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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로티: 오늘의 에세이-인문주의적 지식인에 관한 11가지 테제

 

인문주의적 지식인에 관한 11가지 테제

The Humanistic Intellectual: Eleven Theses

 

―― 리처드 로티(Richard Rorty), <<철학과 사회적 희망(Philosophy and Social Hope)>>, p. 127-30.

 

1. 인문학 관련 학과들이 대학의 나머지 학과들과 그것들을 구별짓는 어떤 점을 공유하는가라는 의문을 제기함으로서 '인문학'을 규정하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그 대신에 흥미로운 분할선은 학과들과 분과학문적 기반들을 가로지르는 것이다. 그것은 지식에 기여하는 것에 대한 잘 알려진 기준에 순응하느라고 바쁜 사람들과 자신의 도덕적 상상력을 확장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을 분할한다. 후자의 사람들은 가능하고 중요한 것―개인으로서 스스로를 위해 또는 자신의 사회를 위해―에 대한 자신의 감각을 확대하기 위해 책을 읽는다. 이런 사람들은 '인문주의적 지식인'이라고 부르자. 흔히 고전학과보다 인류학과에서 그런 사람들을 더 많이 발견되며, 때때로 철학과보다 법학과에서 더 많이 발견된다.

 

2. 이런 사람들이 어떤 좋은 일을 행하는지, 그들이 어떤 사회적 기능을 수행하는지 묻는다면, '교육'도 '연구'도 아니라고 하는 것이 매우 좋은 대답이다. 교육―또는 최소한 그들이 행하기를 바라는 그런 종류의 교육―에 대한 그들의 이념은 바로 지식의 소통이 아니라, 어린이들을 자극하는 것과 더 유사하다. 외유나 연구비 지원에 응모할 때 그들은 자신의 이른바 연구 과제의 목적과 방법에 관한 양식들을 채워야 할 것이지만, 그들이 정말로 하고 싶어하는 전부는 다른 종류의 사람이 될 희망을 품고 더 많은 책을 읽는 것이다.

 

3. 인문주의적 지식인들의 진정한 사회적 기능은 학생들의 자화상, 그리고 자신들이 속해 있는 사회와 관련하여 학생들 마음 속에 의심을 심어주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새로운 각 세대의 도덕 의식이 이전 세대의 도덕 의식과 약간 다르다는 점을 확신시키는 데 도움을 주는 교사들이다.

 

4. 그런데 고등교육에 대한 공적 지원의 수사법에 있어서 우리는 이런 사회적 기능에 대해 많이 이야기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사회, 정부 위원회 등에게 우리의 기능이 소동을 일으키고, 우리 사회로 하여금 죄책감을 느끼게 만들며, 그것이 균형을 잃게 만드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납세자들이 우리를 고용하는 목적은 자기 아이들이 자기와 다르게 생각할 것이라는 점을 확실히 하기 위함이라고  말할 수 없다. 어딘가 깊은 곳에서, 모든 사람은 그것이 대학이 존재하는 이유들 가운데 하나라는 점을 알고 있다. 그런데 아무도 이것을 완전히 명시적이고 공개적으로 만들 수는 없다.

 

5. 인문주의적 지식인들은 '사회적 복음' 또는 '해방 신학' 성직자, 즉 스스로를 지상에 신국을 건설하기 위해 작업하는 것으로 여기는 신부와 목사들의 입장과 유사한 입장에 처해 있음을 알게 된다. 그들의 적들은 그들의 활동을 좌파 정치 행위로 서술한다. 성직자는 신의 말씀을 전달하도록 임금을 받고 있는데, 그 대신에 정치에 개입하고 있다고 그들은 말한다. 인문주의적 지식인들은 지식에 기여하고 지식을 소통하도록 임금을 받고 있는데, 그 대신에 '인문학을 정치화하고 있다'고 비난받는다. 그러나 우리와 대등한 성직자들이 탈정치화된 교회라는 관념을 진지하게 여길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탈정치화된 인문학이라는 관념을 진지하게 여길 수 없다.

 

6. 자유주의적 성직자가 이전의 더 단순한 시대에 쓰여진 교리를 통해서 자기 길을 중얼거려야 하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인문주의적 지식인들도 여전히 이사회와 자금 지원 기관들이 익숙한 의례적 진술―'객관적인 수월성 기준들', '근본적인 도덕적 가치와 영성적 가치들', '인간 조건에 의해 제기되는 지속적인 의문들' 등에 대한 진술―을 제시해야 한다.  그런데 지난 몇 세기 동안의 반플라톤주의적, 반본질주의적, 역사주의적, 자연주의적 저술가들(헤겔, 다윈, 프로이트, 베버, 듀이 그리고 푸코 같은 사람들)에 깊은 감명을 받은 인문주의적 지식인들은 틀림없이 냉소적인 태도를 나타내게 되거나 아니면 이런 의례적 문구들 위에 고통스러운 사적 구성물들을 올려놓게 될 것이다.

 

7. 공적 수사와 사적 소명 의식 사이의 이런 긴장은 일반적으로는 강단, 그리고 특수하게는 인문주의적 지식인들을 이단 사냥꾼들에 취약하게 만든다. 윌리엄 베닛(William Bennett) 같은 야심만만한 정치인들――또는 윌리엄 버클리(William Buckley) 2세(<<예일에서의 신과 인간(God and Man at Yale)>>의 저자)나 찰스 사이키스(Charles Sykes)(<<프로프스캠(Profscam)>>의 저자) 같은 냉소적인 언론인들―은 항상 공식적 수사와 실제 실천 사이의 간극을 지적할 수 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그런 이단 사냥꾼들은 교수들의 연대에 직면했을 때 재빨리 사라진다. 인류학과 프랑스어를 가르치는 전미대학교수협회의 동료 회원들을 중심으로 뭉치기 위해, 그들이 무엇을 하는지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겠지만, 물리학 교수와 법학 교수들, 아무도 개입하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들에 의존할 수 있다.

 

8. 그런데 인문학과 관련된 현재의 소동에서 이단 사냥꾼들은 평소보다 더 취약한 대상이 있다. 이 대상은 앨런 블룸(Allan Bloom)이 '니체주의적 좌파(the Nietzscheanized left)'라고 부르는 것이다. 미국에서 이 좌파는 예외적인 것이다. 과거에 미국 좌파는 미국이라는 나라에 자체의 이상에 충실한지, 선조들이 구상했던 인간의 자유를 확장하는 길―노예제 폐지부터 여성의 선거권, 와그너 법안 그리고 시민권 운동을 거쳐서 현대 페미니즘과 동성애자 해방에까지 이르는 길―을 따라 더 멀리 나아가고 있는지 물었다. 그러나 니체주의적 좌파는 미국이라는 나라가 핵심까지 부패했다고, 즉 미국은 인종차별주의적, 성차별주의적, 제국주의적 사회이고, 조금도 신뢰할 수 없는 나라이며, 모든 발언이 무자비하게 해체되어야 하는 나라라고 말한다.

 

9. 이 좌파가 취약한 대상이 되는 또 하나의 이유는 그것이 터무니없이 과도하게 철학화되어 있을 뿐 아니라 특별히 자기강박적이고 자폐적이라는 점이다. 그것은 '단지 비판적-언어적 분석을 기반으로 하여 이데올로기 문제들과 나아가서 정치 문제들에 접근할 수 있다'고 말하는 폴 드 만(Paul de Man)의 기묘한 제안을 진지하게 여긴다. 그것은 '모든 남성과 여성들이 드 만의 의미에서 좋은 독자가 된다면 [인간들 사이의 보편적 평화와 정의의] 천년왕국이 도래할 것'이라는 힐리스 밀러(Hillis Miller)의 환상적인 주장을 수용하는 듯 보인다. 나라의 미래에 대한 유토피아적 묘사를 요청받았을 때 신좌파는 푸코의 가장 비현실적인 진술들 가운데 하나의 노선을 따라서 응대한다. 왜 결코 유토피아를 묘사하지 않는지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푸코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다른 한 체계를 상상하는 것은 현재 체계에 대한 우리의 참여를 연장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드 만과 푸코는 이런 불행한 발언들이 시사하는 것보다 훨씬 더 훌륭했지만(그리고 밀러는 훌륭하지만), 그들의 추종자들 가운데 일부는 훨씬 더 나쁘다. 과도하게 철학화되고 자기강박적인 이 좌파는 과도하게 철학화되고 자기강박적인 스트라우스주의자들의 거울상이다. 현대 미국 사회에 대한 두 집단의 경멸은 대단히 커서 국가 정치, 주 정치 또는 지역 정치에 대해서 두 집단 모두 무력해졌다. 이것은 그들이 강단 정치에 자신들의 모든 에너지를 소모하게 된다는 점을 의미한다.

 

10. 그 두 집단은 현재 필독서 목록을 어떻게 구성할지를 둘러싸고 부끄러운 전쟁을 벌이고 있다. 스트라우스주의자들은 할당되어야 하는 책들에 대한 기준은 고유한 탁월성이라고 말하고, 니체주의적 좌파는 공정성, 예를 들면, 여성, 흑인 그리고 제3 세계인들에 대한 공정성이라고 말한다. 그들 모두 틀렸다. 필독서 목록은 두 요구 사이에 정교한 균형을 유지하도록 구성되어야 한다. 첫번째 것은 학생들이 이전 세대의 사람들 및 다른 사회적 계급들에 속하는 사람들과 공유하는 공동의 준거점을 갖추도록 하는 요구인데, 그래서 조부모와 손녀손자들, 화이트워터 소재 위스콘신 대학에 진학한 사람들과 스탠퍼드 대학에 진학한 사람들이 같은 책들을 많이 읽게 될 것이다. 두번째 것은, 선생들이 위원회가 내려보낸 교과과정을 가르쳐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에게 감명을 주었고, 자신들을 흥분시켰으며, 자신들의 삶을 바꾸었던 책들을 가르칠 수 있게 하는 요구이다.

 

11. 교육철학자들, 선의의 위원회들 그리고 정부 기관들은 인문학을 이해하고, 규정하며, 관리하려고 시도했다. 그런데 핵심은, 인문학을 규정할 수 없고 관리할 수 없을 만큼 충분히 빠르게 계속 변화시키는 것이다. 인문학을 그렇게 빨리 계속 변화시키기 위해 필요한 전부는 훌륭한 전통적인 학문적 자유이다. 새로운 일단의 조교수들이 자신들의 일자리에 대해 신세를 지고 있는 학과의 원로 집단을 경멸하고 거부할 자유뿐 아니라, 이단 사냥꾼들과 그들의 '정치화!'라는 외침을 무시할 자유도 주어지면, 인문학은 계속해서 좋은 모습을 유지할 것이다. 오늘날 지역 영문학과의 이데올로기적 기상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한 세대를 기다려라. 대략 2010년 경에 니체주의적 좌파가 자체를 대체하려고 노력할 때 그들에게 무순 일이 일어나는지 지켜보라. 그 해에 똑똑한 새로운 영문학 박사 학위 소지자들은 자신들이 살아 있는 한 다시는 '이항 대립'  또는 '헤게모니 담론' 같은 술어들을 결코 듣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들일 것이라고 나는 기꺼이 단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