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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에르트 반 멘스부르트: 에세이-진짜 자연은 녹색이 아니다

 

- 이 글은 <<다음 자연(Next Nature)>>에 실린 코에르트 반 멘스부르트(Koert Van Mensvoort)의 에세이 <진짜 자연은 녹색이 아니다(Real Nature is not Green)>를 옮긴 것이다.

 

- 위키피디아에서 '다음 자연'이라는 개념을 이렇게 서술한다.

 

'다음 자연'은 탈근대적 철학과 관련된 개념으로 인간의 문화적 활동을 통해 새로운 자연이 출현한다고 말한다. 나무, 식물, 동물, 원자, 또는 기후라는 의미에서의 옛 자연은 인간에 의해 점점 더 통제되고 지배당하고 있다. 따라서 그것은 문화적 범주로 바뀌었다. 동시에 인간에 의해 통제되었던 문화의 산물들이 우리를 벗어나 자율적으로 되는 경향이 있다. 자연과 문화에 관한 우리의 일반적 관념들은 조정되고 있다. 다음 자연의 중심 관념은 자연을 정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들과 더불어 변화하는 역동적인 힘으로 여겨야 한다는 점이다.

 

- 코에르트 반 멘스부르트는 네덜란드의 미술가, 과학자, 디자이너, 발명가, 철학자, 의사, 블로거로서 다음 자연이라는 술어를 고안했다. 그의 작업은 사람, 매체, 그리고 기술 사이의 밀접한 관계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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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자연은 녹색이 아니다

Real Nature is not Green

 

 

네덜란드에서는 모든 땅이 인공의 풍경인데, 본래의 자연은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다. 오스트바르데르스플라센(Oostvaardersplassen)―네덜란드의 가장 중요한 자연보호구역들 가운데 하나를 구성하는―은 간척지가 만들어진 후에 원래 산업 부지였으며, 나중에서야 자연보호구역으로 바뀌었다. 네덜란드의 가장 인구가 밀집한 지역의 중심에 있는 '그린 하트(Green Heart)'도 실제로는 중세 산업지역인데, 원래는 잔디 도로를 위해 매립된 지역이었다. 따라서 우리의 '자연보호구역들'은 사실상 인간 활동에 의해 형성된 '문화보호구역들'이다. 십팔 세기에 볼테르(Voltaire)가 말했듯이, "신은 세상을 창조했다. 단 네덜란드만 제외하고. 네덜란드는 그들 스스로 창조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리고 그 이후로 줄곧, 네덜란드 사람들은 그의 견해에 부응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행했다. 오늘날 네덜란드에서는 심지어 자연을 적극적으로 설계하고 건설한다. 관료들이 지정한 장소들에 선사시대 숲들이 조성되고 있으며, 자연에 관한 심상은 재현적 흉내내기(자연 건설자들이 부르는 대로 말하자면, '우리의 잃어버린 유산의 재생'[1])에서 신중하게 구성되고 있다. 이런 이른바 '새로운 자연'에서는 전통적인 소 사육도 자리잡고 있다[2]. 불행하게도 원래의 야생 황소는 1627년에 멸종했지만, 스코틀랜드 하이랜드 소는 만족스러운 대안이다. 이 소들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아는데, 그것은 산림청의 관리 하에 있는 방목이다. 그것들 덕분에 풍경은 무성하게 우거진 대신에 여전히 깨끗하다(우리는 이것이 유명한 17세기 풍경화들을 떠올리게 하는 만큼 매력적임을 발견한다). 이론적으로 그 동물들은 스스로 돌봐야 하지만, 겨울에는 산림청이 기꺼이 그것들에게 약간의 추가 음식을 제공한다. 산림청은 산책객들이 오솔길에서 썩어가는 소 때문에 기분이 상하지 않도록 죽은 동물들도 치운다. 우리 문화에서 자연은 계속해서 잃어버린 세계로 제시된다. 그것은 원형성과 연관되는데, 일단 사라졌을 때만 나타난다. 우리의 자연 경험은 사후 효과이다[3].

 

자연이 항상 고요하고 평화로우며 조화롭다는 것은 널리 퍼진 잘못된 생각인데, 진정한 자연은 거칠고 잔인하며 예측불가능할 수 있다. 현대인들의 자연 경험은 주로 일요일 오후의 풍경, 성인들을 위한 디즈니랜드 같은 레크레에이션적 경험이다[4]. 사실상 그런 환상을 유지하는 데 많은 돈이 필요하다. 그렇지만 또한 자연은 굉장한 판촉 수단인데, 악어 원예용 연장, 재규어 컨버터블, 퓨마 운동복들이 있다. 자연적 은유들은 우리에게 친숙한 인식감을 준다. 광고에서 자동차들은 항상 훼손되지 않은 아름다운 풍경 속을 달린다. 로고와 브랜드들이 우리의 환경 도처에 존재하는데, 이런 가공의 시골에서 광고판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 점은 이상하지만, 우리는 새나 나무 종들보다 그것들을 더 잘 식별할 것이다. 내 이웃에는 사륜 구동 자동차가 거리 풍경의 중추적인 부분이 되었다. 이런 SUV(이전에는 지프나 사륜 오토바이로 알려진 스포츠 유틸리티 차량)은 스카이라인, 탐험자, 정복자, 그리고 대륙풍과 같은 강력한 이름을 갖는다. 운이 좋게도, 여러분은 바퀴의 테두리에 흩뿌리기 위한 분무 진흙을 구입할 수 있는데, SUV들은 거의 도로에서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 주변에는 언덕도 없으며, 사륜 구동을 정당화할 수 있는 눈이나 다른 날씨 조건도 없다. 도시 사파리에 합류하는 것는 그저 쿨할 뿐이다[5].

 

자연은 문화가 된다

 

자연과 문화 사이의 분할선은 그리기 어렵다. 새가 둥지를 지을 때 우리는 그것을 자연이라고 부르지만, 인간이 아파트 건물을 지을 때 그것은 갑자기 문화이다. 몇몇 사람들은 모든 것이 자연이라고 주장함으로써 그 문제를 피해가려고 노력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자연이란 문화적 구성물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그저 그 둘을 뭉뚱거리고 그것에 관해 생각하기를 그만두고 싶어진다.

 

'자연(nature)'이라는 단어는 라투라(natura)라는 라틴어 단어에서 파생되었다. 라투라는 피지스(physis)라는 그리스어 단어을 번역한 것이었다. 라투라는 '태어남'을 의미하는 라틴어 술어들과 관련이 있다(그리고 피지스는 '성장'을 나타내는 그리스어 단어들과 관련이 있다). 고대 그리스 시대에 자연과 문화 사이의 구별이 이미 중요하게 여겨졌다. 그때 이래로 여러가지가 변했다. 인간들에 의해 바뀌지 않은 물리적 물질이라는 의미에서의 자연은 이제 거의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석유화학 화장품, 마이크로프로세서, 그리고 합성 섬유(나는 그것들의 존재 조건들에 관해서 하나도 모른다)의 세상에 살고 있다. 내가 목욕 젤 방향제 하나를 다 사용하기도 전에 새로운 제품들이 더 빨리 출시된다. 쇼핑 센터, 웹사이트, 그리고 공항들이 우리의 환경을 지배한다. 인간들에 의해 여전히 훼손되지 않은 채 남아 있는 소중한 자연은 거의 없는데, 해저나 남극이나, 또는 달의 여기저기에 약간 있을 것이다. 자연과 문화, 인간과 동물, 그리고 신체와 정신 같은 낡은 개념들은 우리 자신과 우리가 살고 있는 기술사회를 이해하는 데 부적절한 듯하다[7]. 복제 아기, 무지개 튤립, 의학에 기여하기 위해 만성 암이 걸린 형질전환 쥐들은 자연적인가 아니면 문화적인가? 진화적 의미에서, 문화와 자연 사이의 모든 구별은 임의적인 것이 있는데, 다윈 시대 이후로 둘 다 동일한 진화적 기구의 부분이었다. 우리가 자연에 관해 말할 때, 사실상 우리는 항상 결코 자연 그 자체에 관해서가 아니라 자연에 대한 우리의 관계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자연은 항상 '자연이라 불리는 것'이다[8]. '자연적'이라는 술어와 '문화적'이라는 술어는 일반적으로 이런저런 입장을 정당화하는 데 동원된다. 십삼 세기에 토마스 아퀴나스(기독교 교부)는, 인간 지성이 자연적인 모든 것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에 예술이 자연이 모방한다고 믿었다. 반면에, 오스카 와일드(동성애자)는 자연이 예술을 모방한다고 주장했다[9]. 이런 사유에서 작은 한 걸음만 떼면, 자연은 우리들 사이에서만 존재하고 사실상 하나의 문화적 구성물일 뿐이라는 생각에 이른다. 자크 라캉(탈근대주의자)은 우리는 자연을 볼 수 없다고 주장한다[10]. 온건한 구성주의가 현재 철학자들과 과학자들 사이에서 폭넓게 수용되고 있다. 자연에 대한 우리의 심상은 여러 세기에 걸쳐 크게 변했다. 미래에 그것은 계속해서 개조될 듯하다. 이것이 우리가 자연을 계속 찾아야 할 필요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지는 않는다. 우리가 자연과 문화를 구별하는 방식은 여전히 유의미한데, 그것이 인간의 시각, 즉 자연에서 우리의 지위는 무엇인가에 관해 무언가를 말하기 때문이다.

 

하나의 대안적 접근방식은 자연적 과정과 인위적 과정을 구별하는 것이다. 몇몇 과정들은 인간 행위의 결과로서 일어날 수 있고, 다른 것들은 그럴 수 없다. 예를 들면, 스위치를 켜거나 해가 떠오르면 방이 밝아질 수 있다. 해돋이는 자연적 과정이며, 조명 스위치를 켜는 것은 인위적 과정이다. 이런 관점에서 바라보면, 문화적 과정들은 의도적인 인간 행위의 분명한 결과들이고, 문화란 무엇이든 인간들이 발명하고 통제하는 것이다. 자연은 그 밖의 다른 모든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삶에서 '자연이라 불리는 것'의 많은 부분은 인위적인 진본성을 지녔다. 유전자 조작 토마토들은 더 붉고, 더 둥글고, 더 크며, 심지어 농장에서 생산되는 것들보다 더 건강할지도 모른다. 저자극성 고양이들이 있고, 자연보호구역들이 다양한 아름다움으로 조성된다. 슈퍼마켓에서는 특수하게 제조된 생물체들을 구입할 수 있다. 인간의 설계가 자연을 자연적인 것보다 더 자연적으로 만들었는데, 이제 자연은 초자연적이다[11]. 그것은 결코 존재하지 않았던 자연의 흉내내기이다. 그것은 실재하는 것보다 더 나은데, 초자연적 자연은 항상 구식의 자연보다 약간 더 예쁘고, 더 멋지며, 더 안전하다. 정직해지자. 실제로 그것은 위장한 문화이다. 우리가 나무, 동물, 원자, 그리고 기후를 더 많이 통제하게 되면 될수록, 그것들은 더욱 더 자연적 특질을 상실하고 문화의 영역으로 들어오게 된다.

 

문화는 자연이 된다

 

여태까지 나는 새로운 것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 옛 자연은 더욱 더 급진적으로 계발되고 있음을 모두가 알고 있다. 그렇지만, 이런 의문이 든다. 정반대도 가능한가? 나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궁극적으로 우리가 자연 없이 살 수 있을 때까지 인간의 자연 통제가 지속적으로 증가할 것이라고 믿는 낙관적인 진보적 사상가들과는 대조적으로, 나는 우리가 자연을 완전히 지배할 수 있다는 관념은 환상이라고 주장한다. 자연은 우리와 더불어 변화하고 있다[12].

 

마이크로소프트사 창업자 빌 게이츠는 조명 스위치가 없는 집에서 산다고 한다. 그의 미래식 집은 조명을 조절하는 센서들과 소프트웨어로 가득차 있다. 자연인가 문화인가? 네덜란드의 보통 사람들은 허리케인이나 홍수보다 주택담보대출의 이자 공제에 대해 더 많이 걱정한다. 여러분은 컴퓨터의 스파이웨어와 바이러스들을 통제하는가? 자연에 대한 투쟁에 있어서 인간들은 점점 더 물리적 조건에 독립적으로 되어 온 것이 사실이지만, 동시에 기술 장치들, 다른 사람들, 그리고 자신들에게 더 의존적으로 되고 있다. 자동차 운전에 수반되는 의존성을 생각하자. 자동차 도로가 필요하고, 우리는 도로세를 지불한다. 교통 경찰이 배치되어야 한다. 일단 도로에 들어서면, 가드레일에 충돌하기 않도록 집중해야 한다. 다른 도로 사용자들을 고려해야 한다. 운전 면허증이 필요하다. A 지점에서 B 지정으로 더 빨리 이동하기 위해 이 모든 것이 필요하다. 물리적인 탈조절화와 더불어 사회적 및 심리적 조절화가 수반된다.

 

나는 자연과 문화 사이의 경계를 짓는 방식이 변화할 것이라고 믿는다. 이전에 기원, '탄생'의 영역은 자연에 속한 반면에 문화는 '제작'의 영역을 포괄했다. 과학과 기술의 발전 덕분에 이런 구별은 흐려지고 있다[13]. 모든 것은 복사본의 복사본이기 때문에 인간 경험에서 기원은 더욱 더 작은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여전히 자연과 문화를 구별하기를 바라는 한, 우리는 '통제가능한 것'과 '자율적인 것' 사이에 선을 그을 것이다. 문화는 우리가 통제하는 것이다. 자연은 자율적인 성질을 지니고 인간 힘의 범위 밖에 놓인 모든 것이다. 이런 새 분류법에 따르면, 온실 토마토는 문화적 범주에 속하는 반면에, 컴퓨터 바이러스와 교통 혼잡은 자연적 현상으로 여겨질 수 있다. 우리는 왜 그것들을 자연이라고 불러야 하는가? 그것은 혼동하는 것이 아닌가? 그것들이 녹색은 아니지만 자연처럼 기능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들에 자연을 할당한다.

 

인간 행위들은 자연이 아니지만 자연, 즉 그것의 모든 기능, 위험, 그리고 가능성에 있어서 진짜 자연을 유발할 수 있다. 우리의 모든 시도와 실험에도 불구하고, 생명을 주조하는 것은 여전히 거의 실행불가능하다. 자연이 정복된 듯 보일 때마다 그것은 다른 어떤 전장에서 머리를 쳐든다[14]. 우리는 자연을 주어진 정적인 과정이 아니라 역동적인 과정으로 여겨야 할 것이다. 따라서 나는 자연과 문화를 구별하는 새로운 접근방식을 제안하고 있다. 패러다임 변동에서 일반적이듯이, 처음에는 익숙해져야 하지만, 얼마 후에 상황은 다시 명료해 진다. 진짜 자연은 녹색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통제를 벗어난 것이다.  

 

참고문헌

[1] www.nieuwenatuur.nl, Stiching Duinbehoud Leiden's website.

[2] Metz, Tracy (1998). New Nature: Reportages over veranderend landscape. Amsterdam: Ambo, 1998, ISBN 90-263-1515-5.

[3] Wark, McKenzie (2005). "N is for Nature", in Van Mensvoort, Gerritzen, Schwarz (Eds.) (2005), Next Nature, BIS Publishers, ISBN 90-636-9093-2, pp. 128-134.

[4] Metz, Tracy (2002). Pret! Leisure en landschap. Rotterdam: NAi, 2002, ISBN 90-5662-244-7.

[5] Catlett Wilkerson, Richard (2006). Postmodern Dreaming: Inhabiting the Improverse (www.dreamgate.com/).

[6] Bacon, Francis (1620). "Novum organum", translated by James Spedding, Robert Leslie Ellis and Douglas Denon Heath, in the Works (Vol. VIII), published in Boston by Taggard and Thompson in 1863 (www.constitution.org/bacon/nov_org.htm).

[7] Haraway, Donna (1994). "Een Cyborg Manifest". translated by Karin Spaink (A Manifesto for Cyborgs, 1991), Amsterdam: De Balie, 1994.

[8] Schwarz, Michiel (2005). "Nature So Called", in Van Mensvoort, Gerritzen, Schwarz (Eds.) (2005), Next Nature, BIS Publishers, ISBN 90-636-9093-2, pp. 87-109.

[9] Wilde, Oscar (1889). The Decay of Lying: An Observation. New York: Brentano, 1905 [1889].

[10] Lacan, Jacques (2001). Ecrits, translated by Alan Sheridan, London: Routledge, 2001.

[11] Oosterling, Henk (2005). "Untouched Nature", in Van Mensvoort, Gerritzen, Schwarz (Eds.) (2005), Next Nature, BIS Publishers, ISBN 90-636-9093-2, pp. 81-87.

[12] Van Mensvoort, Koert (2005). "Exploring Next Nature", in Van Mensvoort, Gerritzen, Schwarz (Eds.) (2005), Next Nature, BIS Publishers, ISBN 90-636-9093-2, pp. 4-43.

[13] Kelly, Kevin (1994). Out of Control: The Rise of Neo-Biological Civilization, Reading, Massachusetts: Addison-Wesley, 1994, ISBN 0-201-57793-3.

[14] Heraclitus (540-480 BC): on Nature, fr. 208: "Nature loves to hide." (헤라클레이토스는 자연에 관한 철학적 저작을 저술했는데, 그는 그것을 에페소스의 아르테미스 신전에 두었다(Diogenes, Lives, 9.6). 그 저작 전체가 남아 있지 않는데, 남아 있는 부분은 다른 사람들의 저작들에 인용한 것들이다.)

 

번역: 김효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