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푹스, 머민, 샤크: 큐비즘 입문-결론

 

결론

Conclusion

 

다음의 긴급 칙령 같은 것을 통해서만 스스로를 도울 수 있습니다. 양자역학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에 관한 진술들―객체에 관한 진술들―을 금지합니다. 그것의 진술들은 객체-주체 관계를 다룰 뿐입니다. 결국 이것은 그 어떤 자연 서술에 대해서도 성립하지만, 명백히 양자역학에서는 훨씬 더 급진적이고 광범위한 의미에서 성립합니다.

   ―― 에르빈 슈뢰딩거(Erwin Schrodinger), <아르놀트 좀머펠트(Arnold Sommerfeld)에게 보낸 1931년 편지> 

 

과학적 연구 방법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한 몇 가지 요소[는]...세계는 우리 자신의 육체가 갖고 있는 특수성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어떻게 보일 수밖에 없는가 하는 것만을 연구 대상으로 삼는다 해도, 과학이 할 일은 사실상 그게 전부[라는 점이고], 과학의 궁극적 결과를 얻는 데 사용한 방법 때문에, 우리 자신의 유기체만이 아니라 거기에 영향을 준 외부의 사물도 과학의 결과를 결정하는 요인이 된다[는 점이며], 끝으로, 세계의 본질과 관련된 문제는, 그 세계를 지각하는 우리의 심리적 기관을 무시할 경우, 하나의 공허한 추상개념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 <환상의 미래(The Future of an Illusion)>, 1927.

 

보어가 20세기 처음 30년 시기 동안 큐비즘적 입장의 요소들을 명시적으로 표명한 유일한 사람은 아니었다. 두 명의 위대한 빈 태생의 탐구자들도 그런 과학관을 취했다. <환상의 미래>는 종교적 믿음의 기원에 관련된 것이지만, 프로이트는 과학적 세계 이해에 대한 철저히 큐비즘적인 특성 규정으로 자신의 에세이를 끝맺는다. 1931년에 좀머펠트에게 보낸 편지에서 슈뢰딩거는 명시적으로 양자역학에 대한 큐비즘적 견해를 취한다. 삼십 년 후에 <<자연과 그리스인들(Nature and the Greeks)>>에서 슈뢰딩거는 더 일반적으로 큐비즘적 과학관을 취하며 양자역학은 거의 언급조차 하지 않는다. 우리 누구나 세계에 관해 알고 있는 모든 것은 자신의 개별적인 사적 경험으로부터 구성되기 때문에, 물리 과학에서 그랬던 대로, 주관적 경험이 명시적으로 배제된 물리적 세계상에 의존하는 것은 현명하지 않을 수 있다고 그는 강조한다. 슈뢰딩거는 이런 배제의 기원을 찾아 고대 그리스인들까지 이천 년 이상을 거슬러 올라간다. 그것은 이천 년 이상 동안 작동했고 고전 과학을 구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그런데 우리 감각으로는 직접 접근할 수 없는 척도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이해하려고 시도할 때, 우리의 탐구 대상들과 그것들이 우리 내부에 유발하는 주관적 경험을 분리시키는 고질적인 행위 때문에 우리는 곤란을 겪게 되었다. 이런 새로운 척도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다루고자 하는 우리의 노력은 대단히 성공적이었지만, 그에 못지않게 거의 일 세기 동안 그 성공의 본성 또는 의미와 관련하여 그 어떤 의견 일치에도 이르지 못했다.

 

양자역학의 창시자들은 문제가 있다는 점을 이미 깨닫고 있었다. 보어와 하이젠베르크는 현상을 탐구하기 위해 우리가 고안한 장치들과 현상의 불가분성을 강조함으로써 그 점을 다루었다. 장치들은 경험에 대한 코펜하겐 대용물이다. 장치들이 그것들을 사용하는 행위자에 독립적이고 객관적이라는 관념은 큐비즘의 중요한 핵심을 벗어나며, 여태까지 물리학자들을 괴롭힌 악명 높은 측정 문제를 초래한다.

 

I절에서 제시한 두 인용문에서 보어는 큐비즘에 더 가까운 듯 보인다. 그러나 우리는, "경험"을 설명하도록 압박을 받았다면, 보어는 고전적 장치에 대한 우리의 경험에 의지했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양자 베이즈주의자와 달리 그는 그 술어에 충분한 범위―무엇이든 모든 경험―나 적절히 주관주의적인 수위성―누구든 사용자 자신의 경험이 그가 자기 세계를 구성하는 모든 원료를 구성한다―을 부여하지 않곤 했다.

 

양자물리학은 세계에 관한 것이 아니라, 세계에 대한 우리의 "지식"에 관한 것이라는 하이젠베르크와 루돌프 파이얼스의 후속 견해는 실제 쟁점에 훨씬 더 가까이 접근한다. 그런데 그것은 어려운 문제들을 제기한다. 누구의 지식인가? 무엇에 대한 지식인가? 문제는 "지식"이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잘못된 술어라는 것이다.

 

첫째, 일반적으로 많은 상이한 행위자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지식이라는 술어는 부적당하다. 자기 경험을 조직하기 위해 양자역학을 사용하는 사람은 누구나 행위자가 될 수 있고, 상이한 행위자들은 상이한 경험들을 겪는다. "지식"은 행위자에 독립적인 사실태를 시사할 수 있다. 불가피하게도 신자를 함축하는 "믿음"이 주체와 객체 사이에 더 균형잡힌 술어이다.

 

둘째, 양자 이론의 기본적인 출력은 일련의 사실들이 아니라, 일련의 확률들이기 때문에 "지식"이라는 술어는 부적당하다. 모든 확률과 마찬가지로, 양자역학에서도 확률은 그것을 사용하는 행위자가 기꺼이 내기를 걸거나 내기에 응하는 의향을 표현한다. 그런 의향은 행위자의 믿음에 의해 특징지워지는 주관적 판단에 의거한다.

 

우리는 큐비즘적 입장, 즉 양자 상태는 어떤 행위자의 주관적 판단이라는 입장은 브루노 드 피네티가 유창하게 표현한 주관주의적 확률관의 불가피한 결과라고 강조했다. 다른 한편으로, 거의 일 세기 동안 양자 토대를 괴롭혀온 오래된 역설과 부조리한 것들을 소거할 수 있는 큐비즘의 능력을 고려하면, 우리는 논변을 뒤집어서 큐비즘이 주관주의적 확률관에 대한 강력한 실증을 제공한다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양자 토대의 어수선한 역사는 확률―심지어 1과 0이라는 확률을 포함하여―이 주관적 판단이 아니라 세계의 객관적 특징들에 의해 뒷받침된다는 명제에 대한 유효한 고발이다.

 

그런 부조리한 것들에 속하는 것이 "양자 비국소성"이다. 우리는 큐비즘은 국소성을 물리학에 되돌려주기 위해 "치르는 대가가 너무 크다"는 말을 들어왔다. 그런데 비국소성에 반대하는 편견이 큐비즘을 수용해야 할 이유가 아니다. 과학은 객체뿐 아니라 주체도 있다는 인식은 이십 세기에 우리를 잡아채어 넘어뜨릴 때까지 이천 년 넘게 작동한 고대 그리스적 책략의 손아귀에서 우리를 해방시킨다. 주체-객체 균형을 회복시키는 것은 코펜하겐 해석의 모호한 점과 애매한 점들을 명료하게 하고, 측정 문제를 소거하며, 그리고―공교롭게도― 양자역학은  비국소적이거나, 또는 특수 상대성과 갈등 관계에 있거나 긴장 상태에 있다는 주장을 무효화한다.

 

우리가 큐비즘을 소개하는 까닭은 큐비즘이 20세기에 우리를 크게 혼란시켰던, 우리의 일반적인 과학관에 내재하는 심대한 오해를 교정하기 때문이다. 이제 21세기에 충분히 접어들었고, 모든 실제적 목적을 위해서 양자역학이 대단히 잘 작동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우리 모두가 의견이 일치하기 때문에, 확실히 과학의 본성에 대한 우리의 오래된 견해를 확장하고, 너무나 오랫동안 양자 이론의 토대를 가려왔던 안개를 없앨 적기이다.

 

―― 크리스토퍼 푹스, 데이비드 머민, 뤼디거 샤크(pp. 8-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