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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비 브라이언트: 오늘의 에세이-구별짓기, 해체에 관하여

 

 

구별짓기: 해체에 관하여

Distinction: on Deconstruction

 

―― 레비 브라이언트(Levi Bryant)

 

얼마 전부터 지금까지 나는 G. 스펜서-브라운의 구별짓기 이론에 시달렸다. 그의 책 <<형식의 법칙들(Laws of Form)>>을 읽으려고 시도한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내가 말하고 있는 것을 알 것이다. 스펜서-브라운의 테제는, 무언가를 가리키기 위해서는 먼저 (위의 오른쪽 그림에 묘사된) 구별짓기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공간을 절단하는 칸막이가 구별짓기이다. 구별짓기에 대한 유표 공간과 무표 공간의 통일성이 스펜서-브라운이 구별짓기라고 부르는 것이다. 칸막이 아래에 들어오게 되는 것이 일단 구별짓기가 이루어지면 나타내어지게 되는 것이다. 모든 구별짓기가 공간을 절단하는 한(개념적이든 그렇지 않든 간에), 구별짓기의 무표 공간은 구별짓기가 이루어지면 보이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구별짓기는 두 가지 맹점이 있다. 한편으로, 모든 구별짓기는 구별짓기가 이루어지면 사라지는 무표 공간을 포함한다. 구별짓기와 더불어 경계가 그려지는데, 그 경계의 반대편에 놓여 있는 것은 사라진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는 구별짓기가 이루어지면 구별짓기 자체가 사라진다. 구별짓기가 이루어질 떄 전면에 나서게 되는 것은 유표 공간, 즉 나타내어지게 되는 것이지 구별짓기 자체가 아니다. 이를테면, 구별짓기 자체는 배경으로 물러서게 된다.

 

따라서, 앞서 말한 견지에서 보면, 구별짓기는 선험적인 것이라고 부를 수 있으며, 구별짓기 하에서 나타내어지는 것은 경험적인 것이라고 부를 수 있다. 구별짓기가 선험적인 것이라면, 이것은 사전의 구별짓기 없이는 아무 지시도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구별짓기는 지시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다. 물론 지시는 무엇이든 될 수 있다. 그것은 세계 속에서 우리가 가리키는 것, 우리가 사물들을 분류하는 방식, 우리가 조사하기로 선택하는 것 등이 될 수 있다. 이것들 가운데 무언가를 가리키거나 언급하려면 나는 먼저 구별짓기를 행해야 한다. 그 결과, 구별짓기는 무엇이든 우연히 나타내어지는 것에 선행한다. 예를 들면, 내가 병리적인 것을 조사하고 싶다면, 나는 병리적인 것을 구별짓기의 유표 공간에 가져다 주는 공간(개념적이든 그렇지 않든)을 절단해야 한다. 내가 병리적인 것을 가리킬 수 있는 것은 이런 구별짓기에 의거할 때뿐이다. 이 모든 것에서 흥미로운 것의 일부는 구별짓기―그리고 이것은 항상 보이지 않게 되도록 무엇이든 모든 지시로부터 물러서 있다는 점을 떠올리자―의 유표 공간은 뫼비우스 띠와 유사하다는 점인데, 종이의 앞면이 자체의 뒷면을 의미하는 것과 마찬가지 방식으로 그것은 자체의 무표 공간에 부착되어 있다. 병리적인 것은 결코 순수하게 병리적인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병리적인 것을 구성하고 조직하는 "정상적인" 것이라는 무표 공간을 전제로 한다. 다시 말해서, 무엇이든 어떤 관찰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 선행하는 구별짓기의 조건이다.

 

놓치지 말아야 하는 요점은, 모든 구별짓기는 우연적이라는 것, 즉 달리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모든 구별짓기는 동기가 있지만, 무엇이든 어떤 특수한 구별짓기에 동기를 부여하는 것이 실재 속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구별짓기는 항상 다르게 이루어질 수 있다. 예를 들면, 캉키엠이 보여주었듯이, 정상적인 것과 병리적인 것 사이의 구별짓기는 다르게 이루어질 수 있다. 그리고 여기서, 라뤼엘을 좇아서, 이론가들이 자기 이론을 전개하면서 사전에 행한 구별짓기의 증상으로 사용하는 사례들에 주의를 기울이는 데 대단히 신중할 필요가 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구별짓기에 대한 스펜서-브라운의 이론이 모든 해체적 사유의 형식적 매트릭스를 제공한다(루만이 <<구별짓기에 대한 이론들(Theories of Distinction)>>에 실린 해체에 관한 에세이에서 대단히 강조하고, 캐리 울프가 <<탈인간주의란 무엇인가?(What is Posthumanism?)>>에서 대단히 자세히 전개하는 주장이다).

 

루만과 울프의 논변을 좇으면, 해체는 이차 관찰에 해당한다. 해체가 관찰하는 것은 지시자들이 아니라, 오히려 관찰을 가능하게 하는 구별짓기들이다. 정상적인 것과 병리적인 것에 대한 예로 돌아가자. 해체적 분석은, x가 정말 병리적인지(소박한 실재론의 표식) 여부에 관한 논쟁에 개입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 대신에 그런 종류의 관찰이 도대체 이루어질 수 있게 하는 선험적인 것 또는 구별짓기를 탐구한다. 일차 관찰이 x가 정말 범죄적인지 또는 병리적인지 또는 선한지 또는 과학적인지 등에 관한 논쟁에 관여하는 반면에, 이차 관찰은 "관찰자가 어떻게 관찰하는지" 또는 관찰자로 하여금 이런 특별한 방식으로 가리킬 수 있게 하는 구별짓기에 대한 관찰일 것이다.

 

그러므로 이차 관찰 또는 관찰자가 무엇을 관찰하는지가 아니라 어떻게 관찰하는지에 대한 관찰에 관여하는 이차 사이버네틱스 학자는 두 가지를 밝힐 것인데, 그것들은 구별짓기의 맹점 또는 뫼비우스 띠의 이면(유표 공간을 구성하는 무표 공간)과 구별짓기의 우연성 또는 그것이 항상 이미 다르게 이루어질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 과정에서 이차 관찰은 구별짓기의 동기가 무엇인지에 대한 심문을 개시할 것이다. 예를 들면, 누군가가 끊임없이 범죄, 죄, 진리, 이성애, 가치, 담론을 지배하는 규범 등에 대해 말한다면, 이제 우리는 이런 입장들이 옳은지 아니면 그른지, 참인지 아니면 거짓인지, 과학적인지 아니면 비과학적인지 묻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가 어떤 동기에서 세계를 이런 식으로 절단할 수 있는지 물을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지시에 선행하는 것, 즉 이런 지시자들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 자체를 논의하고 있을 것이다. 다른 구별짓기들이 가능하다는 점을 고려하면, 우리는 어떤 욕망 또는 프레임이 이런 지시 방식 또는 구별짓기 방식을 부추기는지 물을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얻게 되는 것은 일종의 후설주의적인 선험적 에포케이다. 또한 지식에 대한 모든 토대주의적 기획과 모든 자기정초적 인식론이 여기서 자체의 폐허를 만난다는 점을 인식할 가치가 있다. 이런 기획들이 애초에 구조적으로 불가능하다면, 그것은 그것들이 제시하거나 전개할 그 어떤 비판도, 그것들이 펼칠 그 어떤 기획도 이미 자체적으로 정초할 수 없는, 길들이거나 철회할 수 없는, 관여하는 기획을 지배하는 사전 구별짓기를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런 까닭은 그 어떤 지시도 가능하게 하는 구별짓기가 항상 이미 우연적이고 반드시 아무 근거도 없기 때문이다. 그런 구별짓기를 정초하려고 항상 시도할 수 있지만, 그런 일은 그것 자체가 아무 근거도 없고 우연적인 추가적 구별짓기에 근거를 둠으로써만 가능할 것이다. 틀림없이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모든 인식론자들 사이에서 항상 분노와 좌절의 향유를 감지할 수 있는데, 그들은 어딘가에서 자기 입장이 항상 정초하기가 아니라 설명 요구에 기반을 둘 수 밖에 없다는 점을 깨닫는다. 그러므로 치안―그리고 미묘한 수사학적 폭력―의 분위기가 항상 그런 탐문들에 수반된다.

 

그런데 왜 자칭 실재론자가 우연성과 모든 근거의 부재에 의거한 구별짓기에 대한 구성주의적 이론 같은 반실재론적인 것에 대해 글을 쓰고 있는지 궁금해 할 것이다.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에서 지젝은 바그너를 좇아서 우리는 우리를 찌른 창에 의해 치료받는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실재론의 한계점이자 불가능성으로 여긴 바로 그것이 실재론에 대한 해결책이다. 라뤼엘 같은 사람은 모든 한정을 넘어서는 실재적 일자를 옹호하는 논변을 펼치는 반면에, 내 조치는 구별짓기가 객체들의 실재성 자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구별짓기를 행하는 체계가 자체적으로 무언가이다라는 점이다. 우리는 체계가 어떻게 "보는"지에 집중하여 보는 무언가가 존재하고 있다는 점을 간과한다. 체계 또는 객체라는 것은 구별짓기를 행하는 특수한 방식을 진화시켜온 존재자라는 것이다. 이것이 없다면 이차 관찰의 전체 테제는 비정합성에 빠진다. 그 결과는 관찰되는 것은 단순한 구성물로 환원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어떤 다른 존재자가 그것을 가리키게 되는 방식으로부터 물러서 있다. 하만이 주장하듯이, 모든 존재자는 모든 다른 존재를 묘사하며 진리는 항상 암시될 수 있을 뿐이다. 라캉의 주인 담론의 경우에서처럼, 우리는 모든 존재자가 여타의 존재자로부터 물러서 있는, 잔류물 또는 여분의 실재론을 얻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