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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바 노에: 오늘의 에세이-사랑은 측정할 수 있는가?

 

사랑은 측정할 수 있는가?

Can Love Be Measured?

 

―― 알바 노에(Alva Noe)

 

오늘 나는 비인간, 사랑 그리고 집에 대한 두 가지 주장을 제시하고 싶다.

 

어제 나는 한 소년이 개를 데리고 걷는 것을 지켜보았다. 소년은 틀림없이 열한 살 쯤이었고, 개는 대략 이 살이었다. 인간과 개는 매우 사랑하는 듯 보였는데, 내가 생각하기에 그것은 발렌타인 데이가 아니었더라도 떠올렸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 날은 사랑의 휴일이었기 때문에 그 생각은 평소보다 더 오래 지속되었다.

 

개는 활기가 넘치고, 의기양양하며, 대단히 활발하고 발랄했다. 개의 주의는 소년과 그의 몸짓에 결부되어 있었다. 개는 소년이 들고 가면서 제멋대로 던지곤 하는 테니스 공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그런데 소년에 대한 개의 사랑을 표현하는 듯 보였던 것은 관심의 고정성뿐 아니라, 개를 둘러싸고 있는 어떤 기대로부터의 자유였다. 개가 이런 움직임, 저런 움직임, 이제 이런 움직임이 공을 앞으로 쏜살같이 보낼 것이라고 명백히 희망하면서 모든 움직임에 매달려 즐겁게 쫓아다니고 있었던 것은 참이었다. 그런데 개의 시중에는 아무 판단도 함축되어 있지 않았다. 개는 소년이 무슨 일을 하기로 선택하든지 간에 만족하는 듯 보였다. 개는 즐겁고 흔쾌히 받아들이는 듯 보였다. 내게 그것은 참 사랑인 듯 보였다. 그 어떤 협상도 넘어서고 앞서는 사랑. 나는 이 사랑이 인간의 사랑보다 더 낫지 않을까 생각했다. 아이들도 자신의 욕구에 대한 자연적 표현으로 울음을 터뜨린다. 이 개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는 순간에 편안한 듯 보였다.

 

개에 대한 소년의 느낌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부모 같았다. 나는 소유와 책임의 긍지, 그리고 또한 한편으로는 개에 대한 비견할 수 없는 관심을 감지했다. 그런데 그의 돌봄 사랑은 의무를 담고 있었다. 소년을 개를 뒤따라 다니면서 치우고, 공을 던진 곳에 주목했다. 소년은 개와 함께 놀고 있었다. 그런데 소년은 아침 일찍 개를 산책시키면서 개의 안녕에 필요한 운동과 신선한 공기, 주의와 돌아다닐 여지를 제공하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정말로, 참으로, 육욕적이고 습관적이며 본능적인 행동에 지나지 않는 것을 과도하게 해석한다고 하는 반대가 제기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왜 만족과 희망을 말하고 있는가? 나는 왜, 최소한 개의 입장에서는, 확실히 생물학적인 상투적 행동 같은 것을 서술하는 데 사랑을 말하고 있는가?

 

지역 공원의 비에 젖은 풀밭 저쪽에서 진행되고 있는 것을 서술하는 더 진실한, 더 정확한 방식이 존재하는가? 동물행동학 전문가의 시각이 더 낫고, 더 정확하고, 덜 감상적이며, 더 진실할 것인가? 나는 그렇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제시한다. 흰색 실험실 코트를 입은 사람의 견해는, 그것이 어떤 통찰을 제공하든 간에, 이것이 애정 어린 우정, 충심의 우정이라는 인식을 부정할 수 없다. 과학이 이 사건을 있는 그대로 서술할 어휘를 지니고 있지 않다면, 과학의 관점에 대해 훨씬 더 좋지 않다.

 

그 다음에 달팽이에 주의를 기울이자. 달팽이는 껍질을 지니고 다닌다. 과학적 관점에서 바라보면 달팽이와 껍질 사이의 관계를 대충 속박의 관계로 여기고 싶을 것이다. 물리적 속박. 공간적 속박. 그리고 기능적 속박. 그런데 달팽이는 결코 자신이 껍질 속에 처해 있다고 여기지 않는다. 달팽이는 그곳에 거주한다. 껍질은 자기 주택이고, 자기 집이며, 그리고 집에 대한 개체의 관계는 결코 공간적 속박이나 피난의 관계가 아니다. 그것은 유리 잔 속의 물과 같지 않으며, 또는 땅 바닥에 고정된 벤치의 관계와 같지 않다. 오히려 그것은 우정이라는 맥락 속에 있는 개와 소년과 비슷하다. 생물학을 일종의 확장된 화학이라고 생각한다면, 평범한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확실히 물리학뿐 아니라 생물학 이외의 것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달팽이와 껍질을 인정하기 위해서는 달팽이가 자체의 삶에서 선도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살아 있는 존재자라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소년과 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랑이라는 관념에 호소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