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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머민: 오늘의 논평-양자역학에 관하여

 

양자역학: 붙잡기 어려운 분리를 고정하기

Quantum mechanics: Fixing the shifty split

 

―― 데이비드 머민(David Mermin)

 

양자역학은 물리학자들이 여태까지 고안한 가장 유용하고 강력한 이론이다. 그런데 그것이 형식화된 지 거의 90년이 지난 오늘날, 그 이론의 의미를 둘러싼 의견 불일치는 어느 때보다도 더 강하다. 매년 새로운 해석들이 나타난다. 아무것도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확률 이론은 양자역학보다 상당히 더 오래되었으며, 게다가 시작부터 그것의 의미를 둘러싼 의문들로 골치를 앓아왔다. 그리고 양자역학은 본질적으로 확률론적이라고 잘 알려져 있다.

 

지난 십 년 동안 칼 케이브즈(Carl Caves), 크리스 푹스(Chris Fuchs), 그리고 뤼디거 샤크(Ruediger Schack)는, 양자역학의 기초에 있어서의 혼동은 물리학자들 사이에 널리 퍼진, 확률의 본성과 관련된 혼동에서 비롯된다고 주장해왔다. 그들은, 확률이 제대로 이해된다면, 악명 높은 양자 역설들은 사라지거나 아니면 덜 성가신 형식을 띠게 된다고 주장한다.

 

대부분의 물리학자들은 확률에 대해 빈도주의적 견해―확률은 "동일하게 준비된" 체계들의 앙상블의 객관적 특성을 서술한다―를 취한다. 케이브즈, 푹스, 그리고 샤크는 주관주의적인 베이즈주의적 견해―한 행위자가 어떤 단일한 사건에 대해 그 사건이 일어날 것이라는 자신의 믿음의 척도로서 확률 p를 할당한다―를 취한다.

 

사건이 일어나면 1$를 지불받게 될 쿠폰에 대해 그런 행위자는 p$보다 더 적은 돈은 기꺼이 지불하며, 그리고 p$ 이상의 돈을 받으면 그 쿠폰를 기꺼이 이서하고 판다. 놀랍게도, 확률에 대한 표준 규칙들은 행위자가 어떤 단일한 사건에서 결코 확실한 손해를 보지 말아야 한다는 요구 조건에서 도출된다. (예를 들면, p가 1을 넘으면, 그는 많아야 1$를 돌려받는 쿠폰에 대해 1$ 이상을 지불할 것이다. p가 음수라면, 그는 누군가에게 돈을 주고 자기로부터 1$의 비용을 더 치르게 할 수도 있는 쿠폰을 가져가도록 시킬 것이다.) 확실한 손해를 피하는 것이 어떤 행위자의 확률 할당에 대한 유일한 제약조건이다.

 

어떤 사건에 대한 확률은 그 사건에 내재하지 않는다. 상이한 믿음을 지니고 있는 상이한 행위자들은 일반적으로 동일한 사건에 대해 상이한 확률을 할당할 것이다.

 

확률에 대한 주관주의적인 베이즈주의적 견해는 널리 견지되고 있지만, 많은 물리학자들은 그렇지 않다. 그 견해는 양자역학의 의미에 대해 깊은 함축들을 지니고 있는데, 푹스와 샤크는 그것을 양자 베이즈주의(quantum bayesianism)―줄여서 큐비즘(QBism)―라고 부른다. 양자 상태가 확률을 결정하기 때문에, 확률이 어떤 행위자에 의해 자신의 믿음의 정도를 표현하기 위해 할당된다면, 어떤 물리적 체계의 양자 상태는 그 체계에 내재적인 것이 아니라 행위자에 의해 그것에 관한 자신의 믿음을 나타내기 위해 할당된다. 확률과 마찬가지로 상태 할당은 행위자에 대해 상대적이다.

 

큐비즘은 "위그너의 친구(Wigner's friend)"라는 역설을 즉각적으로 폐기한다. 그 친구는 폐쇄된 실험실에서 측정을 하고, 그 결과를 인식하며, 그 결과에 해당하는 상태를 할당한다. 문 바깥에 있는 위그너는 그 결과를 알지 못하고, 그래서 자신의 친구, 장치 그리고 체계에 모든 가능한 결과들을 중첩하는 얽힌 상태를 할당한다. 누가 옳은가?

 

큐비스트의 경우에는 둘 다 옳다. 위그너의 친구는 그의 경험을 포함하는 상태를 할당한다. 위그너는 자신의 경험을 포함하는 상태를 할당한다. 확률 할당과 마찬가지로, 양자 상태 할당은 할당을 수행하는 행위자에 대해 상대적이다.

 

또한 큐비즘은 악명 높은 "측정 문제"도 제거한다. 고전적 확률 이론은 측정 문제가 없다. 새로운 경험 때문에 자신의 믿음을 바꾸어야 할 때 행위자는 자신의 확률 할당을 아무 문제도 없이 불연속적으로 바꾼다. 양자 상태 할당의 경우에도 꼭 마찬가지다. 어떤 경우에서든지 변화는 행위자가 고려하고 있는 물리적 체계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오히려, 변화는 행위자가 자신의 예상을 나타내려고 선택하는 확률 또는 양자 상태에서 일어난다.

 

애초에 베르너 하이젠베르크(Werner Heisenberg)와 그 다음에 루돌프 파이얼스(Rudolf Peierls)는, 양자 상태는 세계의 객관적인 특징이 아니라 우리 지식의 표현이라고 주장했다. 존 벨(John Bell)은 효과적으로 물었다. "누구의 지식? 무엇에 관한 지식?" 큐비스트는 작지만 심대한 한 가지 수정을 행한다. "지식"을 "믿음"으로 대체한다. 누구의 믿음? 자신의 과거 경험에 의거하여 상태 할당을 수행하는 행위자의 믿음. 무엇에 관한 믿음? 그의 후속 경험의 내용에 관한 믿음.

 

또한 벨은 양자역학을 괴롭히는 "붙잡기 어려운 분리"를 개탄한다. 붙잡기 어려움은 분리의 본성과 그것이 존재하는 곳 둘 다에 적용된다. 그 분리는 양자적인 것들과 고전적인 것들 사이, 가역적인 것들과 비가역적인 것들 사이, 말할 수 없는 것들과 말할 수 있는 것들 사이에 있을 수 있다. 모든 경우에 경계선은 어느 쪽으로도 막연한 지점까지 움직일 수 있다. 무엇과 무엇이 분리되는지에 무관하게, 붙잡기 어려운 분리의 모든 판본들은 모호하고 애매하다.

 

큐비스트의 경우에도 한 가지 분리가 존재한다. 그것은 행위자가 살고 있는 세계와 그 세계에 대한 그의 경험 사이에 존재한다. 붙잡기 어려움, 모호함, 그리고 애매성은 모두 확률과 마찬가지로, 경험 자체와 마찬가지로, 분리가 행위자에 속한다는 점을 깨닫지 못한 데서 비롯된다. 그것들 모두는 나름의 분리가 있다. 그것이 앨리스의 경험의 일부이지만 밥의 경험의 일부가 아닐 때마다, 앨리스(Alice)에게는 거시적인 것(고전적인, 비가역적인, 말할 수 있는 것)이 밥(Bob)에게는 미시적인 것(양자적인, 가역적인, 말할 수 없는 것)일 수 있다. 각 분리는 객체(세계)와 주체(자신의 경험에 대한 행위자의 환원할 수 없는 자각) 사이의 분리다. 꿈이나 망상은 제쳐놓고, 행위자로서 나는 그런 구별짓기를 하는 데 아무 어려움도 없고, 그래서 나는 여러분도 그럴 것이라고 가정한다. 모호함과 애매성은 그런 분리들이 객관적 세계가 아니라 세계와 양자역학을 사용하는 다양한 행위자들의 경험 사이의 경계에 놓여 있다는 점을 인식하지 못할 때에만 일어난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파동함수는 쥐의 관찰 행위에 의해 붕괴될 수 있는지 물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벨은 그것에 부연하여, 세계에 대한 파동함수는 붕괴하기 전에 박사학위를 받은 물리학자의 출현을 기다리고 있는지 물었다. 큐비스트는 두 질문 모두에 대해 "아니오"라고 대답한다. 쥐는 후속 경험에 의거하여 자체의 상태 할당을 갱신하는 데 양자역학을 사용할 수 있는 심적 능력이 부족하며, 오늘날에는 학부생도 바로 그런 작업을 하기에 충분한 양자역학을 쉽게 익힐 수 있다.

 

큐비즘은 "의식이 파동묶음을 붕괴시킨다"는 평판이 나쁜 관념의 지속을 설명한다. 그것은 참이지만, 진부한 방식으로 그렇다. 행위자의 의식적 경험은 다양한 친숙한 방식으로 그의 행위들을 유도한다. 그가 최소한 물리학 학사학위를 받았다면, 이런 행동들은 새로운 경험에 의거하여 미래 경험에 대한 자신의 예상―사전적 양자 상태 할당으로 구체화되는―을 수정하는 행위를 포함할 것이다.

 

양자역학의 창시자들 가운데 몇몇 물리학자들의 글에서 큐비즘이 어렴풋이 감지된다. 닐스 보어는 이렇게 적었다. "우리가 자연에 대해 서술할 때 그 목적은 현상의 실재적 본질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 경험의 다양한 측면들 사이의 관계들을 가능한 만큼 철저히 찾아내는 것일 뿐입니다." (한때 나는 여기서 중요한 낱말은 "관계들"이라고 생각했다. 이제 나는 그것이 "경험"이라고 깨닫는다.) 흔히 철학적으로 보어와 어긋났던 에르빈 슈뢰딩거는 이렇게 언급했다. "과학자는 무의식적으로, 거의 무심결에, 구성될 그림에서 그 자신, 자신의 개성, 인지 주체를 무시하거나 제거함으로써 자연을 이해하기와 관련된 자신의 문제를 단순화한다." (여기서 중요한 낱말은 "주체"다.)

 

나는 큐비즘이 단연 제일 흥미로운 해석이라고 인식한다. 그런데 그것은 현대의 양자기초 공동체에 의해 열성적으로 수용되지 않았다. 큐비즘의 가장 열렬한 옹호자로서의 역할을 담당하는 푹스는 선동가로서 감탄의 대상이고, 그의 더 전문적인 연구는 높은 평가를 받고 있으며, 그리고 그는 미국물리학회의 양자정보 주제집단의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런데 나는, 몇몇 중요한 예외가 있지만, 큐비즘에 대한 일반적인 반응은 무시하는 것이었다고 말할 것이다. 무정한 순간에 나는 그것을 큐비즘이 제거해버린 수수께끼들에 관해 연구하는 것을 너무 많이 즐기는 사람들에게 귀속시킨다.

 

나는 그런 전문가들을 설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양자 기초에 아무런 직업적인 관심도 없는 물리학자들의 훨씬 더 큰 공동체가 큐비즘에 주의를 기울이도록 하기 위해 이 논평을 적는다. 큐비즘으로부터의 메시지는 이렇다. 여러분은 이 문제에 관해 결코 걱정하지 않게 된 점에 대해 죄책감을 느낄 필요가 없다. 여러분이 신경쓰지 않았던 점은 옳았다. 그런데 지적인 정합성을 위해서 여러분은 확률의 본성에 관해 철저히 잘 이해하고 있다고 잘못 생각했었을지도 모르는 것을 재검토하는 것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