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상 움직이고 있는 생명
Life's restlessness
생명은 왜 무질서에 저항하는가? 최초의 복제하는 분자가 생성된 이래로 다른 한 종류의 안정성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생물학은 굉장히 기묘한데, 매우 친숙하지만 물리학과 화학과는 두드러지게 다르다. 우리는 생기 없는 물질과 관련하여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다. 아이작 뉴턴(Isaac Newton) 이래로 줄곧 그것은 기본적으로 기계적인 자연관에 상응하는 것인데, [생기 없는 물질은] 아무 목적도 고려하지 않은 채 자연 법칙들을 맹목적으로 좇는다. 그런데,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가 서술했듯이, 풀잎의 뉴턴은 존재할 수 있을까? 살아 있는 것들은 물질 세계의 나머지 것들―'죽은' 원자와 분자들―과 동일한 기본 재료로 이루어져 있을 것이지만, 결코 같은 방식으로 행동하지는 않는다. 사실상 그것들은 매우 목적지향적인 듯 보여서 근대과학의 나머지 부분이 정초된 유물론 철학을 거부한다.
찰스 다윈(Charles Darwin) 이후에도 우리는 그런 차이를 두고 계속 다툼을 벌이고 있다. 생물학자는 누구나 인식할 것처럼, 기능과 목적은 물리과학에서는 오래 전에 추방되었지만 생명과학에서는 여전히 주요한 주제이다. 그런데, 살아 있는 것들은 어떻게 우리의 기계적-기계론적 우주와 조화를 이룰 수 있는가? 물론 이것은 개념적 문제이지만 역사적 차원도 존재한다. 지구 생명은 실제로 어떻게 생성되었는가? 그것은 어떻게 생성될 수 있었을까? 추상적 층위에서 그리고 우리 세계의 특수한 이야기 속에는 생물 영역과 무생물 영역 사이에 간극이 있는 듯 보인다.
나는 그 간극을 연결하는 것이 이제 가능하다고 믿는다. 그런데 그 방법을 설명하기 전에, 현대생물학이 일반적으로 그것을 어떻게 다루어왔는지 언급할 가치가 있다.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현대생물학은 그 문제를 '너무 단단한' 바구니에 떨어뜨리고 외면해왔다. 이것은 생물학을 물리학과 화학으로부터 차단하고 별개의 과학철학을 발전시킨다는 점을 의미했다. 20세기의 선도적인 진화생물학자들 가운데 한 사람인 에른스트 마이어(Ernst Mayr)는 공개적으로 '생물학의 자율성'을 변호했다. 물리학과 화학은 무생물을 다루는 반면에 생물학은 살아 있는 체계를 다룬다고 그는 역설했으며, 그리고 최소한 당분간은 그렇다.
그런데 이것은 충분히 좋지는 않다. 자연은 하나이다. 과학은 일반화하려고, 통일하려고 노력한다. 생명의 목적추동적인 특성은 우주의 물질적 본성에 대한 우리 이해에 여전히 이의를 제기한다. 우리는 그것을 내버려 둘 수 없다. 그리고 기쁘게도 그럴 필요가 없다.
나는 체계 화학(systems chemistry)이라는 새로운 분야에 끌린 이론화학자이다. 그것은 내가 복제하는 분자들과 그것들이 확립하는 반응 연결망들에 관심이 있다는 점을 의미한다. 최근에 이 분야에서 이루어진 어떤 연구는 생물학이 바로 어떻게 기계적 세계로 복귀될 수 있는지 보여주는 듯 보인다. 이 복제자들은 마이어의 거대한 분과학문적 간극을 무사히 건너간다. 내 동료들의 실험실에서는 생물 영역과 무생물 영역이 서로 배어든다.
그래서 현재 물리학과 화학 그리고 생물학의 개념적 통일이 진행 중이다. 새로운 통찰들이 꾸준히 나타나고 있다. 사실상 첫 번째 중요한 통찰은 바로 지구 생명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에 대한 의문과 관련되어 있다.
무생물에서 단순한 생명이 출현한 그 과정에 붙이는 이름은 '자연 발생(abiogenesis)'이다. 다른 한편으로, 진화는 생명이 다윈의 '끝없는 가장 아름다운 형태들'로 갈라지는 생물학적 메커니즘이다. 전통적으로, 이것들은 전적으로 다른 것으로 간주되는데, 자연 발생은 자연의 가장 큰 불가사의들 가운데 하나이고, 진화는 다윈 덕분에 대체로 이해된 상태이다. 그런데, 체계 화학을 통해서 그것들은 단일한 연속적인 진전으로 밝혀진 상태이다.
이제 우리는 다윈적 진화와 유사한 어떤 메커니즘이 우선 무생물―심지어 단일한 분자들―에 실제로 작동한다는 점을 알고 있다. RNA 분자들의 개체군에 적절한 화학적 구성 요소들을 공급하면, 그것들은 자기복제하기 시작할 것이다. 게다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개체군이 진화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인데, 빠른 복제자들이 느린 복제자들을 대체할 것이다. 그 어떤 유의미한 의미에서도 RNA는 살아 있는 물질이 아니지만, 그럼에도 그것은 진화를 겪는다. 그러므로 생물과 무생물 사이를 연결하는 최초의 다리가 발견된다.
두 번째 통찰은 훨씬 더 중대하다. 진화는 식별할 수 있는 추동력, 원한다면 방향을 나타내며, 그리고 이런 '목적론적' 경향은 화학적 단계와 생물학적 단계 둘 다에서 작동하는데, 즉 그것은 자연 발생으로 간주되는 과정 동안뿐 아니라 그 후에도 작동한다. 그러므로 생명의 목적추동적인 특성―생물학을 자연의 나머지 부분과 구별짓는 듯 보였던 바로 그것―은 결국 생명에 고유한 것이 아닌 것으로 판명된다. 어떤 무생물 체계들이 자기복제적이고 진화할 수 있다면, 그것의 개시는 이미 그런 무생물 체계들에서 식별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추동력은 엄밀하게 물리적인 견지에서 서술될 수 있다.
간단히 말하자면, 그것은 더 큰 안정성을 향한 자연의 충동인데, 그것은 생물학과 마찬가지로 물리학에서도 편재하는 충동이다.
여기에 여러분을 위한 작은 진실이 존재한다. 변하지 않는 것은 변하지 않고 변하는 것은 변하는데, 변하지 않는 것으로 변할 때까지 변한다. 물론, '일 더하기 일은 이'라는 것이 참인 것처럼, 이 진술은 논리 문제로서 참이다. 그리고 '일 더하기 일은 이'라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것은 세계가 작동하는 방식에 대한 놀랍도록 강력한 예측들을 제시하는 것으로 판명된다. 모든 변하는 것이 정말로 변하지 않는 것으로 변할 수 있다면, 변하는 것들은 모두 결국에는 변하지 않는 것으로 변할 것이라고 예상해야 한다.
과학과 일상 생활 둘 다에서 우리는 안정성에 관해 많이 이야기한다. 그것은 두 맥락에서 거의 동일한 것, 즉 시간이 지남에 따라 오래 지속되는 영속적인 불변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앞에서 언급한 작은 논리적 진실의 예측에 맞게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사물들은 일반적으로 더 안정해진다고 말하는 물리학과 화락의 법칙이 실제로 존재한다. 나는 과학 전체에서 가장 유명한 법칙들 가운데 하나인 열역학 제2법칙을 언급하고 있다.
열역학 제2법칙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어떤 것들은 여전히 불변인 채로 있는 까닭과 변화의 방향을 설명한다. 그 설명은 에너지의 견지에서 주어질 수 있다. 높은 에너지는 불안정성과 관련되어 있다. 낮은 에너지는 안정성과 관련되어 있고, 그래서 어떤 물리적 체계가 자체의 가장 낮은 에너지 상태(평형)에 이르게 되면 변화는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다.
이 법칙은 얼마나 만연하는가? 1870년대에 오스트리아 물리학자 루트비히 볼츠만(Ludwig Boltzmann)이 엔트로피라는 개념을 통해서 수학적 논리를 밝힌 이래로 줄곧 일반적인 견해는, 전체 우주는 최종적인 낮은 에너지 상태, 이른바 무한히 지속되는 형태의 '열사'를 향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열역학 제2법칙에 의해 예측되는 안정성은 진실의 특수한 일례에 불과하다는 점을 인식하자. 모든 사물들―아마도 전체 우주도 포함하여―에 대해 안정성이 길의 종점이기 때문에 사물들은 영속적인 형태를 향해 가는 경향이 있다.
엔트로피의 수학을 잠시 살펴보자. 열역학 제2법칙은 우주와 관련된 완강한 사실일 뿐이라고 간주되곤 했다. 에너지는 어떤 식으로 흐르고, 에너지를 일로 변환시키려고 할 때 직면하게 되는 어떤 기본적인 한계들이 존재하며, 그리고 그것이 전부였다. 즉, 볼츠만의 엔트로피 표현 형식이 이런 경험적 관찰들이 어떻게 심원한 필연성을 드러내는지 설명할 때까지 그러했다. 그것들은 수학적 확률 이론 자체에서 전적으로 자연스럽게 도출된다.
엔트로피란 무엇인가? 간단히 서술하면, 엔트로피는 물리적 체계의 질서정연함에 대한 척도이다. 엔트로피가 낮은 상태는 그 어구의 일상적 의미와 매우 유사한 의미에서 '대단히 질서정연'하다. 정돈된 책상, 반듯하게 쌓인 종이, 필통에 꽂힌 펜들을 그려보자. 질서가 감소하여 책상이 더 난잡해짐에 따라 엔트로피는 증가한다.
그런데, 책상의 모든 가능한 배치는 확률이 동등하다고 가정하자[...]. 물론 정돈되는 방식들보다 난잡해지는 방식들이 엄청나게 더 많이 존재한다. 그래서 책상이 난잡해질 확률이 높다. 결국 난잡한 상태들의 수가 정돈된 상태들의 수를 넘어선다. 수의 무게는 난잡한 상태 쪽에 놓이게 된다. 게다가, 배치에 대한 그 어떤 무작위적인 변화도 배치를 훨씬 더 난잡하게 만들 확률이 높다. 그런데, 무작위적인 변화는 충돌과 요동의 형식으로 끊임없이 일어난다. 그래서 시간이 지남에 따라 사물들은 더 안정해진다(그리고 더 난잡해진다). 우주가 변화를 겪음에 따라 엔트로피는 증가한다.
하지만 높은 엔트로피와 낮은 에너지는 안정성의 한 표현일 뿐이다. 자연은 다른 표현들을 제공하는가? 그렇다. 에너지적으로 대단히 불안정할 때에도 물질은 오래 지속될 수 있다는 점이 판명된다. 사실상 그것이 바로 복제자들의 세계에서 발견되는 것이다.
생물은 엔트로피가 낮고 에너지를 소모하며, 그래서 열역학적 의미에서는 불안정하다. 그럼에도 생물은 여전히 일정 기간 동안 지속된다는 의미에서 두드러지게 안정적일 수 있다. 어떤 복제 개체군들(예를 들면, 어떤 박테리아 균주들)은 엄청난 기간―수백 만년, 심지어 십억 년―동안 거의 변하지 않은 채 유지되었다. 그것들은 역동적인 운동 안정성(DKS, dynamic kinetic stability)으로 불리는 것을 나타낸다. 그리고, 엔트로피와 마찬가지로, DKS는 단순한 강력한 수학에 의해 추동되는 것으로 판명된다.
사실상 그것은 기하급수적 성장의 수학에 의존한다. 이것은 자기복제 체계들에서 흔히 관찰되는 유형이며, 그런 체계들은 물리적일 필요도 없다. 일 달러에서 시작한다고 가정하자. 매주 두 배로 증가하면, 일 년이 지났을 때 여러분은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이 될 것이다(아무도 여러분의 비밀을 알아내지 못한다고 가정하자). 오 년 동안 더 지속되면 여러분은 관찰 가능한 우주 속에 존재하는 원자들의 수보다 더 많은 달러를 소유할 것이다. 올바른 환경에서 자기복제 분자 체계들은 동일한 폭발적인 경로를 개시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에 의외의 급변이 존재한다. 그것들이 행하면 새로운 종류의 화학이 출현한다. 궁극적으로, 우리가 생물학이라고 부르는 것을 초래하는 것은 바로 이 새로운 화학이다.
그런 변형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었을까? 왜 복제 분자들은 복제 세포들로 대체되는가? 한 낱말로 말해서, 진화이다. 또는 네 낱말로 말하자면, 복제, 변이, 경쟁, 선택이다.
복제자들은 항상 자체의 완전한 사본들을 만들지는 않으며, 복제자들의 변양태들은 원본들과 자원을 놓고 경쟁해야 한다. 원본과 '나쁜' 사본 둘 다 기하급수적 성장을 향해 가는 동일한 경향―자원이 고갈되지 않는다면 어느 것도 멈추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을 공유하기 때문에 결국 더 효과적인 복제자가 덜 효과적인 복제자를 소멸시킨다. 따라서, 더 짧게 지속되는 복제자는 더 길게 지속되는 복제자로 진화하는 경향이 있다. '정상적인' 화학적 세계에서와 꼭 마찬가지로, 복제 세계에서의 변화도 더 큰 안정성을 향해 정향된다. 다시 한번, 그것은 수의 무게로 귀결된다.
그런데 두 가지 큰 차이점이 존재한다. 첫 번째 것은 이렇다. 복제 세계에서 안정성은 에너지 양과 무관할 수 있다. 열역학적 입출력의 균형을 유지하는 대사 에너지의 원천이 존재한다면 무엇이든 괜찮다. 그래서 이것은 진정으로 다른 종류의 안정성이다.
두 번째 차이점은 파악하기가 조금 더 어렵다. 엔트로피의 경우에, 수의 무게는 항상 동일한 방향에 놓여 있다. 그 때문에 상황이 단순해지는데, 모든 것은 무작위성과 무질서을 향해 가는 경향이 있다. 반면에, DKS의 경우에, 안정성은 변덕스럽다. 어떤 복제자들은 사실상 놀랍도록 지속 가능하지만, DKS는 항상 상황 의존적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환경 조건이 바뀌면 복제 경쟁의 승자가 바뀔 수 있다. 사실상 그것이 바로 생명을 매우 변덕스럽게 만들고 진화 경로를 대체로 예측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인데, 복제의 수학은 생명을 역설적으로 안정을 찾아서 쉬지 않고 움직이게 만든다.
생명은 왜 그렇게 복잡한가? 여기에 이제 우리가 대답할 위치에 있는 명백히 영원한 다른 한 수수께끼가 존재한다. 슬프게도 많은 체계 화학자들이 알게 되었듯이, 가장 단순한 분자 복제자들은 전적으로 변덕스러울 수 있다. 그것들이 복제하도록 만들기 위해서는 멋진 실험실, 전문적인 장치와 헌신적인 연구자들이 필요하며, 그리고 그 떄에도 어떻게 될지 모른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생물학적 복제자―생물―들은 이례적으로 강건하다.
가장 단순한 생명 형태인 박테리아를 고려하자. 대단히 복잡한 이 존재자들은 어느 곳에서나 [...] 꽤 잘 생존하여 번성할 수 있다. 모든 생물의 과도한 복잡성은 단 하나의 이유, 즉 복제 기능을 촉진하기 위해 출현했는데, 그렇게 함으로써 복제 체계의 안정성을 향상시킨다.
그런데, 그런 이례적인 복잡성은 어떻게 생성되었는가? 물론, 해답은 한 번에 하나씩이다. 최근에 캘리포니아주 라욜라 소재 스크립스 연구소의 화학 교수 제럴드 조이스(Gerald Joyce)는 단일한 복제 RNA 분자가 자체적으로는 어떻게 비교적 비효율적인 복제자인지 예증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각 RNA 분자가 나머지 RNA 분자의 형성을 촉진하는 두 분자 RNA 복제 연결망은 훨씬 더 효과적이다. [...] 그래서 복잡성과 기능은 병행한다. 조이스의 RNA 실험은 천 마일 여행―엄청나게 효과적인(그리고 지나치게 복잡한) 복제자, 즉 박테리아 세포를 향한―의 (개념적) 첫 걸음을 예증한다.
마지막으로 자연의 두 가지 물질적 측면―생물과 무생물―의 비밀에 집중하자. 두 가지 수학적인 안정성 엔진이 존재하기 때문에 생물 형태와 무생물 형태가 생성되었다. 볼츠만은 더 친숙한 열역학적 안정성 엔진을 보여주었지만, 나머지 것은 영국 목사 토머스 맬서스(Thomas Malthus)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결국, 생물학적 맥락에서 기하급수적 성장의 심대한 결과들을 최초로 인식했던 사람은 1790년대에 기근의 경제학을 연구하고 있었던 맬서스였다. 맬서스로부터 다윈이 출현했고, 그 다음에 계속해서 체계 화학의 창시자들―졸 슈피겔만(Sol Spiegelman), 만프레드 아이겐(Manfred Eigen), 레스릴 오겔(Leslie Orgel), 귄터 폰 키에드로프스키(Gunter von Kiedrowski) 등―이 출현했다.
물론, 일단 두 가지 별개의 안정성 종류―확률과 에너지에 의거하는 것과 기하급수적으로 추동된 자기복제에 의거하는 것―의 존재를 인식하면, 모든 생물의 목적론적 특성에 대한 이유는 명백해진다. 논리 자체에 의해 관장되는 자연의 가장 근본적인 충동은 더 큰 안정성을 향해 가는 것이다. 그런 충동은 편재하는 열역학 제2법칙을 통해 표현되는 대로의 열역학적 표현도 있지만, 운동학적 표현, 즉 점점 더 오래 지속되는 복제자들을 향한 충동도 있다. 두 가지 수학, 두 가지 물질적 형태. 이런 구분은 정확히 생물과 무생물 사이의 경계선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설명하며, 더욱이 생명의 여타 수수께끼들 가운데 많은 것을 설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