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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레이그 힉크먼: 오늘의 인용-언어로서의 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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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데카르트주의자들은 과학들에 관한 학문으로서의 수학의 역할과 관련하여 대단히 잘못 생각했다. 수학이 확실하다는 것은 그것이 인간의 발명품이어서 그런 것뿐이다. 수학은 [...] 실재의 객관적 구조에 대응하지 않는다.  수학은 하나의 방법이지 진리들의 집합체가 아니다. 수학의 도움으로 우리는 규칙적인 것들―외부 세계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나타낼 수는 있지만, 그것들이 왜 그렇게 일어나는지, 또는 무슨 목적으로 일어나는지는 알아낼 수 없다.[벌린(Berlin)] 여기서 우리는 발명품으로서의 수학, 실재의 구조를 서술하지 않는 언어로서의 수학, 진리들의 집합체가 아니라 방법으로서의 수학, 존재목적론적 최종 상태의 형이상학에 대한 존재론적 견해가 아니라 현상학적 탐구의 도구로서의 수학이라는 병치를 본다.

 

흄(Hume)의 경우에 수학은, 누군가의 진리가 유일한 타당한 진리라는 점을 입증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작업을 해나가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와 더 관련되어 있었다. 이성의 독단주의자들에 맞서 그는 경험적 탐구 방법론을 제시하였으며, [...] 그것은 결코 최종적이거나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문제 풀기와 결정 과정의 일부로서 탐구하는 정신을 통해 걸러지게 될 끊임없이 변하는 명제적 소여와 비명제적 소여의 다발이다. 그는 이것이 결코 종결될 수 없다는 점을 알았다. 역사의 진리는 진리의 역사들이 존재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경쟁하는 견해들 사이에 균형을 취한다는 그의 관념은 현재 과학과 철학에서 벌어지는 논쟁들에 대한 훌륭한 접근 방식인 듯 보인다.

 

경쟁하는 실재관들 그리고 언어로서의 수학이 궁극적으로 실재의 구조를 서술할 수 있는지 여부를 둘러싼 관념이 물리과학과 철학적 논쟁들의 핵심에 놓여 있다. 실재에 대한 유물론적 견해와 관념론적 견해의 경쟁하는 목소리들은 이백 년 이상 동안 지속되었다. 이백 년 전에 칸트는 세계를 두 개의 객체 집합으로 나누었다. 첫 번째 집합은 "본체(noumenon)"였는데, 플라톤 철학에서는 본체계가 철학적 정신이 알 수 있는 관념들의 세계와 동일시되며, 본체계는 교육받지 않은 정신이 알 수 있는 감각적 현실 세계와 동일시되는 현상계와 대조를 이룬다. 근대 철학의 대부분은 일반적으로 감각에 독립적인 지식의 가능성에 대해 회의적이었고, 임마누엘 칸트는 이런 견해에 고전적 판본을 부여하였는데, 그는 본체계가 존재할지도 모르지만, 인간은 그것을 전적으로 알 수 없다고 말했다. 칸트 철학에서는 흔히 알 수 없는 본체가 알 수 없는 물자체와 결부되는데, 그 관계의 본성을 어떻게 규정할지는 여전히 논란의 여지가 있는 문제이다. 두 번째 집합은 "현상(phenomenon)"인데, 칸트는 자신의 교수 취임 논문 '감성계와 지성계의 형식과 원리들'(1770)에서 인간 정신은 논리적 세계에 한정되어 있고, 그래서 발생 사건들을 물리적 외양에 따라 해석하고 이해할 수 있을 뿐이라는 이론을 세웠다. 그는 인간들은 현실적 객체 자체를 경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감각이 허용하는 만큼 추론할 수 있을 뿐이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현상이라는 술어는 탐구하고 조사할 가치가 있는 사건이라면 무엇이든 가리키는데, 특히 이례적이거나 완연히 중요한 사건들을 가리킨다. 여기서 요점은, 우리는 한정된 존재자이며 우리의 유한성 때문에 우리의 한정된 감각을 통해 오는 추론적 지식에 한정된다는 점이다.

 

수학은 실재에 대한 언어이고, 수학은 실재 자체의 구조를 서술하며, 조만간 수학은 이런 개념적 틀에 의거하여 통일된 지식관을 확립할 것이라는 관념을 확신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런 관념은 음악에서 자연수와 배음이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피타고라스적 이념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데, 이것은 루트 연주가이자 제작자로서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아버지였던 빈첸조 갈릴레이에게 틀림없이 잘 알려져 있었을 것이다. 아마도 피타고라스적 사고 방식을 좇으면서 빈첸조는 현 장력과 음 높이 사이의 새로운 수학적 관계를 발견했고, 그래서 음악과 악기가 수학적으로 정량화되고 서술될 수 있다는 관념의 일반화를 제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것은, 모든 물리적 현상은 수학적 언어로(물리 "법칙들"로서) 정량적으로 서술될 수 있을 것이라는 그의 아들의 중요한 통찰를 낳는 길을 닦았을 것이고, 그래서 근대 물리학의 시대를 개시하고 규정했다.

 

그런데 왜 이러한가? 인간의 마음/뇌에 거주하고 있는 듯 보이는 수학이 어떻게 인간의 마음/뇌 너머에 존재하는 실재의 구조도 서술할 수 있을까? 현대 물리학자 맥스 테그마크는 왜 "우리의 물리적 세계는 엄청난 수학적 규칙성을 드러내어서 천문학의 초영웅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자연은 "수학이라는 언어로 쓰여진 책"이라고 천명했으며, 그리고 노벨상 수상자 유진 위그너가 설명을 필요로 하는 불가사의로서 "물리과학에 있어서 수학의 터무니없는 유효성"을 강조했을까?"라고 묻는다. 테그마크가 진술하듯이, 그의 과학적 기획의 목표는 수학이 실재의 구조를 어떻게 서술하는지 보여주는 것뿐 아니라, 나아가 그가 "우리의 물리적 세계는 수학에 의해 서술될 뿐 아니라, 그것이 바로 수학이고, 그래서 우리를 한 거대한 수학적 객체의 일부로 자각하게 만든다는 터무니없는 믿음"이라고 부르는 것을 해명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이 매우 방대하고 특이해서 앞에서 언급한 모든 당혹스러운 것들이 비교적 미약해지는 새로운 궁극적인 평행 우주들의 집합체로 이어진다는 점을 알게 될 것이고, 그래서 우리는 실재에 대한 가장 깊이 각인된 관념들 가운데 많은 것들을 포기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테그마크) 우리가 그것 자체가 평행 우주들의 다원주의적 다중우주 내의 한 객체에 불과한 더 큰 조립체 또는 수학적 객체 내부의 성분이라는 이 관념은 물리학에서 진행 중인 논쟁들 가운데 일부다.

[...]

나는 이런 전통 전체 내부의 핵심이 경쟁하는 두 가지 주요한 과학관 사이의 전투에까지 닿아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한 과학관에 따르면, 실재의 구조는 수학적 언어로 환원되는데, 그것은 결국 신경과학이 자체의 소거주의적 과정과 영상 기술들을 통해서 언젠가 마음과 실재를 통일하는 메커니즘(들)을 찾아낼 것이라는 점을 함축할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수학을 통한 마음과 실재의 그런 통일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 또는 실재는 몰수학적이고 몰명제적이기 때문에 수학도 그 어떤 형식의 명제적 진술도 실재의 구조를 결코 서술할 수 없을 것이라고 흄처럼 믿고 있는 철학자들이 있다. 내가 보기에, 이것이 오늘날 과학과 철학의 핵심이다.    

―― 크레이그 힉크먼(Craig Hickm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