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크리스토퍼 푹스: 양자 베이즈주의자와의 인터뷰-최선의 양자 해석

 

Q3: 양자역학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게 하는 해석 프로그램은 무엇이며, 그리고 왜 그렇습니까?

 

애셔 페레스(Asher Peres)는 의견을 피력하기 위해 논란을 일으키는 데 달인입니다. 예를 들면, 1982년에 그는 노벨 물리학상 후보자를 추천해 줄 것을 요청받았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수상 메나헴 베긴(Menachem Begin)을 추천했습니다! 애셔는 레바논을 침공하기로 한 베긴의 결정이 그가 이전에 평화상을 수상할 자격이 있었던 것처럼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할 자격이 있는 것으로 증명했다고 추론했습니다.

 

확실히 같은 크기는 아니지만, 애셔는 우리가 2000년 <<피직스 투데이(Physics Today)>>에 기고한 "칼럼"을 작성할 때 논란을 일으키겠다고 작정했습니다. 우리의 기고문에 앞서 그 잡지는 양자역학은 일관성이 없다―그것은 납득할 수 없는 "측정 문제"를 용인했고, 그 점이 비일관성 외에 어떤 다른 것을 의미할 수 있겠는가?―는 핵심 주장을 담은 일련의 기고문들을 실었었습니다. 양자 이론이 계속 떠 있기 위해서는 수선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이 이어졌습니다. 그것이 결풀림이든, 정합적 역사이든, 봄주의적 궤적이든, 아니면 에버릿주의적 세계들이라는 수선이든 말입니다.

 

그런 환경에 맞서 입장을 확실히 하기 위해 애셔는 우리 기고문의 제목을 "양자 이론은 아무 '해석'도 필요하지 않다"로 정해야 한다는 생각을 품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제시하고 싶었던 핵심 주장은 양자 이론의 구조가 비공식적으로 자체의 해석을 꽤 많이 전달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정말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특히 개괄적인 윤곽을 제시하는 글에서는 말입니다. 그 제목은 루돌프 파이얼스(Rudolf Peierls)가 한때 말했었고 애셔가 매우 좋아했던 것을 약간 활용한 것이었습니다. "코펜하겐 해석이 바로 양자역학이다!" 그 기고문은 약간의 논란을 일으켰습니다! 짓궂게도 애셔는 그 제목을 읽고 지나갈 사람은 소수겠지만, 그럼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리의 주장에 격분하게 될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순진하게도 저는 제가 설명해야만 하는 상황을 대단히 많이 만나게 되는 것에 깜짝 놀랐습니다. "물론, 그 기고문 전체는 하나의 해석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의 해석 말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제가 양자 기초 전쟁에 개입하게 된 시작에 불과했으며, 저는 그 이후로 약간 더 노련해졌습니다. 무엇이 양자 역학을 이해하기 위한 최선의 해석 프로그램입니까? 이것이 이제 제가 서술할 방식입니다. 그 질문은 완전히 소급적입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이 그것 옆을 걸어가면서 볼 수 있도록 전시된 양자 역학이라고 불리는 이런 이 존재하는 것처럼 작동합니다. 보도 위의 가로등 같은 그런 종류의 것처럼 말입니다. 해석의 작업은 불쾌한 냄새를 가리기 위한 올바른 향수 뿌리개를 찾아내는 것입니다. 일반적인 해석 게임은 해석이란 항상 선재하는, 보편적으로 인정받은 양자 이론에 덧붙이는 무언가이다라는 것입니다.

 

놓쳐 버리게 된 것은 사유의 주제로서의 물리학이 스토리텔링과 방정식 작성하기 사이의 역동적인 상호작용이라는 점입니다. 둘 가운데 어느 하나도 홀로 서 있지 않습니다. 마지막에도 말입니다. 그런데 어느 것이 더 아버지 역할을 맡을까요? 만약 제게 묻는다면, 그것은 스토리텔링입니다. 브라이스 드윗(Bryce DeWitt)이 한때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생각할 필요가 없도록 하기 위해 물리학에서 수학을 사용한다." 우리가 생각할 필요가 있는 경우에는 스토리의 줄거리로 되돌아가서 제시된 각 우여곡절이 정말로 줄거리에 들어맞는지 물어야 합니다. 어떤 해석이 지침을 준다면 그것은 강력한 것이며, 그리고 저는 바로 그 최선의 해석이란 스토리가 매우 강력하여 수학적 형식 체계 자체(무사유가 지배할 수 있는 부분)를 생성하는 것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해석"이 선행해야 합니다. 수학(즉, 모든 사람이 해석하기 전에 말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선재하는, 보편적으로 인정받은 것)은 이차적이어야 합니다.

 

다세계 해석(들)이라는 거의 공허한 상상을 생각합시다. 수학적 형식 체계를 미리 알지 못하고 있다면, 누가 그것으로부터 복소수 힐베르트 공간의 구체적 구조를 유도할 수 있겠습니까? 현재 대부분의 과학철학자들은 결코 이것을 파악하지 못한 듯 보입니다. 어떤 해석이 지역 신에 대한 임의적인 의식이 아니라 물리학의 일부이고자 한다면, 그것은 물리적 실천 자체에 대한 어떤 현금 가치(cash value)가 있는 것이 더 좋습니다. 예를 들면, 에버릿주의적 해석이 우리로 하여금 가임(Geim)과 노보셀로브(Novoselov)의 스카치 테이프 이전에 그래핀의 가능성을 깨닫게 할 수 있었더라면, 제게 그것은 개종의 경험이었을 것입니다. 오늘 저는 에버릿주의자였을 것입니다. 그것이 해석이 미쳐야만 하는 그런 종류의 영향입니다.

[...]

사실상, 그저 양자 상태에 대한 인식적 견해의 통일적이고 광범위한 힘을 예증할 목적으로 "양자 상태에 대한 인식적 견해를 옹호하며: 한 토이 이론(In defense of the epistemic view of quantum states: a toy theory)"이라는 논문에서 로버트 스펙컨즈(Robert Spekkens)가 구성한 "토이 모형"를 통해서 보는 것보다 이것을 더 잘 보는 방식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 토이 이론은 양자 이론 자체가 아니며, 실재적인 것을 유도하기 위한 착상들의 원천을 넘어서는 것인 듯 가장하지도 않습니다. 대체로 그것은 현상을 일으키는 양자 상태가 인식적이지 존재적이지 않다는 점을 명백하고 부정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들기 위한 틀입니다. 즉 양자 상태는 자연의 상태가 단연코 아닙니다.

 

문제의 핵심에 이르게 하는 두 문단을 롭의 논문에서 인용하면 이렇습니다.

 

이 논문에서는 존재적 관점에서 바라보면 불가사의한 다양한 양자 현상들이 인식적 관심에서 바라보면 어떻게 자연적인 듯 보이는지 예증함으로써 존재적 견해에 비해 인식적 견해가 우월하다는 점을 논증할 것이다. 이런 현상들에는 간섭, 비가환성, 얽힘, 복제 불가능성, 원격전송 등이 포함된다. 여기서 강조하고 있는 구분은 그 현상들이 개념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지 여부이지, 그것들이 양자 형식 체계의 수학적 결과들로 이해될 수 있는지 여부가 아니라는 점을 인식하자. 후자 유형의 이해는 양자 형식 체계에 대한 해석에 무관하게 가능하기 때문이다. 존재적 시각에서 바라보면 불가사의한 듯 보이지만 인식적 시각에서 바라보면 자연적인 듯 보이는 현상들의 수가 더 커질수록, 후자의 관점은 더욱 더 설득력 있게 된다. ...

 

물론 존재적 관점의 옹호자는, 물리적 실재에 대한 어떤 선입견적 관념들을 포기한다면 문제가 되는 현상들이 불가사의하지 않다고 주장할 것이다. 우리가 그런 사람에게 제기하는 이의는 양자 상태가 존재적 상태이라는 틀 내에서 이런 현상들 모두가 개념적으로 직관적인 것(그리고 결코 형식 체계의 수학적 결과물이 아니라)이 되게 하는 몇 가지 단순한 물리적 원리들을 제시해 보라는 것이다. 우리의 인상은 이런 이의가 충족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이 논문에 예증되듯이, 그 어떤 계에 대해서도 지닐 수 있는 지식의 양에 제약을 부가하는 단일한 정보 이론적 원리가 한 단순한 토이 이론의 맥락에서 이런 현상들 모두를 유도하는 데 충분하다.

 

롭이 말하는 한 일화는, 그리고 이것은 확실히 참입니다, 그에게 누군가가 놀랍다고 여겨지고 있는 양자 정보 이론의 어떤 현상에 대해 말한다면, 그는 그것에 대한 유사물이 토이 모형에서 발견될 수 있는지 재빨리 검토해 본다는 것입니다.  그 토이 모형은 그가 일반적으로 머리 속으로 그 일을 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직관적입니다. 그리고 매우 흔히, 그는 그 현상 역시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데, 이것은 그 현상이 마찬가지로 양자 상태의 인식적 본성에서 비롯된다는 점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서, 그는 자신의 주머니에서 작은 개념적 모형을 끄집어내어서, 양자 상태에 대한 올바른 관념에서 출발하는 것만으로, 양자 이론의 다양한 기술적 문제들에 대한 빠른 통찰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물리적 통찰입니다. 그것이 물리학의 힘입니다! 그것이 바로 물리학입니다. 다음에 제가 봄주의 또는 에버릿주의 학술회의에 참석한다면, 저는 양자 이론에서 저를 당황시켰던 어떤 문제를 제기할 것입니다. 누구의 세계관과 직관이 해답을 먼저 찾아내는 데 도움이 되는지 알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