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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샤비로: 오늘의 에세이-박쥐, 개, 그리고 탈인간들

 

박쥐, 개, 그리고 탈인간들

Bats, Dogs, and Posthumans

 

―― 스티븐 샤비로(Steven Shaviro)

 

박쥐의 입장에서 경험한다는 것은 어떠한 것인가?

 

철학자 토머스 네이글(Thomas Nagel)은 1974년에 처음 발표된 한 유명한 에세이에서 이 의문을 제기했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개와 고양이와 다른 포유 동물들처럼 박쥐도 단순한 자동 장치가 아니라고 생각할 것이다. 박쥐는 경험을 겪는데, 말하자면 어떤 종류의 내적인 주관적 삶을 갖는다. 다시 말해서, 박쥐의 입장에서 경험하는 것은 "무언가와 같을 것"이라고 네이글은 말한다. 그런데, 박쥐는 우리와 매우 달라서 우리가 박쥐의 입장에서 경험한다는 것이 정확히 어떠한지 상상하기는 어렵다. 박쥐의 반향위치측정 능력, 또는 박쥐의 비행 경험에 대한 인간의 등가물을 어떻게 찾아낼 수 있겠는가? 인간과 다른 영장류와 비교하면 박쥐는 "근본적으로 이질적인 생명 형태"라고 네이글은 말한다. 특히, "박쥐의 음파 탐지는 명백히 하나의 지각 형식이지만 작동 방식에 있어서 우리가 지니고 있는 그 어떤 감각과도 비슷하지 않고, 그래서 그것이 주관적으로 우리가 경험하거나 상상할 수 있는 것과 같을 것이라고 생각할 이유가 전혀 없다." 우리는 박쥐의 마음을 쉽사리 생각할 수 없다.

 

사실상 네이글의 의문은 오래 전부터 지금까지 서양 사상의 관심사였던 한 문제의 생생한 일례일 뿐이다. 심지어 데카르트 이래로, 철학자와 예술가들은 공히 다른 마음들의 문제에 대해 걱정했다. 데카르트는 주관적 경험을 모든 확실성에 대한 근거로 삼는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이것은, 나의 모든 특수한 생각들이 망상적이거나 거짓이라도, 내가 그것들을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은 여전히 참이라는 점을 의미한다. 그런데 정말 이것은 얼마나 많이 확신할 수 있는가? 나는 그 어떤 다른 사람의 느낌도 내부로부터, 즉 내 자신의 느낌을 경험하는 방식으로는 경험하지 못한다. 데카르트는 자신이 창문을 통해 바라보는 형상들이 실제 인간들이 아니라, "자체의 운동이 스프링 장치에 의해 결정될 수 있는 인공 기계를 덮고 있는 모자와 외투들"일지도 모른다고 걱정했다. 그런 가정이 아무리 터무니없거나 편집증적인 듯 보일지라도, 그것을 절대적으로 반증할 방법은 전혀 없다. 현대의 과학소설 작품들―필립 K. 딕의 소설들, 또는 <<매트릭스>> 영화들을 생각하자―은 여전히 이 주제를 다룬다. 그것들은 세계가 그 속에 사는 모든 사람들과 함께 아무튼 우리 마음에 심어져 있는 거대한 가상현실 시뮬레이션에 지나지 않는다는 불안감을 표현한다.

 

이런 종류의 편집증적 회의주의에 대한 최선의 대응책은 유비 논증이다. 일반적으로 다른 사람들도 나와 거의 똑같은 방식으로 행위하고 반응하며, 스스로를 표현한다. 우리 모두는 웃고 울며, 고통스러울 때 신음하며, 저쪽에 있는 벽이 빨간색으로 칠해져 있다고 동의한다. 이것에 의거하여 나는 다른 인간들도 나와 같은 종류의 의식 또는 내적 경험을 지니고 있음에 틀림없다고 추정할 수 있다. 물론, 이것은 절대적인 논리적 증명은 아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은 고통스럽지 않을 때 고통스러운 체하면서 연기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유비 논증은 실용적으로 작동한다. 비트겐슈타인이 서술하듯이, 내적 경험의 언설에 대한 자신의 회의주의에도 불구하고, "실제 사례에서 그냥 다른 사람의 두려움 또는 고통을 의심하려고 해보라!" 소시오패스만이 그렇게 할 것이다.

 

유비와 관련된 진짜 문제는 정반대 방향, 즉 그것을 우리가 해야 하는 것보다 더 멀리 연장하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에 놓여 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느낌, 욕망, 그리고 의도들을 식별하는 데 매우 능숙해서 그렇지 않을 때에도 이런 것들이 존재한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무작위적인 데이터 조각들에서 유형들을 식별한다. 우리는 결정론적 메커니즘들에 의도를 귀속시킨다. 우리는 사실상 결코 송신되지 않은 메시지들을 판독한다. 우리는 세계 속의 모든 것이 아무튼 우리와 관련이 있다고 가정한다. 편집증적 확신은 편집증적 회의주의보다 더 해로운 위험한 것이다.

 

우리가 박쥐의 입장에서 경험하는 것이 어떠한 것인지 파악하지 못한다면, 이것은 우리가 그것을 결코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지나치게 인간형상화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너무나 자신만만하게 박쥐는 똑똑하지 않을 뿐 정확히 우리와 같다고 가정한다. 우리는 그것이 본원적으로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고 느끼질도 모른다는 점을 망각한 채 박쥐 같은 생물체를 우리 자신의 사유의 이미지 아래 포섭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달리 박쥐를 이해하기를 바랄 수 있을 것인가? 우리가 박쥐의 마음을 파악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면, 심지어 훨씬 더 멀리 떨어진 지적 유기체―예를 들면, 문어―의 마음을 파악하기를 어떻게 바랄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다른 행성들 출신의 지적 존재자들의 마음―훨씬 더 외삽하면―은 어쩔 것인가? 피터 와츠(Peter Watts)의 과학소설 <<블라인드 사이트(Blindsight)>>는, 그 어떤 지적 또는 기술적 척도로도 우리보다 더 선진적이지만, 우리가 인식하거나 이해할 수 있는 그 어떤 의미에서도 결코 의식이 있지 않은 것으로 판명되는 외계인들과의 최초의 접촉에 대한 이야기를 전개한다.

 

와츠는 유비 논증을 뒤집어서 외계인들을 상상한다. 그의 소설 제목―블라인드 사이트(맹시)―는 명백히 눈이 먼 사람이 무의식적으로는 볼 수 있는 충분히 입증된 의학적 조건을 가리킨다. 맹시 환자들은 무언가 보고 있는 것을 의식하지 못한다. 그런데 그들에게 공을 던지면, 그들은 흔히 그 공을 잡을 수 있다. 그리고 그들에게 그들이 볼 수 없는 빛의 위치를 "추측하"도록 요청하면, 일반적으로 그들은 올바른 방향을 가리킬 수 있다. 명백히 그들의 뇌는 여전히 시각적 자극을 처리하고 있는데, 이런 처리 과정의 결과는 의식적 마음에 "보고"되지 않지만 말이다. 그런 무의식적인 심적 활동이 와츠가 외계인들을 상상하는 근거가 되는 유비를 제공한다. 그렇게 하면서 그는 의식이 진화적으로 적응성이 없는 것―다른 유기체들과 경쟁할 수 있는 우리의 능력과 우리의 효율을 감소시킨다―일지도 모른다고 불안하게 시사한다.

 

와츠의 사변적 소설은 한가한 환상소설이 아니다. 사실상 무의식적인 심적 과정들은 단순히 맹시 또는 다른 신경학적 질환들을 겪는 사람들에만 한정되지는 않는다. 현대의 신경생물학은 우리 뇌가 행하는 일의 대부분은 무의식적이고, 심지어 적극적으로 의식에 불투명하다고 말해준다. 기껏해야 우리는 우리의 모든 복잡한 심적 활동의 결과들을 자각할 뿐이다. 세계에 대한 의식적 접근에 대해 우리가 치르는 대가는 우리에게 이런 접근을 제공하는 메커니즘들을 파악하지 못하는 무능력이다. 우리는 우리로 하여금 볼 수 있게 하는 과정들을 "볼" 수 없다. 신경철학자 토머스 메칭거(Thomas Metzinger)가 서술하듯이, "투명함은 특수한 형식의 어둠이다."

 

이것은 "어떠한 것인가"라는 의문 전체를 상이한 발판 위에 놓는다. 내가 박쥐의 입장에서 경험한다는 것이 어떠한 것인지 알지 못한다면, 이것은 또한 내가 인간의 입장에서 경험한다는 것이 어떠한 것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실상, 심지어 나는 내 자신의 입장에서 경험한다는 것이 "어떠한 것인지" 정말 알지 못한다. 내 의식은 본원적으로 불완전하고, 그것은 결코 내 자신에게만 "속하지"는 않는다.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라는 말은 모든 종류들의 무의식적인(그리고 비일인칭) 심적 과정들에 의해 생성되고 추동된다. 다른 것들이 나를 통해, 그리고 내 속에서 생각한다. 내 자신의 사유는 내가 자각하지 못하는(그리고 자각할 수도 없는), 나를 생각하는 이 모든 다른 사유들의 총합일 뿐이고, 그리고 어느 정도 그것들의 변형일 뿐이다. 그런 무의식적 사유는 전통적으로 프로이트적 무의식으로 알려진 것을 포함할 수도 있을 것―그러나 확실히 그것에 한정되지는 않는다―이다. 내 사유 과정들은 자기충족적인 것이 아니라, 대체로 생태적이거나 환경적인 것이다.

 

부분적으로, 이런 이유 때문에 모든 사유는 육화되어 있다. 한때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가 서술했듯이, "우리는 우리 눈과 함께 보고, 우리는 우리 혀과 함께 맛을 보며, 우리는 우리 손과 함께 접촉한다." 오늘날 우리는 우리 눈뿐 아니라 우리의 신경세포와 피질과 함께 본다고 덧불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것조차도 충분히 멀리 나아가지 못했다. 또한 우리는 우리 눈으로 들어오는 광자들을 반사하는 객체들과 함께 본다고 말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 귀와 함께 듣지만, 또한 우리는 공기를 통해 우리에게 전달되는 진동을 일으키는 사물들과 함께 듣는다.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에게 치근덕거리고 영향을 미치는 우리 환경 속의 모든 사물들에 의해 감각하고 느낀다. 그리고 이것들은 우리가 명백히 자각하는 객체들을 포함하지만, 그것들에 한정되지는 않는다. 우리의 주변 환경은 자체적으로 의식적 분별의 문턱 아래에 여전히 머물고 있는 사물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런 것들을 실제로 지각할 수는 없지만, 모호한 직관, 분위기, 그리고 정취의 형태로 간접적으로 감각한다.

 

또한 이 방대한 주변 환경은 "다른 마음들"을 파악하기 위해, 또는 다른 한 생명체의 입장에서 경험한다는 것이 "어떠한 것인지" 상상하기 위한 유비의 사용에 대응한다. 유사성의 정도(은유) 자체는 더 거대한 환경 내에서의 근접성의 정도(환유)에 의존한다. 예를 들어, 박쥐 대신에 개를 생각하자. 개가 박쥐보다 본질적으로 인간과 더 유사하지는 않다. 개는 대체적으로 냄새로 작동한다. 오히려 이것은 소리로 작동하는 것보다 우리가 상상하기 훨씬 더 어렵다. 맹인들은 흔히 자신의 목소리로, 또는 자신의 지팡이를 가볍게 두드림으로써 반향위치측정 방법을 습득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어떤 인간(최소한 현재 구성된 대로는)도 개처럼 후각위치측정 방법을 습득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박쥐보다 개에 대해 훨씬 더 친근감을 느낀다. 우리는 개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훨씬 더 잘 상상할 수 있고, 개가 어떠한지―심지어 개가 인간과 다른 점들―에 대해 훨씬 더 잘 서술할 수 있다. 이것은 인간과 개 사이의 오랜 역사적 관계 때문이다. 개는 우리의 공생 동물, 공생자, 친구, 그리고 동반자다. 우리는 수천 년 동안 개와 함께 살아왔다. 우리는 공통의 환경적 배경을 박쥐보다 개와 함께 훨씬 더 많이 공유한다. 이것은 우리 안에서 생각하는 많은 것들이 개 안에서도 생각한다―박쥐의 경우에는 결코 참이지 않는 방식으로―는 것을 의미한다. 명백히, 시각적 객체들과 후각적 객체들은 개와 똑같은 방식으로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지도 않으며, 우리 안에서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그것들의 공동의 현전은 우리와 개 사이의 간극을 연결하는 데 도움이 된다.

 

내가 주변 환경으로 부르고 있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또는 그것과 별도로는 아무 사유도 가능하지 않다. 확실히 이것은 인간이 존재하는 동안 줄곧 참이었다. 사실상, 무엇이든 어떤 생명 형태가 존재하는 동안 줄곧 참이었다. 그런데 오늘날 왜 이 상황이 우리의 특별한 관심사인가? 또는 더 잘 서술하면, 오늘날 왜 이 상황이 매우 긴급해졌는가? 나는 이것에 대한 두 가지 이유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이제 그 이유들을 살펴보자.

 

우선, 최근의 디지털 기술 덕분에 우리는 과거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철저히 그리고 정밀하게 주변 환경을 파악하고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매체이론가 마크 핸슨(Mark Hanson)은, 우리 육체 내부에 그리고 우리 환경 전체에 걸쳐서 빠짐없이 퍼져 있는 디지털 마이크로 센서들이 우리가 현상적으로 또는 반성적으로 이용할 수 없는 환경적 과정들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여 우리에게 되먹임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한 글을 적었다. 현재 우리는 우리의 결정과 행위들을 구성하는 데 도움이 되는 지각할 수 없는 특징들―근육 긴장, 또는 신경의 작용 퍼텐셜뿐 아니라, 무의식적인 환경 신호 같은 것들―을 알―간접적으로 그리고 사후일지라도―수 있다. 그 다음에 우리는 이 정보를 사용하여 후속 결정과 행위들에 영향을 미칠 환경을 재구성할 수 있다.

 

과학소설 작가 칼 슈뢰더(Karl Schroeder)는 이것을 훨씬 더 밀어붙인다. 근미래 단편소설 "속죄물(Deodand)"에서 그는 도처에 존재하는 마이크로 센서들이 주체와 객체 사이, 또는 인간, 비인간 유기체, 그리고 무생물 사이의 구별을 없애는 세계를 그린다. "엄청난 양의 데이터"가 우리의 편익을 위해 수집될 뿐 아니라, "꼬리표를 붙이는 모래알 크기의 센서들 사이에 교환되"고, 궁극적으로는 "사물들 자체" 사이에 교환된다. 일단 어떤 존재자가 충분히 풍부하게 데이터 입력을 받게 되면, 그는 암묵적으로 자체의 인격성을 선언한다. 객체들은 서로 말하고 응대할 수 있고, 그래서 자신의 이해관계를 주장하고 그것에 따라 행위할 수 있다. 슈뢰더의 이야기는, 우리는 "단지 두 종류의 사물, 즉 인간객체가 있을 뿐이라는 관념"을 거부해야 한다는 점을 말한다. 세계 속 대부분의 존재자들은 "얼마간 둘 다"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항상 그랬다. 그런데 오늘날, 마이크로 감지 기술로, "우리는 그 사실을 더 이상 무시할 수 없다."

 

오늘날 주변 환경의 중요성에 대한 두 번째 이유는 훨씬 더 음산한 것이다. 우리의 기술―산업적 기술과 디지털 기술 모두―은 오염, 지구 온난화, 그리고 개별 종들과 전체 생태계들의 절멸을 통해서 환경을 파괴해왔다. 이것은 우리의 의도적인 행위들의 결과라기보다 우리에게 지각할 수 없게 영향을 미치고, 결과적으로 그것들 자체가 우리의 영향을 받는 주변 환경의 모든 인자들과 인간들의 무의식적인 상호작용의 결과다. 기후변화와 방사능 붕괴는 생태비평가 티모시 모턴(Timothy Morton)이 거대객체(hyperobject)―시간과 공간에 있어서 대단히 넓게 배치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가 결코 직접적으로는 지각할 수 없는 실제로 존재하는 것―라고 부르는 것의 주요한 예들이다. 예를 들면, 지구 온난화는 전적으로 실재적이라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지구 온난화 자체를 경험할 수는 없다. 오히려 우리는 특수한 날에 "날씨"를 경험한다. 기꺼해야 우리는 요즘이 예전보다 평균적으로 더 따뜻하다는 사실을 경험할 것이다. 그런데 겨울의 가장 추운 날조차도 지구 온난화를 반박하지 못한다. 가장 더운 여름날도 그것을 "입증하지" 못한다. 또 다시, 우리는 우리의 직접적인 지각적 파악 능력을 넘어서지만, 그럼에도 무엇이든 우리가 지각하고 경험하는 것에 강력히 영향을 미치는 사물이나 과정들을 직면한다.

 

파올로 바치갈루피(Paolo Bacigalupi)의 단편 과학소설 "모래와 슬래그의 사람들(The People of Sand and Slag)"은 바로 이런 상황을 다룬다. 화자와 나머지 두 동료는 유전공학적으로 만들어지고 급진적인 방법으로 능력이 증강된 탈인간들이다. 그들은 "동물 왕국을 초월해" 버렸다. 그런데 그들의 육체와 마음은 어떤 종류의 프로메테우스적 프로그램, 엑스트로피언주의적 프로그램, 또는 가속주의적 프로그램의 결과이지 않다. 오히려, 그들은 본원적으로 변화된 환경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기본적인 인간에서 개조되었다. 그들은 몬타나의 자동화된 채굴 작업을 지키는 병사들이다. 그들 세 명은 밀접한 단체 정신을 공유한다. 그런데 그 외에 그들은 공감이나 동정심을 결여한 듯 보인다. 그들의 작업에 적합하게도, 그들은 대단히 강하고 빠르다. 상처를 입었을 때 그들의 상처 부위는 빠르게 그리고 쉽게 치료된다. 때때로, 성행위 동안 또는 그냥 재미삼아, 그들은 면도날과 칼을 자기 피부에 찔러 넣거나, 심지어 자기 몸을 절단한다. 며칠이 지나지 않아 모든 것은 치료되거나 다시 성장한다. 식량의 경우에, 그들은 모래, 석유, 탄광 잔여물, 그리고 다른 산업 폐기물을 소비한다. 그들은 우리에게는 "산성의 웅덩이들과 쓰레기 산들"과 초토화된 노천 채굴의 다른 잔류물들의 지옥 같은 풍경일 그런 곳에서 살아가면서 일한다. 그리고 휴가의 경우에, 그들은 하와이로 가서 기름으로 뒤덮히고 플라스틱 천지인 태평양에서 수영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환경, 즉 공학적으로 만들어지지 않은 생명 형태들은 거의 다 멸종해 버렸고, 명백히 기업 경쟁이 끊임없는 저급한 무장 충돌의 형식을 취하는 세계에 완벽하게 적응한 듯 보인다.

 

바치갈루피의 이야기 도중에 병사 주인공들은 개를 만나게 된다. 그 생명체는 그들에게 거의 전적으로 알려져 있지 않다. 동물원이나 웹에서 본 경험을 제외하고, 그들은 전에 결코 개를 본 적이 없다. 그 개가 어디에서 왔는지, 또는 그들이 발견하기 전에 그 개가 유독하고 일반적인 식량원도 전혀 없는 곳에서 어떻게 생존했는지 아무도 설명할 수 없다. 병사들은 호기심에서 그 개를 잠깐 동안 데리고 지낸다. 그들은 그것이 생물공학적으로 조작되기 이전의 세계에서도 도대체 어떻게 생존할 수 있었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그것이 "의식이 없다"는 점을 당연하게 여긴다. 그래서 그것이 그들에게 애정을 보일 때, 그리고 그것이 간단한 명령을 따르도록 훈련될 수 있다는 점을 알아차릴 때 그들은 놀란다.

 

병사들은 그 개가 정말 대단히 "취약하다"는 점에 당황한다. 그것은 특별한 식량과 물, 그리고 끊임없는 돌봄이 필요하다. 그들은 끊임없이 "그것이 산에 들어갈지, 또는 모래에 반쯤 묻힌 철조망에 걸릴지, 또는 밤새도록 토하게 될 것을 먹을지에 대해 걱정해야 한다"는 점을 깨닫는다. 그들의 세계에서 개는 "키우는 데 매우 많은 비용이 든다... 기본적 유기체의 식량을 제조하는 것은 꽤 복잡하다... 생명의 그물을 다시 만들어내는 것은 쉽지 않다." 결국 너무나 성가시고 비용이 많이 들 뿐이어서 그 개를 곁에 둘 수 없다. 그래서 병사들은 그 개를 죽이고 꼬치에 꿰어 요리하여 먹는다. 그들은 고기가 일상적인 석유와 모래 식량만큼 맛이 있지 않다고 깨닫는다. [...]

 

박쥐에서 개를 거쳐 탈인간까지, 철학과 과학소설은 공히 유사성과 차이의 다양한 정도를 탐구한다. 데카르트가 희망했듯이, 요점은 확실성을 획득하는 것이 아니다. 실재를 정복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실재를 지배할 수 있거나, 또는 심지어 그것을 정말 알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아니다. 요점은 "너 자신을 알라"도 아니다. 오히려, 우리 안에서 살아가며 생각하는 다중, 그것들이 없다면 우리는 결코 살아갈 수도 생각할 수도 없지만, 또한 결코 우리 자신으로 환원시킬 수 없는 다중을 받아들이는 것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