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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누엘 데란다: 오늘의 인용-평탄한 존재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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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종들과 유기체들 사이에는 수많은 차이점들이 있는데, 가장 눈에 띄는 것이라면 규모(스케일)상의 차이점들이다. 공간적으로 보면, 하나의 종은 흔히 지리적으로 분리된 생태계에 서식하는 여러 생식계를 포함하기 때문에 하나의 유기체보다 훨씬 더 큰 외연을 갖는다. 시간적으로 보면, 역시 종이 훨씬 더 큰 규모로 작동한다. 즉 종의 평균 수명은 유기체의 생명 주기보다 훨씬 더 길다. 하지만 종들이 역사적 과정을 통해서 구성된다는 사실은 사실상 그것들이 또 다른 개별적 존재임을, 즉 유기체들보다 더 큰 시공간적 규모로 작동하긴 하지만 결국 개별적인 존재임을 보여준다. 새롭게 펼쳐지는 종 개념의 철학적 중요성은 반드시 강조되어야 한다. 일반적인 유형들과 특정한 사례들 사이의 관계를 기반으로 하는 존재론은 위계적인 반면(각각의 층위는 다른 존재론적 범주――유기체, 종, 속――를 나타낸다), 상호 작용하는 부분들과 창발하는 전체들이라는 관점에서 출발한 접근은 존재론적 위상에서가 아니라 시공간적 규모에서만 차이가 나는 고유하고 개별적인 개체들로만 구성된 평탄한 존재론을 귀결시킨다. 다른 한편, 이러한 새로운 접근 방식에서는 전체가 나타나는 과정, 들뢰즈의 존재론에서 '강도적'인 것으로 정의되는 과정을 항상 특화해 내야specify 한다. 종 형성speciation의 과정은 강도적이라고 할 수 있다. 종 형성 과정의 묘사에는 무엇보다도 개체군이질성이라는 기본 개념들이 포함되며, 이 두 개의 근본적인 개념들은 개체군 이론으로 알려진 생물학적 설명 방식의 특징이다. 이러한 사고방식을 본질주의 및 유형학적 사유와 구분짓는 것은 진화론과 유전학을 현대적으로 종합한 창조자들 가운데 한 사람인 에른스트 마이어Ernst Mayr의 유명한 말에 잘 나타나 있다.

 

[유형론자들에게는] 자연에서 관찰되는 변이 가능성 밑에 깔려 있는 일정한 자기동일적 '이데아들'이 있다. 에이도스(이데아)야말로 고정되어 있고 실재하는 유일한 것이어서, 관찰된 변이성은 실재가 아니라 동굴 벽에 비친 대상의 그림자에 불과하다.…… [반면에] 개체군론자는 유기적 세계에 있는 모든 것들의 유일성uniqueness을 강조한다.…… 모든 유기체들과 유기적 현상들은 고유한 특성들(형질들)로 이루어지며 오직 통계학적인 용어들로만 집합적으로 서술될 수 있다. 개별적인 것들 혹은 어떤 종류의 유기체들이든 개체군을 형성하며, 우리는 그 산술적 평균과 변이의 통계학을 결정할 수 있다. 평균이란 통계적인 추상에 불과하며, 개체군을 구성하는 개별적인 것들만이 실재한다. 개체군 이론가들과 유형론자들의 궁극적인 결론은 날카롭게 대립한다. 유형론자들의 입장에서는 유형(에이도스)이 실재하고 변화는 환영이며, 개체론자들의 입장에서는 유형(평균적인 것)이란 추상일 뿐이며 오직 변이만이 실재한다. 자연을 바라보는 이 두 가지 방식보다 더 차이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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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누엘 데란다(Manuel DeLanda), <<강도의 과학과 잠재성의 철학(Intensive Science and Virtual Philosophy)>>(이정우, 김영범 옮김, 그린비, 2009), pp.1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