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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틴 스콜닉: 오늘의 에세이-개코원숭이 형이상학

 

개코원숭이 형이상학

Babooon Metaphysics

 

―― 크리스틴 스콜닉(Christine Skolnik)

 

최근에 객체지향 철학을 접하면서 나는 체니(Cheney)와 세이파스(Seyfarth)의 <<개코원숭이 형이상학(Baboon Metaphysics)>>을 떠올린다. 객체지향 생태학은 객체지향 철학, 그리고 더 구체적으로는 객체지향 존재론(O3)에 의해 고무되는데, 그 철학은 객체들을 본원적으로 인간들과 인간의 지각 장치의 외부에 존재하는 (최상급의 의미에서) 더할 나위 없는 객체들로 간주하려고 한다. 또한 객체지향 존재론은 객체들에 대한 인간의 지각과 그것들과 인간들이 맺는 상호작용들과는 별개로, 그리고 그것들이 인류에 대해 품고 있는 특수한 의미, 중요성, 또는 유용성과는 별게로 객체들이 다른 객체들과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 이해하고자 노력한다.

 

객체지향 생태학은 자연에 대한 자원에 굶주린 보수주의적 태도들과 자기부정적이지만 자기도취적인 심층생태학에 대한 해독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불필요한 세부 내용을 다루지 않은 채, 자연에 대한 보수주의적 견해들은 인간에게 환경으로부터 가치를 추출하기 위해 경이로운 기술을 휘두르는 자기정당화된 도도한 주체로서의 특권을 부여한다. 역으로, 심층생태학은 인간을 탈중심화하는 데 집중하는데, 비록 그것의 바로 그 반대와 포기 행위들은 일종의 자기도취로 해석될 수 있지만 말이다. 심층생태학의 죄책감과 수치심은 우월감―평범한 객체들 사이에 존재하는 유일한 주체의 책임감―에서 비롯될 것이다. 어느 경우에서도 인간들만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결론은 도출되지 않는다. 인간들이 초래한 혼란이 환경 관리인으로서의 인간들의 기본적 무능력에 대한 증거로서 활용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개코원숭이 형이상학: 사회적 마음의 진화>>는 "야생"과 인간 문화적 맥락에서 나타나는 개코원숭이 행동에 대한 탄탄한 연구를 연대순으로 다룬다. 그 책은 개코원숭이 사회의 매우 복잡한 사회적 위계들과 다양한 부족과 계급의 개코원숭이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마찬가지로 복잡한 상호작용들을 서술한다. 또한 그 책은 "자신들의" 염소들을 돌볼 수 있는 불가사의한 능력을 갖춘 개코원숭이 염소치기들의 남아프리카 마을에서 비롯된 일화들을 제시한다. 개코원숭이 염소치기는 일이 끝난 후에 큰 염소 등에 올라타고서 집에 돌아옴으로써 밉살스럽게 과시하기도 하지만, 또한 그것은 "자신의" 피보호자들을 잘 이해하고 돌본다. 특히 열광적이고 온정적인 관리자인 개코원숭이가 한 마리 있었다. 예를 들면, 수유 기간 동안  제 어미로부터 떨어진 한 새끼 염소가 고통을 호소할 때, 그 개코원숭이는 (인간 공동작업자들의 능력을 넘어서) 구슬프게 우는 어느 새끼가 어느 어미에 속하는지 식별할 뿐 아니라 그 새끼를 제 어미에게 데려다줌으로써 가족을 재결합시키려고 끈덕지게 노력했다. [...] 체니와 세이파스는, 염소 공동체의 친족 구조들을 이해할 수 있는 이런 능력은 자체의 공동체 내의 복잡한 위계적 가족 구조들의 지도를 그릴 수 있는 개코원숭이의 능력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게다가 염소의 비명은 책임지고 있는 개코원숭이로 하여금 명백한 사회적 재난을 교정하도록 부추긴다.

 

여러가지 면에서 이 서사는 인간중심적이지만, 객체지향 생태학에 흥미로울 수 있는 것은 개코원숭이와 염소들이 인간의 지식과 이해관계를 벗어나는 방식으로 상호작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개코원숭이의 "공감" 능력이 불가사의한 까닭은 그것이 대단히 인간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의 능력을 넘어서기 때문이다. 여기서 동물 사이의 상호작용과 소통은 일반적으로 무의식적인 이기적 공생으로 인식되는 것을 넘어서 복잡하게 사회적인 것으로 나아간다.

 

인간중심주의적인 상징들을 수사학적으로 더 이용하는 위험을 무릅쓰고, 나는 소달구지를 몰고 신호수로 일하는 개코원숭이의 사례들도 인용하고 싶다. 저자들은 소달구지로 염소 젖을 시장에 내다파는 일을 맡은 개코원숭이에 대한 간단한 사례 연구를 제시한다. 두 번째 경력에서 동일한 개코원숭이는 하반신이 마비된 신호수를 돕도록 채용되었다. 신호수는 그 개코원숭이가 다가오는 기차에서 울리는 특정한 수의 경적소리에 따라 무거운 레버를 움직여 "신호"를 바꾸도록(기차 레일을 재정향하도록) 훈련시켰다. 그 개코원숭이는 곧 신호수로부터 아무 지시도 받지 않은 채 정확한 순간에 올바른 조작을 수행할 수 있었지만, 인간 감독관은 소유 의식에서 여전히 근무했다. 그런데 우리는 인간을 모방하는 개코원숭이들에 경탄하지만, 이 경우에 개코원숭이들은 단순히 시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대체하고 있으며 사실상 어떤 면들에서는 인간들을 능가한다.

 

개코원숭이 일화들은 인간의 지배와 통제를 하나의 환영으로 전면에 내세운다. 개코원숭이가 일을 마치고 염소를 몰고 집에 돌아올 때, 그것은 인간 문화를 조롱하고 있다. 이런 종류들의 영상들은 인간들을 탈중심화하고, 인간 문화의 독특함의 기반을 훼손하며, "아름다운 영혼"의 풀 수 없게 얽혀 있는 긍지와 수치를 의문시한다. 또한 그것들은 인간 지각의 한계점들을 전면에 내세운다. 새끼 염소들에게 제 어미를 찾아줄 수 있는 개코원숭이 염소치기의 불가사의한 능력은 개코원숭이의 지각 양태들이 독특하며 여타 종들에게 고유하게 유용하다(인간 소유자의 이해관계에 맞서 수유 본성에 집중할 것으로 예측된다)는 점을 예증한다. 이 경우에 개코원숭이는 인간의 태도를 모방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그런 상호작용은 개코원숭이가 염소와 공존하는 방식들을 예시한다. 그래서 개코원숭이와 황소도 마찬가지로 인간 행위자나 목격자에 무관하게 자신들의 일에 열중한다. 확실히 인간의 이해관계가 그 관계를 매개하지만, 또한 우리는 "이런 종류의 일"이 다양한 다른 맥락에서 일어난다는 점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동물과 식물은 우리가 그것들과 맺는 상호작용과는 전적으로 별개로 서로 간에 이루어지는 일에 열중한다.

 

마지막으로, 개코원숭이와 신호수. 여기서 나는 더 유능한 자신의 고용인을 감독하는 감독관이라는 인물에 자극받아 무언가를 떠올린다. 그것은 내게 인간들이 환경 관리자로서 무능한 수준에 올라섰다는 점을 시사한다. 그리고 이 생각은 일련의 관련된 의문들을 촉발한다. 우리는 우리가 만들어낸 생태적 위기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동물과 다른 생명 형태들을 채용할 수 있는가? 우리는 환경을 "읽는 것"을 넘어서, 우리의 기성 이해관계를 위해(우리가 이미 규정해버린 대로의 문제점들을 해결하기 위해) 자연을 채용하는 것을 넘어서 비인간적 생명과 생태적으로 더 지적인 동반자 관계로 움직일 수 있는가? 그리고 동물들에 관한 그리고 다른 동물들과 상호작용하는 동물로서의 더 겸손한 입장 덕분에 우리는 무엇을 볼 수 있을까? 또는 무엇이 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