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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서니 애과이어: 빅 퀘스천-시간에 대한 이해는 실재의 본성에 대해 무엇을 제시하는가?

 

시간에 대한 이해는 실재의 본성에 대해 무엇을 제시하는가?

What Does Our Understanding of Time Suggest About the Nature of Reality?

 

―― 앤서니 애과이어(Anthony Aguirre)

 

지금 당장, 이 순간에 한 노인이 마지막 숨을 내쉬고 있다. 어딘가 다른 곳에서는 젊은 두 연인이 첫 키스를 나눈다. 훨씬 더 먼 곳에서는 두 개의 소행성이 조용히 충돌한다. 이웃하고 있는 항성 주위를 공전하는 행성에 태양이 떠오른다. 바로 이 순간에 멀리 떨어진 은하에서 초신성 하나가 폭발한다.

 

그런데 명백히 우주 전체에 걸쳐 있는 '바로 이 순간'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 시공간에 대한 최고의 근본적인 이론인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은 동시성에 대한 단일한 객관적인 정의를 명백히 배제한다. 한 관찰자의 추정에 의해 '지금' 일어나고 있는 사건들은 멀리 떨어져 있거나 전자에 상대적으로 운동하고 있는 다른 한 관찰자에 따르면 마찬가지로 타당하게도 상이한 시점에 일어난다고 할 수 있다. 여기 지구에서는 이런 쟁점이 대체로 인식되지 않지만, 우주론의 사례의 경우에는 그것이 매우 분명해지는데, 그 경우에는 '지금'을 규정하는 방식이 우주가 균일하게 보일지 여부를 결정할 수 있으며, 심지어 우주가 유한한지 아니면 무한한지 결정할 수 있다.

 

그런데 잠깐만. 물론 '지금'은 실재적이다. 왜 공룡은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가? 왜 로마는 멸망했지만, 페가수스 자리 51 근처의 행성은 아직 식민화되지 않았는가? 왜 아이폰은 발명되었지만 아이포탈은 아직 발명되지 않았는가? 왜 지난 문단은 읽었지만, 다음 문단은 아직 읽지 않았는가? 이런 사건들이 이미 일어났는지 여부는 멀리 떨어져 있는 은하에 있는 어떤 존재자에게 모호할 것이지만, 그 존재자는 이 사건들을 관찰할 수 없다. 관찰할 수 있는 우리들에게 그런 구별짓기는 명료하다.

 

그런데 또 다시, 그러한가? 아인슈타인은 시간의 이행은 근본적으로 허구라고 믿게 되었는데, 우주 영화의 프레임들처럼 사건들은 모두 시공간 전체에 걸쳐 전개되며, 우리로 하여금 그것들을 순차적으로 지각하도록 요청하는 것은 우리의 한정된 본성일 뿐이다. 동시성의 상대성이 그런 확신의 일부를 형성했지만, 그것은 그 점을 넘어섰다. 뉴턴 역학, 맥스웰의 전자기학 그리고 많은 다른 물리 이론들과 함께 일반 상대성은 수학적 결정론 또는 '일의성(unitarity)'이라는 특징을 공유하는데, 어느 시점(어떻게 규정되든 간에)에 한 계에 대한 완전한 서술이 주어지면 그 계는 모든 이전 시점과 이후 시점에서 유일하게 결정된다. 그것은 우주 영화의 어떤 프레임을 취하여 특수한 화학물질을 첨가함으로써 그 영화의 선택된 다른 프레임을 드러낼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각 프레임 속에 모든 프레임이 숨어 있다면, 과거 또는 미래가 현재보다 실재적이지 않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는가? 아인슈타인이 최근에 소중한 사람을 잃어버린 친구에게 말했듯이, "물리학을 신봉하는 우리 같은 사람들은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의 구분은 완강히 지속하는 환영일 뿐이라는 점을 알고 있다." 왜 살아 있는 누군가를 애도하는가?

 

그런데, 아인슈타인이 그렇게 말했더라도, 그것은 터무니 없는 듯 보인다. 우리는 과거를 기억하지만, 과거에 영향을 미칠 수는 없다. 우리는 미래를 예측하고 그것에 영향을 미치려고 시도할 수 있지만, 그것을 회상할 수는 없다. 물리 법칙들은 과거와 미래를 구별짓는다. 특히, 가장 기본적인 법칙들 가운데 하나인 열역학 제2법칙은 엔트로피―한 계의 상태가 얼마나 '일반적'인 듯 보이는 것에 대한 척도―가 과거가 아니라 미래를 향해 증가한다고 말한다. 따라서 우주는 시간 증가의 방향을 가리킨다는 점에서 내장된 분명한 '시간의 화살'이 있다.

 

그런데, 우주에 대한 적절한 경계 조건이 주어지면, 이런 시간의 화살은 그런 구별짓기를 전혀 용납하지 않는 물리학의 유니타리(unitary) 법칙들을 사용하여 설명할 수도 있다. 이런 조건이 세계가 훨씬 더 낮은 엔트로피를 갖는 시점이 있다는 점을 규정한다면, 엔트로피가 이 시점부터 증가하는 것은 거의 확실히 자연스럽고, 그래서 그것은 '과거'로 불릴 수 있다. 이런 열역학적 시간의 화살은, 우리가 왜 미래가 아니라 과거를 기억하는지와 같은 다른 의문들을 설명하는 데 사용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유니타리'가 정말 물리학의 모든 법칙들을 서술하는지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두 개의 구별 가능한 양자택일의 값 A와 A'을 갖는 어떤 특성 P―예를 들면 '색깔'―를 나타내는 물리계를 가정하자. 물질이 어떻게 거동하는지에 대한 핵심 이론인 양자역학은 그 계가 A와 A'이라는 두 값을 모두 갖는 조합된 '중첩 양자 상태'에 처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어떤 장치로 P를 측정하면 어떻게 되는가? 이론적으로는, 장치 자체에 어떤 양자 상태가 부여될 수 있고, 그래서 그것이 물리계를 '측정'하면, 계+장치 조합은 A를 측정한 장치와 A'을 측정한 장치를 가리키는 장치들의 중첩으로 유니타리적으로 진화한다. 그렇지만, 양자 '결풀림(decoherence)'으로 알려져 있는 현상이 이런 장치 층위의 중첩이 두 개의 확연히 다른 고전적 계처럼 거동한다는 점을 확실하게 하는데, 그래서 그것들을 연결하는 양자 거동에 대한 그 어떤 징후도 나타내지 않는다. 또한 그것은, 엔트로피는 본질적으로 결코 감소하지 않는다는 사실과 밀접히 연관된 이유들 때문에 역의 과정―거시적으로 확연히 다른 두 개의 계가 하나로 조합되는 과정―은 본질적으로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는 점을 가리킨다.

 

수학은 A 그리고 A'을 가리키는 반면에, 우리가 관찰하는 것은 A 또는 A'인데, 그것이 고전적으로 거동하는 장치의 본질적인 부분이다. '그리고'를 '또는'과 화해시킬 수 있는 방법이 여태까지 많은 글들이 쓰여진 매혹적인 의문이다. 그런데 시간에 대한 의문과 관련하여, 제안된 많은 화해책들이 비슷한 특징을 나타내는데, 세계가 유니타리적으로 진화하는 서술이 존재할 수 있는 한편, 관찰된 실재의 층위에서 세계는 다중의 분기점과 가지들을 포함했다.

 

물러나서 생각해보면, 시간의 본성에 대한 상당히 다른 대조적인 두 견해가 있는 듯 보인다. '유니타리 블록(Unitary Block)'이라는 한 견해에 따르면, 시공간과 양자 상태들은 "모두 한꺼번에' 전개되어 있으며, 어떤 경계 조건에 의해 최종적으로 규정된다. 어느 시점에서도 모든 것은 다른 어느 시점에 의해 유일하게 결정되고―그러므로 암묵적으로 포함된다―그래서 세계는 과거와 미래 사이에 그 어떤 구별도 나타내지 않는다. 그와 동시에, 우리가 실제로 거주하고 관찰하는 '체험된 세계'는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를 매우 명료하게 구별짓고, 엔트로피를 생산하며, 단일한 현재 실재와 다양한 가능한 미래 실재들 사이의 분지를 허용한다.

 

박식하고 사려 깊은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 역설에 대한 세 가지 기본적인 견해가 존재하는 듯 보인다.

 

1. 유니타리 블록은 근본적인 것이고, 그래서 의미상 더 참된 서술이다. 시간의 화살, 명확한 실험 결과 등과 같은 것들은 우리가 충분히 정확한 계산을 수행할 수만 있다면 '오로지' 근본적인 서술로 환원될 수 있는 창발적 현상이다.

 

2. 유니타리 블록은 어떤 본질적인 방식으로 잘못된 것이다. 더 올바른 견해는 훨씬 더 체험된 세계와 유사할 것―그리고 훨씬 더 쉽게 조화를 이룰 것―이다.

 

3. 체험된 세계가 유니타리 블록보다 근본적이다. 유니타리 블록은 매우 특수한 체제 속에서 체험된 세계의 규칙성들에 대한 올바른 서술일 뿐이다.

 

여태까지 이론물리학자들 사이에서는 견해 1이 가장 일반적이지만, 나는 그것을 포용하기 전에 신중하게 생각해야 하는 까닭에 대한 세 가지 논변을 제시할 것이다.

 

첫 번째 논변은, 체험된 실재의 미래 또는 과거 사건들은 원칙적으로도 유니타리 블록을 구성하는 진화 법칙과 상태들에 대한 그 어떤 정도의 정확한 지식을 사용하더라도 정확히 예측될 수 없다는 것이다. 양자역학의 '분지' 거동이 분명한 한 가지 이유지만, 그것은 이것을 넘어선다. 체험된 실재 속 사건들에 대한 확률들을 정확히 계산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계산할 수 없다. 어떤 실험실 내의 가상적인 초존재자도 그 실험실에 급격하게 영향을 미치지 않은 채 그 실험실의 정확한 양자 상태를 결정할 수 없다는 것은 양자역학의 정리이다. 그런 수정이 허용될 때에도 나는 초존재자가 자체의 양자 상태를 정확히 결정하는 것 역시 불가능할 것이라고 추정한다. 게다가, 양자역학을 제쳐두더라도, 상대성 이론에는 어떤 시공간 점에서 관찰자는 미래의 어느 사건을 정확히 예측하는 데 충분한 정보를 자체의 과거로부터 수집할 수 없다는 점을 증명하는 엄밀한 논변들이 존재한다. 마지막으로, 계산 이론을 사용하여, 어떤 물리계가 의사 결정 장치(존재자)를 포함하고 있다면, 사실상 계가 결정 자체를 이끌어내도록 내버려두는 것보다 원칙적으로 더 잘 모사되거나 예측될 수 없는 결정들이 존재한다는 점이 증명되었다.

 

두 번째 논변은, 이론 F가 변하지 않은 채 이론 E가 전혀 달라질 수 없었다면, 일반적으로 이론 F는 '창발적' 이론 E보다 더 근본적이라고 서술되는데, 원칙적으로 이론 E는 다양한 상이한 이론들 F, F', F"에서 비롯되었을 수도 있다. 즉, F 이론들과 E 이론들 사이에는 다 대 일 대응이 존재한다. 그런데 그것은 유니타리 블록과, 예를 들면, 시간 방향 또는 양자 실험적 결과들의 견지에서 존재하는 체험된 세계 사이의 일 대 다 관계를 서술하는 부정확한 방식인 듯 보인다. 물리학의 법칙들도 이런 관계를 지니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끈 이론은 동일한 결과를 낳은 엄청나게 많은 매우 상이한 저에너지 유효 이론들을 갖는 단일한 고에너지 이론으로 구성된 듯 보인다. 이런 일 대 다 관계는 체험된 실재가 유니타리 블록이 결여하고 있는 정보를 포함하고 있다는 점을 의미한다. 이 에세이가 시작되었던 '지금'을 생각하자. 우주에 대한 상대론적 블록 서술을 사용하여 내일 날씨를 예측한다고 생각하자. '지금' 또는 '여기' 같은 것이 없다면 결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여기' 그리고 '지금' 그리고 (아마도) '양자 상태의 이 가지에서'와 같은 실재의 요소들은 '지표적 정보'로 불릴 수 있고 과학을 수행하는 데 중요하지만, 상대론적 블록에서는 존재할 여지가 없다.

 

세 번째 주장은 이것을 더 밀고 간다. 지표적 정보에 덧붙여, 체험된 실재에서는 중요하고 유의미하지만 유니타리 블록에서는 본질적으로 무의미한 것들이 존재하는데, 이것은 후자를 매우 빈약하게 만들어서 그 어떤 합당한 규정에 의해서도 실재에 대한 참된 서술로 간주될 수 없다. 원을 생각하자. 원은 수학적으로 규정된 대로, 사람들에 의해 상상되는 대로, 둥근 객체들에 의해 근접되는 대로, 그리고 모든 종류의 다른 방식으로 존재한다. 그런데 양자 상태 또는 유니타리 진화 규칙에는 아무 원도 존재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가상적인 초존재자에게 양자 무작위 수 생성 카드가 장착된 컴퓨터를 담고 있는 큰 상자를 제공한다고 생각하자. 시각 T에, 그렇게 생성된 무작위 수에 근거하여 컴퓨터의 복잡한 알고리듬이 스크린 위에 원 또는 사각형을 그린다. 원 또는 사각형을 생각하고 있는 한 사람이 점심으로 인도 음식을 먹을지 중국 음식을 먹을지 결정한다. 초존재자는 어떤 음식이 선택될지 예측할 수 있는가? 결코 그럴 수 없다. 그것은 양자 상태를 얻을 수 없다. 양자 상태를 얻었더라도, 초존재자는 카드로부터 생성되는 특수한 수를 예측할 수 없다. 그것은 트랜스지스터, 마이크로칩, 프로그램 등은 고사하고, 원 또는 사각형의 견지에서도 그리고 양자 상태의 견지에서도 생각할 수 없다. 게다가 이런 견지에서 생각하더라도, 그것이 반드시 예측을 모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어떤 의미에서도 시각 T에 그 결정이 우주의 상태에 '선재한다'는 것은 터무니 없는 듯 보인다. 그것들은 결코 실재의 동일한 평면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는가? 내가 보기에, 시간에 대한 이해는 자유의지와 행위주체성, 단일 우주 또는 다중 우주, 인식론 등과 같은 의문들에 대한 취지와 특질에 있어서 꽤 두드러지게 상이한 다중의 방식으로 동일한 세계를 유용하게 서술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한 특별히 생생한 예증이다. 이론물리학의 양태는 어떤 서술들을 더 '참'이고 '근본적'인 것으로 격상시키고, 여타의 서술들을 이것들로부터 '원칙적으로 도출할 수 있는' 것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었다. 나는 상이한 접근 방식을 숙고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응용들에서는 체험된 실재 서술이 '유니타리 블록'보다 훨씬 더 유용한 것과 꼭 마찬가지로, 체험된 실재를 유니타리 블록의 파생물이 아니라 그것에 상보적인 똑같이 참인 서술로 간주해야 한다. 아마도 시간의 본성은 진리의 본성에 관한 무언가를 말해주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