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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포퍼: 오늘의 인용-세 가지 세계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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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리적 세계를 나는 '제1 세계'라고 명명했다. 인간의 의식에서 일어나는 사고과정을 '제2 세계'라 했고, 인간 정신의 객관적 창조물들이 만들어내는 세계는 '제3 세계'라고 정했다.

[...]

 

가장 넒은 의미로 '제 3세계'는 인간의 정신이 낳은 산물들의 세계다. 좁은 의미로는 잘못된 가설까지 포함하여 모든 이론의 세계이자 수많은 이론의 참·거짓을 밝히는 문제를 포함한 과학적 문제의 세계이다. 넓은 의미에서 보면 문학작품이나 모차르트의 오페라, 협주곡 같은 예술 작품들은 제3 세계에 속한다. [...]

 

중요한 건 과학 이론이 속한 제3 세계와 정신적 세계인 제2 세계의 문제들을 구별하는 일이다. 이 구별은 볼차노가, 그리고 후일 프레게가 분명히 한 바 있으나, 내 이론은 두 사람이 제시한 해석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볼차노는 '자명한 진술'을 이야기했다. 여기서는 우리가 어떤 진술을 이해할 때 일어나는 정신적 사고과정이 아니라 진술의 논리적 측면이 중요하다. 프레게는 진술의 내용content을 이야기했는데, 역시 논리적 측면에서의 명제를 뜻한 것이다. 쉬운 예를 하나 들어보자. 수학자 두 명이 '3×4=13'이라는 잘못된 결론에 도달했다. 여기서 서로 다를 수 있는 두 가지 별개의 사고과정이 제2 세계에서 발생했다. 그런데 '3×4=13'은 하나의 자명한 거짓 진술이며, 하나의 논리적으로 거짓인 내용이다. 이 진술 자체는 제2 세계가 아닌 제3 세계에 속한다. 우리는 이 진술 '3×4=13'이 '3×4=12'라는 진술에 논리적으로 반한다고 말할 수 있다. 또한 '3×4=13'은, 아무리 많은 위대한 수학자들이 참이라고 믿는다 해도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항상 객관적으로 틀린 진술일 것이므로, 제3 세계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제2 세계는 주관적 사고 과정이 발생하는 세계로, 제3 세계는 객관적 진술 혹은 객관적 사고 내용이 발생하는 세계로 구분할 수 있다.

[...]

여기서 제3 세계의 두 가지 특징을 알고 넘어가자. 하나는 그것이 실재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것이 최소한 부분적으로나마 자율적이라는 것, 즉 제2 세계와 독립된 내재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먼저 제3 세계의 실재성reality에 대해 얘기해보자. 실재에서 발견되는 모든 패러다임[범형]은 제1 세계의 물리적 객체이다. [...] 나는 제1 세계의 객체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을 '실재하는 것'으로 규정할 것을 제안한다. 그렇다면 제3 세계에 속하는 과학 이론들은 제1 세계의 대상에 직접 혹은 간접적 영향을 준다고 말할 수 있다.

 

[...] 제3 세계는 대개 정신적 세계인 제2 세계를 통해 제1 세계에 간접적 영향을 준다. 어쩌면 제3 세계는 '대개의 경우'가 아니라 '항상', 직접적으로는 못하고 오직 제2 세계를 통해서만 제1 세계에 영향을 주는지도 모른다. 이 예는 제1 세계뿐 아니라 제2, 제3 세계까지, 세 가지 세계 모두의 실재성을 설명해준다. 건물이나 교각이 무너지면[...] 제2 세계의 착오 혹은 잘못된 주관적 신념의 탓일 수 있지만, 때로 내용이 거짓인 객관적 이론, 즉 제3 세계의 오류 탓인 경우도 있다.

 

물론 제3 세계의 실재성을 부정하는 학자들도 있다. 그들은 우리의 사고, 즉 제2 세계는 존재하지만 그 사고의 내용들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사고의 내용을 정신의 추상작용, 뇌가 만들어내는 환상으로 치부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내 반론은, 제3 세계가 분명 제2 세계의 산물이긴 하나 부분적으로 자율적인 자체구조를 가진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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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와 관련된] 위대한 유클리드의 증명은 이어서 "소수의 수열은 무한하다"는 하나의 정리定理로 자리 잡았다. 이 정리는 제3 세계에 속한다. 유클리드의 머릿속에 있던 가공의 정리와 가정은 제2 세계에 속하는데, 그것은 "최대의 소수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제3 세계의 사실에 임의적으로 종속되어있다.

 

유클리드는 그 증명식을 유명한 저서 <기하학 원론The Element>에 실었다. 제3 세계의 정리는 따라서 파피루스로 옮겨갔으며, 그 과정에서 제1 세계를 인간 유클리드라는 제2 세계를 통해 임의로 변화시켰다. 유클리드의 천재적인 증명은 이제 수 이론에 관하여 출판된 모든 책에 실려 있다. 그런데 책은 기계로 출판된다. 기계는 책과 마찬가지로 의심할 여지없이 제1 세계에 속한 물리적 객체이다. 이번에도 제3 세계의 자율적 부분에서 시작된 임의의 효과가 제2 세계를 통해 제1 세계에 임의적으로 영향을 끼친 것이다.

[...]

나는 방금 책이 제1 세계에 속한다고 했다. 그러나 그 내용은 당연히 제3 세계에 속한다. 서로 다른 <기하학원론> 개정판 두 권은 모두 제1 세계에 속한다. 두 권이 아무리 달라도 상관없다. 그러나 두 권이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두 책은 똑같이 제3 세계에 속한다. 그러므로 책이나 도서관 그리고 내 강연의 원고는 제1 세계와 제3 세계에 속한다. 청중 가운데 누군가가 내 독일어[...]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내 강연의 청각적 효과, 제1 세계에 속하는 부분만을 들을 것이다. 그러나 독일어를 이해하고 내가 말하는 논지를 이해하려고 애쓰는 사람에게는 내 강연에서 오직 제3 세계에 속하는 부분만이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내 강연을 이해하려는 여러분의 노력은 제2 세계에 속한다. 그런 노력을 할 때 여러분은 제3 세계에 속하는 어떤 대상에 집중하게 된다. 따라서 여러분의 제2 세계는 제3 세계로부터 임의적으로 영향을 받는 것이다.

 

종합해보면, 제1 세계와 제3 세계에 동시에 속한 객체가 존재하며 또한 제2 세계와 제3 세계에 동시에 속한 객체가 존재한다는 말이 된다. 중요한 것은, 제3 세계에'만' 속한 객체 또한 존재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어느 수학자가 오늘 연구하고 있으며 내일 발견하게 될 '아직 발견 안 된 증명'이 그것이다. 그 증명은 내일이면 제2 세계와 제3 세계에 모두 속하게 될 것이며, 종이에 기록된다면 제1 세계에도 속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그 증명이 기록되기 전에 이미 제1 세계에 속해 있다고, 알지는 못해도 가정할 수는 있다. 제2 세계의 사고과정이 추정컨대 두뇌 작용과 연계되어 있으며 따라서 제1 세계의 물리적 현상과 연결되어 있는 셈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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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 포퍼(Karl Popper), <<삶은 문제해결의 연속이다(All Life is Problem Solving)>>(허형은 옮김, 부글북스, 2006), pp. 279-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