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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덤 프랭크: 오늘의 에세이-과학자들은 정치에 대해서 순진한가?

 

과학자들은 정치에 대해서 순진한가?

Are Scientists Naive About Politics?

 

―― 애덤 프랭크(Adam Frank)

 

기후변화가 과학자들과 정치가들이 서로 부딪히는 유일한 문제인 것은 아니다. 에너지 정책, 멸종 위기 종, 줄기세포, 어량(魚梁), 심지어 무엇이 건강한 식단을 구성하는지 규정하는 것도 정책 영역과 연구 영역 사이에 긴장을 유발할 수 있다.

 

과학자들은 자신들은 데이터에 전념하기를 원할 뿐이라고 말하고 정치인들은 세계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고 말한다. 그래서, 누가 옳으며, 그리고 세계가 작동하는 방식에 대해서 누가 정말로 지나치게 단순한가?

 

나는 이 블로그를 시작한 이래로 언제나 이 문제에 관해 정진해왔다. 과학 소통가로서의 내 역할을 진지하게 여기려고 노력하면서 나는 인간으로서의 내 가치관과 세계가 스스로 말하게 두어야 한다는 과학자로서의 내 신념을 조화시키려고 열심히 노력했다.

 

과학과 정치에 관해서는 이런 균형의 변화들이 바로 문제의 핵심이다.

 

최근에 나는 콜로라도 대학의 환경학과 교수 로저 A. 피엘크(Roger A. Pielke)의 <<정직한 중개인: 정책과 정치에 있어서 과학을 이해하기(The Honest Broker: Making Sense of Science in Policy and Politics)>>라는 책을 우연히 읽게 되었다. 그의 책은 짧지만 우리 시대의 핵심 쟁점을 깊이 관통한다. 우리는 문화에 있어서 과학의 영향을 피할 수 없으며, 그럼에도 문화를 의식적으로 그리고 현명하게 구성하는 데 있어서 과학을 사용하는 방법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이 주제는 하나 이상의 블로그 글이 필요한 만큼 충분히 중요하다. 그래서, 오늘은, 한 가지 단순한 의문으로 시작하자. 과학과 정책 사이의 관계는 어떠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대부분의 과학자들을 비롯하여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른바 과학과 정책에 대한 "선형 모형(linear model)"으로 이 질문에 대답할 것이다. 피엘크가 서술하듯이,

 

선형 모형은 과학적 지식에 대한 의견일치를 달성하는 것이 정치적 합의에 이르게 되고, 그 다음에 정책 행위가 실행되는 전제 조건이라는 점을 제안하는 데 흔히 사용된다.

 

선형 모형의 일례로서 피엘크는 EPA(미합중국 환경보호국) 웹사이트에서 자신이 찾아낸 텍스트를 가리킨다.

 

불확실한 점들을 줄이도록 기획된 연구를 통해서 우리의 이해는 증가하고, 그래서 우리는 환경 문제들이 끼치는 영향들과 그것들이 어떻게 다루어져야 하는지에 관한 우리의 가정들을 변화시킨다.

 

그렇다. 그것은 내게 좋은 듯 들린다. 정치가들은 과학 전문가들에게 전문가 의견을 구한 다음에 그런 의견들에 의거하여 정보에 근거한 판단을 내린다. 그런데 문제는 현실이 그런 식으로 결코(글쎄, 거의) 돌아가지 않는다는 점이다. 기초 과학과 그것의 결론들에 대하여 명료하게 이해하고 있을 때―기후 연구에서처럼―에도 현실 세계에서 과학과 정책 사이의 상호작용들은 선형적이지 않다. 과학과 사회에 관한 선도적 연구자인 셰일라 자사노프(Sheila Jasanoff)는 그것을 평이하게 진술한다.

 

과학적 자문에 관한 연구들은 자문 행위를 기술적 쟁점들에 제한하는 것이 가능하다거나 또는 과학자들의 주관적 가치들이 의사결정과 무관하다는 관념을 만신창이로 만든다...

 

명백히, 피엘크와 다른 사람들은 과학자들이 자문 역할을 수행하도록 요청받았을 때 일반적으로 부정직하다고 주장하고 있지는 않다. 진짜 문제는 그런 자문 역할이 이론적으로 그리고 실제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하여 매우 흐릿하게 이해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과학이 그저 우리에게 중요한 쟁점들에 정보를 제공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어한다. 그런데 그 대신에 과학은 흔히 정치적 논쟁의 도구로 귀결된다.

 

각 진영은 전술적인 정치적 추가 목적를 겨냥하여 자체의 전문가들과 그들의 전문적인 데이터 분석을 끌어들인다. 이것은 모든 의회 청문회에서 반대자들이 동일한 수의 반(反)기후변화 연구를 제시하도록 되어 있는 지구온난화 같은 사례들에서 명백히 왜곡된다. 그래도, 기후 부정의 바로 그 과정이 과학과 정책이 딛고 서 있는 흔들리는 기반을 강조한다.

 

이런 사태에 대해 정치인들을 비난하는 것은 충분히 쉬울 것이지만, 그것은 공정하지 않다(최소한 노골적인 부정을 포함하지 않은 사례들에서는). 결국, 전술적인 정치적 조작이 그들의 일이다. 피엘크가 지적하듯이, 정치와 정책 사이에는 명료한 경계선이 없다.

 

정책은 기관들이 미래와 관련된 불확실한 점들을 줄이기 위해(즉, 우리 주변 세계를 통제하기 위해) 취하는 특정한 행위다. 정치는 어떤 주어진 이익 집단이 옹호하는 행위를 정책으로 변환시키는 데 필요한 거래다. 피엘크가 예증하듯이, 각 집단의 가치들이 상당히 다를 때에는 과학이 정치적 논쟁의 도구가 되지 않기가 어려울 것이다.

 

과학과 사회에 관한 학자들이 선형 모형은 소박하다고 말하고 있다면, 대안은 무엇인가?

 

정교함.

 

과학은 인간 문화의 미래에 너무나 중요해서 정책을 유도하는 데 있어서 그것의 실제 사용과 관련된 논쟁에 이상적 관념들 또는 부정을 끌어들일 수 없다. 우리는 해수면 상승에서 에너지 하부구조와 무엇을 먹어야 하는지(힌트: 크래프트 맥 앤 치즈)라는 문제까지 모든 것과 관련하여 지금 현실적 결단들에 직면한다.

 

아무튼 과학은 그런 결단들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과학과 정책을 위한 최선의 통로를 발견하기 위해 과학과 정책의 실제 통로를 이해해야 한다.

 

최소한 내 경우에, 이 문제에 뛰어들 때 첫 번째 걸음은 과학과 정치에 대한 내 자신의 이상적 관념들을 뗠쳐버리는 것이었다. 최근 역사를 살펴봄으로써 이 관계에 대한 다양한 선택지들이 있다는 점이 분명해졌다. 그런 선택지들을 전개하는 것이 다음 포스트 글의 주제일 것이다. 오늘은, 우리는 선형 모형을 바랄지도 모르지만, 현실은 훨씬 더 복잡하다는 점을 아는 것으로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