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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우: 오늘의 인용-권력과 영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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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락처를 찾다가 가방을 뒤졌는데, 거기서 여러 권의 노트를 보았어요. 미안해요. 노트들에 옮겨 적은 성경 구절들을 보았어요. 내막은 모르겠지만, 아무것도 아닌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일도 아니고 누구에게나 나타나는 일도 아니고. 공연히 참견하는 건지 모르겠는데…… 젊은이의 노트에 적힌 저 무수하게 많은 굉장한 말씀들……." 남자는 다시 말을 멈췄다. 더 할지 말지 망설이는 것이 느껴졌다. 부질없는 짓을 하는 게 아닌가 자신에게 묻고 있는 게 느껴졌다. 후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하세요. 무슨 말이든 더 하세요. 그의 입속말을 듣기라도 한 듯 남자가 말을 이었다. "혹시 저 무수하게 많은 굉장한 말씀들이 젊은이의 현실에 아무 작용도 하지 않아서 마음 상해 있다면, 주제넘다 말고 내 말을 들어 봐요. 그건 이상한 일이 아니에요. 이상한 말처럼 들리겠지만 저 굉장한 말씀들은 애초에 이 세상을 이길 힘이 없어요. 세상은 크고 무섭고 힘이 세요. 언제나 그랬어요. 전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거예요. 그에 비하면 말씀은 무력하기 짝이 없어요. 그건 말씀이 힘이 없어서가 아니라 말씀이 가진 힘이 다른 힘이기 때문이에요.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 그랬던 것처럼 말씀은 세상에게 능욕당하고 옷 벗기고 채찍질당하고 창에 찔리고 못이 박히고 죽을 수밖에 없어요. 다른 힘이기 때문에 그래요. 하잖은 것이 자주 위대한 것을 이겨요. 예수님이 어떤 분이었는지 생각해 봐요. 그분은 땅의 법칙에 철저히 무력했어요. 예수님은 '나의 나라는 이 땅에 있지 않다.'라고 했어요. 세상 권력에 대한 철저한 무능력, 그것이 그분의 진짜 능력이었어요. 그분이 무능한 것은 그분의 능력이 땅의 법칙 저 너머에 있기 때문이었어요. 말씀들의 위대함도 땅의 법칙 너머에 있는 위대함이에요. 말씀들이 이 무자비하고 막무가내의 현실을 무너뜨리고 이기고 지배하리라고 기대하지 마요. 말씀이 굉장한 것은 현실을 이기기 때문이 아니라 현실을 넘어서기 떄문이에요. 현실에서의 철저한 무능이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말씀의 능력을 역설적으로 증거하는 거예요. 엉뚱한 데에다 말씀을 들이대지 말아요. 세상은 언제나 악하고 어느 시대나 힘이 세고 어디서나 무자비해요. 그러니까 젊은이, 외람되게 충고하는데, 그 때문에 절망하거나 마음 상해하거나 넘어지지 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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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우, <<지상의 노래>>(민음사, 2012), pp. 29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