그러므로, 하만의 경우에는, "모든 존재자들이 체험을 수반하더라도, 모든 존재자들이 체험을 갖는 것은 아니다." 그랜트의 글과 하만의 글은 둘 다 내가 지금 당장 추구할 여유가 없는 중요한 쟁점들을 제기한다. [...]

 

어쨌든, 화이트헤드는 범심론적 논증 전체를 나름대로 중요한 방식으로 급진전시킨다. 화이트헤드의 표현 형식에서 모든 "현실적 존재자" 또는 "현실적 계기"는 "물리적" 극과 "정신적" 또는 "개념적" 극 둘 다를 갖는다. 또한 그는, 그것들은 "공적" 측면과 "사적" 측면 둘 다 있다고 말함으로써 이 점을 표현한다. "전적으로 공적이거나, 아니면 전적으로 사적인 구체적 사실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공공성과 사사성 사이의 구별은 이성의 구별짓기이지 상호 배타적인 구체적 사실들 사이의 구별짓기가 아니다." 모든 것은, 서로 다른 정도로, 한편으로는 물리적으로 또는 공적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정신적으로 또는 사적으로 존재한다. 다른 (이전의) 계기들을 파악할 때, 모든 계기는 자체의 "합생" 과정에서 내향적으로 정신적이거나 사적이다. 그런데 결국 다른 계기들에 의해 파악되는 "소여"로서의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우주와 관계를 맺는 한에 있어서 모든 계기는 물리적이거나 공적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정신적인 것과 물리적인 것 사이, 또는 실존의 사적 차원과 공적 차원 사이에는 실존적 비대칭성뿐 아니라 시간적 비대칭성이 존재한다. 이런 비대칭성은 합리성 일반을 이해하는 방식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자기 구성(self-constitution)의 사사성 속에서 계기는 전체 우주를 파악하고, 그래서 그것과 관계를 맺는다. 공적으로, 하나의 소여로서, 계기는 다른 계기들에 의해 파악되고, 그래서 관계적 인자로서 작동한다. 이런 비대칭성을 더 자세히 이해할 필요가 있는데, 나는 이것이 화이트헤드가 위에서 아래까지 빠짐없이 관계성과 더불어 한 계기가 자체 관계들의 총합 이상의 것이라는 감각을 유지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화이트헤드가 범신론적 논증을 수정하는 가장 중요한 방식은, 그에게 심성―또는 윌리엄 제임스가 "체험"이라고 부르는 것―은 (대부분의 범신론자들의 저작에서 그런 것처럼) 의식과 동일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광자와 쿼크, 돌과 온도조절 장치는 모두 "체험"을 갖는데, 이것은 그것들이 일종의 맹아적 심성을 갖추고 있다는 점을 의미한다. 그런데 화이트헤드의 경우에, 그것들은 의식을 지니고 있지 않을 것이다. 인간들의 경우에도, 대부분의 정신적 과정들은 무의식적으로, 즉 의식의 문턱 아래에서 일어난다고 화이트헤드는 말한다. 그렇다면 그것들을 "정신적"으로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무의식적 사유에 대한 화이트헤드의 관념은, 전적으로 다른 형태로, 무의식적인 것들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의미와 더불어 대부분의 인지 과정들은 의식을 동반하지 않으며, 그리고 흔히 의식으로 환원될 수 없다는 인지과학의 인식에 관련되어 있다. 정신분석학과 마찬가지로, 화이트헤드는 무의식적 경험을 "느낌"과 "욕구", 즉 자극에 대한 자동적인 반응이 결코 아닌 작용과 반작용의 과정들과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간주한다. 그런데 정신분석학과는 달리, 화이트헤드의 경우에는 이런 느낌과 욕구들이 반드시 어떤 종류의 표상적 활동을 수반하지는 않는다.

 

화이트헤드의 경우에, 심성은 그가 "개념적 느낌", 즉 "가치 평가"라고 부르는 것에 의해 특징지워진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가능태들이 서로 대조되거나 계량되는 과정이다. 존재하는 것에 대한 지각(그리고 아마도 인식)만 있을 수가 없다. 화이트헤드의 경우에, 그런 지각과 인식은 바로 물리적 인과성과 동일한데, B가 A를 물리적으로 지각하거나 파악한다고 말하는 것은, 예를 들면, 당구공 하나가 다른 한 당구공에 부딪침으로써 그 당구공에 에너지와 운동을 전달하고, 그래서 그것을 움직이게 만드는 방식으로, A가 물리적으로 B에 영향을 미친다고 말하거나, 또는 A가 결과 B에 대한 원인이라고 말하는 것과 정확히 동일하다. 이 모든 것에 덧붙여, B는 A에 대한 정신적 또는 개념적 체험, 말하자면, 움직이게 되는 체험도 겪는다고 화이트헤드는 말한다. 나는 당구공이 어떤 의미에서 의식이 있는지 의심하지만, 화이트헤드의 경우에 에너지 전달이라는 사건이 정신적 체험인 까닭은 그것이 가능태(정확히 운동의 가능태)의 활성화를 수반하기 때문이다. 심성은 움직이는 것과 움직이지 않는 것의 비교에 놓여 있는데, 이런 비교는 당구공 B가 당구공 A에 의해 부딪쳐 운동하게 되는 "계기"의 "정신적 극"이다.

 

그런데, 당구공의 경우에 심성, 즉 체험의 역할의 대단히 작거나, 또는 (화이트헤드가 서술하는 경향이 있듯이) 무시할만하다. 그럼에도, 심성은 실존하는데, 최소한 그것은 구조적으로 현존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체험은 잠재적으로 현존하지만, 현실적으로는 거의 전적으로 현존하지 않는다. 그런데 상황이 이렇다면, 그것은 체험이 자체적으로 가능태의 각인이기 때문이다. 다른 한 당구공에 의해 부딪치는 강력한 충격은 바로 가능태의 파악, 즉 이해이다. 화이트헤드에 따르면, 가능태, 즉 개념적 파악은 항상 그가 "영원한 객체" 또는 "순수한 가능태"라고 부르는 것―그리고 이것은 결국 다른 철학자들이 "감각질"이라고 부르는 것과 동등하다―에 대한 지각이다. 감각질―예를 들면, 붉게 타는 저녁놀―에 대한 이해는 고유하고 환원 불가능한데, 대체로 그렇듯이 그것은 유쾌하게 그리고 불쾌하게 느껴지기 때문이고, 그리고 그것이 느껴지는 한에 있어서, 그것은 잠재태와 대조를 함축하기 때문이다. 잠재태로서의 붉음은 단순히 하나의 성질 또는 이 특수한 순간, 이 특수한 저녁놀의 한 측면을 넘어선다. 붉음에 대한 내 감각은 이 장면이 바뀔 수 있을 것이고, 그래서 결국은 붉지 않게 될 것이라는 점을 함축한다. 게다가 다른 무언가가 붉음으로 물들 수 있을 것이라는 점도 함축한다. 그리고 저녁놀에 대한 나의 정동적 반응은 이런 붉음에 대한 나의 선호 또는 비선호, 다른 붉은 것들에 대한 전망 또는 붉음 자체가 사라질 것(해가 완전히 지게 되면 그렇듯이)이라는 전망으로 확대되는 반작용과 관련이 있다.

 

그러므로 체험, 즉 개념적 느낌은 항상 어떤 "가치 평가"과정을 수반한다. 화이트헤드는 이런 가치 평가 과정들이 대체로 무의식적이라고 간주한다는 점에서 인지주의자들에 동의한다. 그런데 그는 가치 평가 자체를 하나의 "인지적" 과정으로 간주하지는 않는데, 그것은 "지금은 없지만 있게 될지도 모르는 것의 실현을 수반하는 불안정의 원리를 자체 속에 간직하고 있는..." "욕구"와 훨씬 더 많이 관련되어 있다. "모든 물리적 체험는 그것을 지속시키려고 하거나 지속시키지 않으려고 하는 욕구를 동반한다." 이런 식으로 심성(즉 체험)은 존재하는 것에 대한 계산과 표상일 뿐 아니라, 어떤 가능한 참신성을 향한 갈구를 수반한다. 이것의 결과로서 체험은 항상 일종의 결단을 내린다. 그리고 화이트헤드의 경우에, 그런 결단은 "현실태의 바로 그 의미를 구성한다."

 

화이트헤드가 말하듯이, 체험은 환원시킬 수 없을 정도로 사적인 것인데, 이것은 내가 자기 체험과는 별개로 다른 누군가의 체험을 관찰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만 역시 다른 시각에서 제시하듯이, 자기 체험을 관찰할 수 있는 능력의 크기에 대해서도 한계점이 존재할 것이다). 체험의 사사성은 데카르트에서 흄까지 근대 서양철학 전체에 걸쳐서, 그리고 20세기에 이르기까지 발견되는 회의주의를 부추겼다. (여기서 나는 비트겐슈타인과 카벨 같은 사상가들에 의해 주어진 회의주의에 대한 해결책, 또는 회의주의의 역설들의 해소를 포함한다). 그런데 화이트헤드의 경우에, 사적 체험을 구성하는 결단은 그것을 공적인 것으로 그리고 잠재적으로 의식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이기도 하다. 결단은 의식 또는 인지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결단은 의식, 인지 그리고 공적 관계성을 애초에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다. "느낌", 즉 "욕구"의 운동이 심성(또는 "내향성", 또는 "질적 체험")의 기본 요소이다. 인지, 의식 그리고 책임성은 이런 기본적 심성의 결과물이지, 그것에 대한 전제 조건들이 아니다. 결단의 미학(감각학)이 인지와 의식에 선행하며 그것들의 근거가 되는 것이지, 이것들 가운데 어느 것이 결단의 과정에 대한 근거 또는 전제 조건이 되는 것은 아니다. 내가 결단의 "미학(감각학)"이라고 말하는 까닭은 그것이 비인지적 과정이고, 그래서 일반화할 수 없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화이트헤드의 해설에 따르면, 결단이 어떻게 사사성에서 공공성으로 이어지는지에 대한 문제는 독특한, 비인지적, 비개념적 미학(감각학)적 판단이 그럼에도 공적인 것으로 되는 바로 그 과정을 통해서 보편성의 자격을 갖출 수 있게 되는 방식에 대한 칸트의 문제를 변형한 것이다.

 

나는 여기서 멈출 것이다. 이것을 더 자세히 해명하는 대신에(확실히 수행해야 할 필요가 있다) 나는 결단으로서의 체험이라는 화이트헤드의 관념과 최근에 물리과학과 생물과학에서 이루어진 어떤 사변을 단순히 결합시킴으로써 매듭지을 것이다. 이것은 이미 내 책에 실려 있는 사변의 일부를 증보하는 것이다.

 

"자유의지는 환상인가(Is Free Will An Illusion)?"라는 최근의 글에서 생물학자 마르틴 하이젠베르크(Martin Heisenberg)는 생물학적 유기체들이 내리는 "결단"에 대해 비슷한 주장을 제시한다. 박테리아, 초파리 그리고 다른 유기체들에 대한 실험들로부터 논증하면서 하이젠베르크는 그런 유기체들이 "감각 입력"에 독립적인 "행동 출력"을 나타낸다고 진술한다. 즉, 이런 유기체들은 "다른 무언가 또는 누군가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자체적으로 결정되"는 "행동을 적극적으로 개시한다". 박테리아와 초파리뿐 아니라 식물과 점균류에 대한 연구들은 그것들이 일어나는 환경, 즉 그것들이 반응이 되는 조건에 의해 인과적으로 결정되지 않는 "결단"에 대한 개별적 사례들을 제시한다.

 

살아 있는 모든 유기체들에 있어서 결단을 인정하는 것은 일종의 생기론을 가리키는 듯 보일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전통적 생기론과 사뭇 다를 것인데, 그것은 어떤 종류의 고유한 생기력이 생물을 무생물과 본원적으로 다르게 만들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화이트헤드가 말하듯이, 생명과 무생명 사이의 경계선은 흐릿하고, 생명의 심성 또는 결단성은 생명에 본질적인 것이지만 생명에 배타적인 것은 아니다. 심성은 위에서 아래로 빠짐없이 걸쳐 있다.

 

이런 노선들을 따라, 물리학자 존 H. 콘웨이(John H. Conway)와 사이먼 코헨(Simon Kochen)은 그들이 강한 자유의지 정리(Strong Free Will Theorem)이라고 부르는 것을 제안한다. 콘웨이와 코헨에 따르면, 양자 얽힘의 결과로서 일어나는 어떤 조건에서 아원자 입자들은 "자유롭게", 즉 비결정론적으로, 그 어떤 사전의 물리적 사건들에 의해서도 제약받지 않은 채 반응한다. 실험자들이 그들이 측정할 여러 가능한 매개변수들 가운데 어느 것을 선택함으로써 불확정된 양자 상태를 붕괴시킬 때 그들은 "자유롭게" 작용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면, 마찬가지로 측정되는 입자가 이 매개변수에 어느 값을 부여할지 "선택"할 때 그 입자는 "자유롭게" 작용하고 있다. 이것이 옳다면, 광자조차도 어떤 종류의 내적 "체험"을 겪고, 그래서 일종의 "결단"을 내린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