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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그문트 바우만: 오늘의 인용-각자도생하는 개인들의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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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게 보다 호의적인 해석은 이성의 존재를 인정한다. 그렇다, 인간에게는 기지도 있고 기술도 있고, 헤쳐 나갈 상당한 노하우도 있다. 그러나 그들에게 주어지는 지식은 가짜이거나 오해의 소지가 있는 것이고, 인간이 처한 문제에 대한 진정한 원인을 밝혀낼 기회를 제공하지 않는다. 인간에게 이성과 양식이 결여되어 있다는 뜻이 아니다. 진정한 인간의 잠재력을 왜곡하고 해방의 가능성을 단절하는 원죄가 인간이 살아가는 동안 감당해야 할 현실을 짓누르고 있다는 뜻이다. 인간은 비이성적이지도, 쉽게 속아 넘어가지도 않는다. 그러나 인간이 아무리 성실히 삶의 경험을 성찰해보아도, 게임의 법칙을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바꿔줄 전략을 발견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이다. 간단명료하게 말하자면 이것이 바로 '이념적 헤게모니'가 제시하는 해석이다. 이 해석에 따르면, 이념이란 말로 표현된 강령, 학습하고 믿게 되는 구두표현이 아니다. 이념은 우리가 사는 방식에 내포되어있다. 사람들이 행동하고 서로 관계를 맺는 방식 자체가 이념에 '흠뻑 젖어있다.' 일단 이념적 헤게모니가 달성되면, (행위자의 이익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엉뚱한 방향을 가리키는 단서들이 행위자가 자신의 삶을 꾸려가는 세상의 도처에 촘촘히 흩뿌려진다. 따라서 행위자들이 자기 자신의 삶의 경험에 의지해서 '삶이라는 프로젝트'를 수립하고 어떤 행동을 할지 계획을 세워야 하는 한 이러한 단서들을 피하거나 그들이 가짜라는 것을 밝혀낼 가능성이 없다. 세뇌할 필요도 없다. 이미 짜인 법칙을 따라 형성된 일상에 몰입하게 만드는 것만으로도 행위자들을 이미 정해진 방향으로 계속 가도록 만들기에 충분하다.

 

[...] '지배자'와 '피지배자'가 [...] 직접 접촉하던 시대는 가고, 보다 날렵하고 기발하고 융통성 있고 경제적인 방식으로 지배자가 피지배자를 통제하는 시대가 이미 도래했거나 도래하고 있다. 어설프고 막대한 비용이 드는 '직접적 통제' 방식이 불필요해지면서 육중한 구조물이나 경직된 규율이 와해되고 사람들은 지위가 불안해지고 자신의 행동이 초래할 결과에 확신을 가질 수 없는 취약한 상태에 노출되었다. [...] 도처에 불안정성이 산재하게 되면 엄청난 숫자의 감시자들과 그들에게 지시를 내리는 상관들이 있어야 기능하는 원형교도소는 폐기되거나 철거된다. 설교자들과 그들의 장황한 훈계가 없어도 아무 문제없다. 그들이 없는 게 불안정성을 유지하는 데 더 이득이 된다. 복종을 보장하는 새로운 형태인 불안정성은 사람들로 하여금 각자 살아갈 방법을 도모하도록 내버려둘 때 더 깊어지는데, 이 각자도생(各者圖生)은 사람들이 미래를 바꾸겠다는 생각을 할 만큼 자신이 현재 놓인 여건을 강력하게 장악하도록 하기에는 턱없이 역부족이다. 오늘날에는 무관심, 무관여가 가장 흥미진진하고 널리 보급된 게임이다. 이동속도, 특히 행동의 결과가 나타나기 전에 신속하게 빠져나가는 능력은 오늘날 권력을 잡는 가장 인기 있는 방법이다.

 

우리 시대의 오만한 권력자들은 경영하고, 감시하고, 처벌하는 갖가지 골치 아픈 일에 휘말리고 싶어 하지 않으며, 특히 장기적인 약속과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엮이는 데서 오는 책임에 묶이기 싫어한다. 그들은 이동성, 융통성, 현장에서 즉시 조정하고 끊임없이 다시 태어날 수 있는 특성을 최고 가치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선택의 범위에 버금가는 막대한 재원을 언제든지 활용할 수 있으며, 새롭게 부상한 가벼움이라는 상황을 충분히 활용하고 철저히 즐긴다. 하지만 똑같은 특성이 일반적인 행위자들이 직면할 수밖에 없는 상황, 선택의 여지가 없는 상황에서는 엄청난 비인간적인 비참함을 초래한다. 우리 시대의 오만한 권력자들은 또한 자신들에게 유리한 이 게임에 도전과 경쟁을 허락하지 않는다. 불안정성과 선택의 여지가 없는 상황은 삶에서 동시에 발생하고 사라질 때도 반드시 함께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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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그문트 바우만(Zygmunt Bauman), <<방황하는 개인들의 사회(The Individualized Society)>>(홍지수 옮김, 봄아필, 2013), pp. 2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