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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토퍼 푹스: 오피니언-양자론은 아무 '해석'도 필요하지 않다

 

- 아래 글은 양자물리학자 크리스토퍼 푹스(Christopher A. Fuchs)와 애셔 페레스(Asher Peres)가 미국 물리학회에서 출간하는 잡지인 <<피직스 투데이(Physics Today)>> 2000년 3월호 <오피니언(Opinion)>란에 실은 기고문을 옮겨 놓은 것이다.

 

- 크리스토퍼 푹스는 현재 캐나다 워털루 시에 소재한 페리미터 이론물리학 연구소(Perimeter Institute for Theoretical Physics)의 연구원으로 양자정보학을 연구하고 있다. 최근에 수십 명의 물리학자와 교환한 이메일을 모은 책 <<양자정보 시대의 도래(Coming of Age with Quantum Information)>>(2011)를 펴냈다.

 

- 애셔 페레스(1934-2005)는 이스라엘인 물리학자로서 양자정보이론의 선구자로 여겨진다. <<양자론: 개념들과 방법들(Quantum Theory: Concepts and Methods)>>(1993)라는 뛰어난 책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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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자론은 아무 '해석'도 필요하지 않다

Quantum Theory Needs No 'Interpretation'

 

 

최근에 <<피직스 투데이>>에서 양자론에 대한 다양한 "해석들"을 주창하는 논문들, 개관 논문들, 그리고 편지들의 홍수가 있었다(1998년 3월호 42쪽, 1998년 4월호 38쪽, 1999년 2월호 11쪽, 1999년 7월호 51쪽, 그리고 1999년 8월호 26쪽을 보라). 그것들의 계속되는 주제는, 양자론이 출현한 때부터 특수한 해석의 발견까지, 그것의 토대가 불만족스럽거나 심지어 정합적이지 않았기 때문에 그 이론은 위기에 처했다는 점이다. 우리는 이런 의견들의 공표 때문에 몇몇 독자들이 표준 양자역학의 타당성에 대해 왜곡된 관점을 갖게 되지 않을까 심각하게 염려한다. 양자론이 위기에 처해 있었다면, 실험과학자들이 오래 전에 우리에게 정보를 주었을 것이다!

 

이 기고문의 목적은 양자역학에 대한 "해석 없는 해석(interpretation without interpretation)"의 내적 정합성을 설명하는 것이다. 양자론을 사용하고 그것의 특질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것은 더 이상 아무것도 없다. 우선, 과학에서 실험의 역할을 검토하자. 실험이란 자연의 추이에 대한 적극적인 개입이다. 우리는 자연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보기 위해 이런저런 실험을 시행한다. 우리는 축적된 자료로부터 관찰한 모든 것에 대한 간결한 서술과 후속 실험들이 그 서술을 입증할 지표를 추출할 수 있을 때 새로운 무언가를 알게 된다. 이것이 과학이다. 게다가 그런 서술로부터 우리의 개입에 무관하게 독립된 "실재"에 대한 모형을 추출할 수 있다면, 훨씬 더 좋다. 고전물리학이 그런 모형의 궁극적인 보기이다. 그렇지만, 실재론적 세계관을 항상 획득할 수 있다는 논리적 필연성은 전혀 없다. 만약 세계가, 우리가 우리의 실험 활동에 독립적인 실재를 결코 판별할 수 없는 그런 것이라면, 우리는 그것에 대해서도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

 

모든 비표준적 "해석들"에 공통적인 요소는 우리의 잠재적 실험들에 독립적인 어떤 실재에 대응하는 특징들을 지닌 새로운 이론을 만들어내고 싶은 욕망이다. 그런데, 예측력을 전혀 개선하지 않는 채, 숨은 변수들, 다중세계, 정합성 규칙, 또는 자발적 붕괴로 양자역학을 거추장스럽게 함으로써 고전적 세계관을 충족시키려고 노력하는 것은 더 나은 이해라는 환상을 줄 뿐이다. 이런 욕망과는 대조적으로, 양자론은 물리적 실재를 서술하지 않는다. 그것이 행하는 바는 우리의 실험적 개입의 결과인 거시적 사건들("검출기의 딸깍하는 소리들")에 대한 확률들을 계산하기 위한 알고리듬을 제공하는 것이다. 양자론의 범위에 대한 이런 엄밀한 정의가, 실험과학자이든 이론과학자이든, 누구나 항상 필요로 하는 유일한 해석이다.

 

모든 확률과 마찬가지로, 양자 확률도 무엇이든 입수가능한 정보를 사용하여 계산된다. 이것은 한 계의 준비에 관한 정보를 포함할 수 있지만, 그 정보에 한정되지는 않는다. 정보를 통계적 예측으로 변환시키기 위한 수학적 도구는 막스 보른(Max Born)에 의해 가정된 확률 규칙이다.1) 오늘날 보른 규칙의 확실성은 앤드류 글리슨(Andrew Gleason)의 한 정리에서 도출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2) 한 물리계에 대한 예-아니오 시험들은 투사 연산자(projection operator) P로 나타내어지며, 그리고 그 확률들은 직교하는 투사 연산자들에 걸쳐 부가적이라고 가정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때 어떤 "예" 대답의 확률이 tr(ρP)이도록 계를 서술하는 밀도행렬 ρ가 존재한다. "양자 상태(quantum state)" ρ에 의해 나타내어지는 확률들의 일람표가 한 물리계에 관해 의미있게 말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포착한다.

 

그런데, 양자론의 통계적 본질의 타당성은 많은 수의 비슷한 계들이 존재하는 상황들에 한정되지 않는다는 점을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통계적 예측들은 단일한 사건들에 적용된다. 우리가 내일 비 올 확률이 35%라고 들을 때 오직 하나의 내일이 있을 뿐이다. 이것은 우산을 휴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한다. 확률론은 불확실성에 직면하여 합리적인 결정을 내리는 방법에 관한 정량적인 형식화일 뿐이다.

 

우리는 관찰자들이 지각하는 것에 독립적인 객관적 실재의 가능한 현존을 거부하지 않는다. 특히, 검출기의 딸깍하는 소리나 행성 운동 같은 거시적 현상의 극한 사례에는 "유효한" 실재가 있는데, 우연히 그 자리에 현존하는 어떤 관찰자도 이런 사건들의 객관적인 발생을 인정할 것이다. 그렇지만, 그런 거시적 서술은 계의 자유도들을 대부분 무시하고 필연적으로 불완전하다. 모든 세부가 완전히 서술되는 "미시적 실재"도 존재할 수 있는가? 그런 종류의 어떤 서술도 양자론에 의해 주어질 수 없으며, 어떤 다른 합당한 이론에 의해서도 주어질 수 없다. 존 벨(John Bell)은 양자론의 예측들과 동일한 실험적 예측들을 제공하는 어떤 객관적인 이론도 필연적으로 비국소적일 것이라는 점을 공식적으로 증명했다.3) 결국 그것은 우리 자신들을 포함하여 우주의 모든 것을 포괄해야 하고, 그래서 당혹스러운 자기지시적인 논리적 역설들을 초래할 것이다. 후자는 물리학의 영역에 속하지 않는데, 실험물리학자들은 결코 그것들을 고민할 필요가 없다.

 

양자론이 원자 반경의 10^(-10)에서 10^(15)까지의 범위에서 성공적이라는 실험적 증거는 있는데, 그것이 보편적으로 타당하다는 증거는 없다. 그럼에도, 예를 들면, 에너지가 엄청나게 높은 상태들에서, 또는 우주 전체를 비롯한 전체물리학적 계들에서 입자 상호작용들을 탐지할 때와 같이, 양자론을 현재의 범위를 넘어 외삽하려고 시도하는 것은 정당하다. 사실상, 한 가지 흔한 질문은 우주가 파동함수를 갖고 있는지 여부이다. 이것을 이해하는 두 가지 길이 있다. 이런 "우주의 파동함수"가 우리 자신을 비롯한 모든 것에 관해 완전히 서술해야 한다면, 또 다시 우리는 무의미한 똑같은 역설들을 얻는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가 우주 반경, 우주의 평균 밀도, 전체 바리온 수 등과 같은 그저 몇 개의 집단적인 자유도를 고려한다면, 우리 자신들 및 다른 중요하지 않는 세부사항들을 포함하지 않는 이런 자유도들에만 양자론을 적용할 수 있다. 이것은 SQUID에서 원자의 세부사항들을 무시한 채 자속과 전류를 양자화하는 것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확실히, 우리는 SQUID를 우주 반경보다 더 쉽게 조작할 수 있지만, 원칙적으로 아무 차이도 없다.

 

양자역학은 관찰자에 적용되는가? 왜 안되겠는가? 양자역학적이라는 것은 양자 서술이 가능하다는 것일 뿐이다. 원칙적으로는 아무것도 우리가, 예를 들면, 한 동료를 양자화하는 것을 못하게 막지 않는다. 구체적인 일례를 검토하자. 관찰자는 자기 실험실에 들어와 광선 분리기를 통해 광자 한 개를 보내는 캐시(실험물리학자)이다. 그녀의 검출기들 가운데 하나가 활성화되면, 그것은 케이크 한 조각이 담긴 상자를 열며, 나머지 한 검출기는 과일 한 조각이 담긴 상자를 연다. 캐시의 친구 어윈(이론물리학자)은 실험실 밖에 머무르며 캐시의 파동함수를 계산한다. 그에 따르면, 그녀는 그녀의 뱃속에 케이크 또는 과일이 있는 상태들의 50/50 중첩 상태에 있다. 그것에 잘못된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이것은 캐시에 대한 그의 지식을 나타낼 뿐이다. 한 검출기가 활성화되자말자 그녀의 파동함수는 붕괴되었다. 물론 그녀에게는 극적인 것이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먹을 수 있는 음식 종류에 대한 지식을 획득했을 뿐이다. 어윈은 실험실을 살짝 들여다보는데, 그 때문에 그는 새로운 지식을 획득하고, 그래서 그가 캐시를 서술하는 데 사용하는 파동함수가 변화한다. 이 보기에서, 파동함수란 확률들의 값을 구하기 위한 수학적 표현일 뿐이고 누구든 계산을 하고 있는 사람의 지식에 의존한다는 점이 분명하다.

 

캐시의 이야기는 불가피하게 가역성의 문제를 제기하는데, 결국 양자 동역학은 시간대칭적이다. 만약 어윈이 캐시를 아직 관찰하지 않았다면 그는 그 과정을 무화할 수 있을까? 원칙적으로는 할 수 있는데, 어윈이 가진 유일한 정보는 그의 잠재적인 실험들의 결과들에 관한 것이지, "저편에 실제로" 존재하는 것에 관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윈이 아무 관찰도 한 적이 없다면, 그가 캐시의 소화와 기억을 되돌릴 수 없는 이유가 전혀 없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 그는 캐시 및 그녀의 실험실의 모든 미시적인 자유도들을 완전히 제어할 필요가 있을 것이지만, 그것은 실제적인 문제이지 근본적인 문제가 아니다.

 

정보를 나타내는 것으로서의 양자 상태의 독특한 특질은 양자 전송(qauantum transport) 과정에 의해 두드러지게 예시된다.4) 한 광자에서 다른 한 광자로 어떤 양자 상태를 전송하기 위해서, 송신자(앨리스)와 수신자(밥)는 표준적인 얽힘 상태에 있는 한 쌍의 광자를 그들 사이에 나눠 가질 필요가 있다. 그 실험은, 그것의 분극 상태를 앨리스는 모르지만 제3의 준비자는 알고 있는 또 하나의 광자를 그녀가 받으면서 시작한다. 앨리스는 자신의 두 광자―하나는 얽힘 상태에 있는 원래의 한 쌍에 속하는 것이고 나머지 하나는 그녀가 모르는 상태에 있는 것―에 대해 실험을 수행한 후에, 밥에게 2비트에 불과한 고전적 메시지를 전송하는데, 그 메시지는 그로 하여금 자신의 광자에 그런 미지의 상태를 재현하는 방법을 지시한다. 이런 전송의 경제는 놀랄 만한 듯 보이는데, 한 광자의 상태, 즉 푸앵카레 구의 한 점을 완전히 규정하기 위해서는 무한한 비트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런 완전한 규정이 전송되는 것이 아니다. 2비트의 고전 정보는 준비자의 정보를 원래의 광자에 대한 서술에서 밥이 소유한 광자에 대한 서술로 전환하는 데에만 활용된다. 그 일을 행하는 데 소진된 통신 자원은 앨리스와 밥이 공유한, 서로 관련된 한 쌍의 광자이다.

 

좋은 의도를 지닌 몇몇 이론가들이 물리적 "관측가능량(observable)들"의 객관적 특질을 기꺼이 버리면서, 그럼에도 추상적 양자 상태를 대리 실재로서 유지하기를 바라는 점은 흥미롭다. 파동함수가 명시적으로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모든 양자계가 파동함수를 갖는다고 믿고 싶은 유혹이 있다. 명백하게, 이런 유혹의 근원은, 고전역학에서는 위상 공간(phase space)의 점들이 객관적 데이터에 대응하는 반면에 양자역학에서는 힐베르트 공간의 점들이 양자 상태들에 대응한다는 것이다. 이런 유비는 잘못되었다. 양자 상태들에 실재성을 귀속시키는 것은 일련의 "양자 역설들"을 초래한다. 이것들은 양자론에 대한 잘못된 해석에서 기인할 뿐이다. 올바르게 사용되면, 양자론은 잘 제기된 질문에 대해 두 개의 모순적인 대답을 결코 산출하지 않는다. 특히, 어떤 파동함수도 우리가 실험을 수행하기 이전에도 그리고 이후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고전 우주론자들이 "시간"이 대폭발(big bang) 이전에도 없고 대붕괴(big crunch) 이후에도 없다는 관념에 익숙해진 것과 꼭 마찬가지로, 양자 맥락에서 "이전"과 "이후"를 사용하는 것에 주의해야 한다.

 

양자론은 고전물리학적 관점에서 보면 합당한 듯 보이는 몇몇 질문들에 대해 대답할 수 없기 때문에 불완전하다고 비난받아 왔다. 예를 들면, 단일한 계가 순수 상태에 있는지 얽힌 복합계의 일부인지 확인할 길이 없다. 게다가, 파동함수의 "붕괴"에 대한 동역학적 서술도 없다. 파동함수는 객관적인 존재자가 아니기 때문에, 두 경우 모두에서 양자론은 대답을 내어놓지 못한다. 붕괴는 계에 대한 우리의 서술에서 일어나는 일이지, 계 자체에 대한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파동함수의 시간 의존성은 물리적 계의 전개를 나타내지 않는다. 그것은 그 계에 수행될 잠재적 실험들의 결과들에 대한 우리의 확률들의 전개를 나타낼 뿐이다. 이것이 파동함수의 유일한 의미이다.

 

이렇게 말했음에도, 우리는 양자론의 토대는 더 이상 조사할 가치가 없다고 주장하지 않을 것이다. 예를 들면, 양자론을 낳는 물리적 가정들의 최소한의 집합들을 탐색하는 것은 흥미롭다. 또한 양자역학과 중력을 결합하는 방법도 아직 이해하지 못하는데, 거기서 주워 모을 중요한 통찰이 당연히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양자역학을 우리 주변의 현상들에 대한 유용한 지침으로 삼는 데에는 우리가 이미 갖고 있는 전적으로 정합적인 이론 외에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다. 양자론은 아무 '해석'도 필요하지 않다.

 

1) M. Born, Zeits. Phys. 37, 863 (1926); 38, 803 (1926).

2) A. M. Gleason, J. Math. Phys. 6, 885 (1957).

3) J. S. Bell, Physics 1, 195 (1964).

4) C. H. Bennett, G. Brassard, C. Crepeau, R. Jozsa, A. Peres, and W. K. Wootters, Phys. Rev. Letters 70, 1895 (1993).

 

번역: 김효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