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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엄 하만: 오늘의 인용-객체와 상품 물신주의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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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체지향 철학은 객체를 얽어맬 수 있는 그 어떤 관계 연결망도 넘어서는 객체들의 자율성을 주장한다. 일부에서는 이것 때문에 "상품 물신주의(commodity fetishism)"라는 비난을 초래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객체 자체를 그것의 생산 조건을 넘어서 물신화함으로써 마르크스의 원리를 위배하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이런 주장과 관련된 첫 번째 문제는 그것이 존재 이론이 아니라 가치 이론에 기댄다는 점이다. 마르크스는 소금이 그것을 사용 가능하게 만드는 생산 관계들을 넘어서는 가치를 갖는다는 주장은 공공연히 비난하겠지만, 그는 나무랄 데 없는 유물론자였기 때문에 소금이 그런 관계들에 얽히기에 앞서 존재하는 소금의 실재성을 결코 부인하지 않았을 것이다. [...]

 

객체지향 철학이 일종의 상품 물신주의라는 비난은 그것 자체로는 별로 흥미롭지 않는데, 그것은 <<자본>>의 첫 페이지(여기서 마르크스는 이미 사물들의 독립적인 성질들에 관해 말한다)도 견뎌내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묘하게도 좀처럼 사라지지 않고 있는 그런 혐의에 대한 재빠른 반박은 다른 몇 가지 흥미로운 의문들을 낳을 수 있다.

 

상품 물신주의는 사회적 관계들을 물화하여 그것들이 사물들에 속한다고 주장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그것으로부터 사물들이 고유한 특성들을 지니고 있다는 그 어떤 주장도 일종의 물화라는 결론이 결코 도출되지 않는다. 그렇게 생각하기 위해서는 사회적 관계들만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여러분의 입장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확실히 마르크스의 입장은 아니다. 명백히 마르크스의 경우에 모든 것이 상품인 것은 아니다. 그것은 공기, 개울, 처녀림, 그리고 공동체 부족에 의해 생산되는 재화에 대해서도 참일 뿐 아니라, 봉건 영주에게 바치는 소작료에 대해서도 참이다. 마르크스에게는 이것들 가운데 아무것도 상품이 아니다. 그런데 알 수 있듯이, 그것들 가운데 많은 것들이 그 어떤 사회적 형식보다도 선재한다. 마르크스가 모든 실재를 사회적 관계들에 정초했다는 관념은 매우 당혹스러운 오독이어서(그리고 그것은 그의 유물론의 정신에 반한다) 나는 그런 혐의가 여전히 떠돌고 있다는 것에 놀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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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레이엄 하만(Graham Harm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