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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비 브라이언트: 오늘의 인용-지식/이론과 실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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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존재자적 원리(The onti Principle)]에서 수행하고자 하는 일은 토대 또는 확실성에 대한 인식론적 탐구의 기반을 약화시키는 것이다. 이것에서 비롯되는 한 결과는 존재에 대한 그 어떤 선험적 지식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내가 보기에―우리가 지식에 이르는 유일한 길은 우리 주변 세계에 대한 실험적 개입을 통해서이다. 이것은 <<객체들의 민주주의(The Democracy of Objects)>>의 서론을 거쳐 1장에서 더 명료하게 나타난다. 게다가 내게는, 우리 자신 또는 우리 뇌에 대한 우리 자신의 불투명성이 물러서 있음(withdrawal) 논제에 의해 잘 다루어지고 있는 듯 보인다. 우리는 결코 다른 객체들에 직접 접근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도 직접 접근할 수 없다. 예를 들면, 내가 엄청난 불안 발작을 겪고 있다면, 이것이 하이데거처럼 나의 "죽음을 향한 존재"에서 비롯되는지, 아니면 내가 먹은 것 때문인지 내가 판별할 길은 없다.

 

[...] 철학계와 대부분의 문화 이론 내에서는 거의 대부분의 시간이 토대주의와 회의주의(탈근대주의) 사이의 논쟁에 소요된다. 이것은 자신들의 이력서를 채우려고 노력하는 인문학자들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에게는 아무 쓸모도 없는 논쟁인 듯 보인다. 지리적 특징들이 권력 관계에 기여하는 방식, 우리가 무엇인지에 대한 신경학의 함의, 사람들이 속고 있거나 아무튼 현재의 사회적 체계들이 정당하고 올바르다고 믿기 때문이 아니라, 노동으로 녹초가 되고, 그리고 도대체 살면서 기능하기 위해서는 연료와 식량 형식으로 어떤 에너지원들에 의존하기 때문에 그들이 참을 수 없는 것들을 참아내는 방식 등을 탐구할 수 있을 사유의 틀들을 생성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

나는, 그것을 인식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모든 명제는 존재론적 주장을 제시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피할 수 없다. "당신은 어떻게 아는가?"라는 질문에 대응하여 몇 가지 점을 언급한다. 첫째, 세계는 별개의 단위체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나는 믿는다]. [...] 둘째, 나는 내가 제시하는 그 어떤 주장도 틀릴 수 있다고 믿는다. 언어가 어떤 것에 대한 이름을 갖고 있거나 또는 무언가가 존재한다고 누군가가 믿는다(예를 들면, 암흑 물질, 플로지스톤, 유령, 뇌 또는 기업)는 이유만으로 당연히 이런 것들이 정말 존재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무언가의 현존을 입증하기 위한 실험적 프로토콜이 있어야 한다. 개인적으로 나는 "당신은 어떻게 아는가?"라는 철학적 의문은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대신에 우리는 [...] 탐구 및 학습 과정들에 관해 말해야 한다. 내게 그 의문은, "고양이가 매트 위에 있다"라는 명제가 세계 저쪽에 있는 사태에 대응한다는 점을 우리가 어떻게 아는가라는 의문이 아니라, 대형 입자충돌기와 기체 상자 같은 기술들과 우리 자신의 육체 모두를 사용함으로써 개입하는 육화된 탐구를 통해서 우리는 다양한 존재자들의 현존을 어떻게 발견하는가라는 의문이다. "우리는 상대성에 대한 아인슈타인의 논문이 참이라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라고 묻는 데 시간을 덜 소요하고 현업 실험실 과학자들이 다양한 사물들의 현존을 증명하는 실천들을 바라보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소요해야 한다. [...]

 

[...] 나는 진리란 무엇이든 우연히 다수의 사람들이 믿고 있는 것, 그리고 우연히 어떤 인간 집단에서 통계적으로 지배적인 것이라는 소피스트적 관념을 [수용하지 않는다]. 나는 그저 세계에 대한 우리의 경험적 주장들은 틀릴 수 있고 후속 탐구의 결과로서 수정될 수 밖에 없다는 점을 인정할 뿐이다. [...] 어떤 인간 집단이 x를 믿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과 그들의 합의나 믿음이 아무튼 무언가를 참으로 만든다고 주장하는 것은 다른 일이다.

 

[나는] 이론이라는 술어를 "실재에 대한 표상"으로 여기지 [않는다]. 나는 이론이란 우리로 하여금 탐구를 위해 세계 또는 경험의 어떤 특징들에 주의를 기울이게 하는 지도 가설이라고 여긴다. 존재론은, 그렇고 그런 존재자들이 존재하고 탐구대상이 되어야 하는 반면에, 다른 것들은 그렇지 않다는 가설을 제시하고 있다. 내 존재론은 기본적으로 자연주의적[유물론적]이다. 따라서 가장 원초적인 층위에서 그것은, 1) 물질적 존재자들만이 존재하고, 2) 모든 원인들은 물리적이며, 3) 어떤 종류의 물리적 연결이 없다면 두 존재자 사이에 아무 상호작용도 존재하지 않는다(예를 들면, 당신과 나는 우리의 언설을 전달할 음파가 없다면, 또는 우리를 연결하는 광섬유 케이블이 없다면 이야기를 나눌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세계를 어떻게 탐구할 것인지에 대한 운영 가설이다. 예를 들면, 억제하지 못하고 음탕한 말을 요란스럽게 내뱉고 있고, 모든 종류의 불경한 것들을 말하고 있으며,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들을 보고 있는 한 여성을 대면했을 때, 자연주의자는 그녀가 귀신에 홀린 상태가 아니라, 정신분열증이나 어떤 다른 물리적 질환을 겪고 있다고 전제하며 작업할 것이다. 홀린 상태 가설이 거부되는 까닭은 지도 가설로서의 [자연주의적] 존재론이 이미 초자연적 인과관계를 배제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녀에 대한 모든 종류의 작업 후에 이런 일들을 겪지 않은 사람들과 그녀 사이에 아무 차이점도 발견할 수 없다면, 우리는 패배를 인정하고 우리의 존재론 또는 지도 가설이 잘못되었다고 말한 다음에 칠판으로 되돌아가야 할지도 모른다.

 

[...] 우리는 그저 안락의자에 앉아서 세계가 존재하는 방식과 관련된 것들을 발견할 수는 없다. 사물들이 어떤 능력을 지니고 있는지 그리고 이런저런 경우에 무엇이 무엇을 초래하는지 알아내기 위해서 우리는 실제로 물질들로 작업하면서 그것들에 작용해야 한다. 나는 과학이 우리에게 문학 작품 또는 규범 또는 예술 작품 등과 같은 것들에 대한 이해를 제공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덜 확신하지만, 그 가능성을 선험적으로 거부하지도 않는다. 지금까지 나는 이런 영역들에서 계몽적인 과학적 작업을 본 적이 없을 뿐이다[...].

 

그렇다면 이 모든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도대체 나는 왜 그런 종류의 것들을 적고 있는가? 왜 그냥 과학을 수행하거나 과학이 우리에게 존재가 무엇인지 말해준다고 말하지 않는가[...]? 상이한 독자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내 독자는 주로 (자칭 "유물론자"라고 부르지만) 변형된 관념론자로서 세계가 사유, 믿음, 기호, 언어, 서사, 담론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믿는 인문학 관련자들로 구성되어 있다. 나는 기호학자들이 우리가 사회적 세계를 이해하는 데 많은 가치 있는 것들을 기여했다고 믿고 있는 반면에, 이런 입장들과 관련된 중요한 문제점들도 존재한다고 믿고 있다. 내 작업은 이런 독자들을 대상으로 하며 그들로 하여금 물질성을 고려하여 의미작용 체계들과 현상학적 경험에 대한 그들의 이해를 자연주의적 틀 안에서 재구성하도록 설득하려는 시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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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비 브라이언트(Levi Brya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