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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비 브라이언트: 블랙 생태학-네 가지 테제

 

- 아래의 글은 "자연의 지혜" 또는 "자연의 섭리"를 믿는 전통적인 '밝은 생태학(bright ecology)'에 대비되는 '블랙 생태학(black ecology)'에 대한 레비 브라이언트(Levi Briant)의 두 개의 블로그 글(1,2)을 발췌하여 옮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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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은] 생태학은 이른바 자연의 지혜에 대한 믿음에 감염되었다. 이 이데올로기는 무엇보다도 영화 <<아바타(Avatar)>>에서 표현되었다. 자연은 조화롭고 음의 되먹임 고리의 지배를 받는다고 한다[(예를 들면, 가이아 이론)]. 양의 되먹임 고리는 항상 과잉을 추구하는 자본주의적 잉여가치 추구의 경우처럼 제어가 안되는 채 선회하는 과정을 가리키는 반면에, 음의 되먹임 고리는 항상 조화와 균형을 찾는 자기교정적 활동들의 지배를 받는다. 기온이 너무 높을 때마다 전원를 켜고 기온이 너무 낮을 때마다 전원을 끄는 냉방기의 온도 조절 장치처럼 자연은 항상성을 유지하며 특수한 균형을 추구한다고 한다. 이런 지속적인 균형 추구는 잔인하여 다른 개체들이 살 수 있도록 어떤 개체들을 죽일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그것은 하나의 균형이다.

 

따라서 <<아바타>>에서, 특히 신성한 나무의 테마에서 묘사되듯이, 자연은 일종의 신성한 지혜이다. 자연에게는 항상 여러 가지 것들을 상쇄하여 질서를 회복하는 이런 지혜가 있다고 한다. 그리고 물론 이런 사유에서 자본주의의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작동하고 있음을 탐지하기 어렵지 않다[(보이지 않는 손)]. 신자유주의 체제에서는, 항상성을 유지하는 계, 즉 음의 되먹임 메커니즘인 시장이 항상 자체적으로 옳기 때문에 우리는 시장에 개입하지 말아야 한다. 자기조직화 체계들의 경우에도 그렇다. 군중에게는 그냥 내버려두면 반드시 스스로 교정하는 지혜가 있다. 이 지점에서 다음 이야기는 예측할 수 있게 된다. 체계들이 스스로 교정하지 않는다면, 그 이유는 체계들의 자연적인 동학에 개입하여 그것들을 정상 상태에서 벗어나게 하는 인간들의 오만 때문이다. 우리는 인간의 개입으로 부패되는 이런 체계들에 신성한 지혜를 귀속시키며, 그래서 인간들은 이런 체계들과 다르거나 그것들의 외부에 존재하여 외부로부터 그것들을 부패시키는 것처럼 이야기한다. 나치가 부패한 외부의 또는 이질적인 사회 침입자―그들이 근절된다면 사회가 자연스러운 유기적 공동체를 획득하게 된다―로서의 유대인들을 말하듯이, 우리는 조화롭게 균형을 이루기 위해서는 오직 근절될 필요가 있는 기생물에 시달리는 이런 지혜로서의 자연을 말한다.

 

[...]

 

밝은 생태학의 이야기는 우리 인간들에게 항상 똑같은 슬픈 이야기인데, 가능한 모든 세계들 가운데 최선의 세계라는 라이프니츠의 테제에서 공식적으로 표명되었듯이, 존재를 굽어보고 가능한 모든 방식 가운데 최선의 방식으로 그것을 조직하는 섭리에 관한 이야기이다. 라이프니츠가 <<형이상학 논고>>에서 논증하듯이, 우리가 완전한 그림을 볼 수 있기만 하다면, 혼돈과 공포인 듯 보이는 것이 사실상 아름다운 질서라는 것을 알 것이다.

 

[...]

 

야생은 밝은 생태학이 아니라 블랙 생태학이다. 블랙 생태학은 자연의 항상성 본질에 대한 터무니없는 믿음을 갖고 특별한 자연의 지혜에 관한 서사들을 거래하는 생태학이 아니라 오직 관계만 인식하는 생태학이다. 그런 관계성은 진리, 태양으로부터의 거리, 달뿐 아니라 플라스틱, 제도, 집단, 건축물, 호주에 유입된 수수두꺼비, 아이폰, 그리고 나머지 모든 것을 포함한다. 여기에서는 발전 댐에 앞서는, 강에 대한 하이데거적인 경건함은 없다. 인간들이 존재자들의 주권자가 아니라 존재자들 가운데 속하는 것으로 다루어지는 관계들에 관한 탐색이 있을 뿐이다.

 

[...]

 

야생은 저 곳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거주하는 곳이다. 때때로 부족한 곡물 수확 때문에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다. 그리고 명백히, 우리가 무엇을 하든, 에상치 않은, 모든 종류의 우연한 결과들이 존재한다. 사실상, 이런 결과들이 뜻밖인 이유는 그것들이 우리가 예상치 않은 결과일 뿐 아니라, 우리 자신이 변형되고 우리가 만들어내는 기술과 문화적 제도에 적응해야 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신의 생산물들의 결과로서 본질 없는 빈 광장이거나 이동 과녁이다.

 

[...]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블랙은 가시광선 영역에 속하는 어떤 빛도 방출하거나 반사하지 않는 객체들의 색깔이며, 흑체는 그런 모든 파장의 빛을 흡수한다." 이 정의에 의하면, 블랙은 물러나 있는 객체들에 대한 훌륭한 은유인데, 그것이 세계 속에서 결코 완전히 현전하지 않는, 결코 완전히 명시적이지 않는 객체들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밝은] 생태학과는 대조적으로, 블랙 생태학의 첫 번째 테제는 객체들이 자신들의 관계들외재적이라는 것이다. 밝은 생태학은 객체들이 자신들의 관계들에 의해 구성될 정도로 [...] 관계들이 객체들에 내재적이라고 주장하는 반면에, 블랙 생태학은 객체들이 자신들의 관계들에 외재적이라는 바로 그 때문에 생태가 우리에게 가르칠 것이 있다는 전제, 즉 생태가 연구, 행동주의, 그리고 탐구의 진정한 영역이라는 전제에서 시작한다. 달리 말해서, 생태학이 탐구하는 것은 존재자들이 현존하는 관계들에서 단절될 때 일어나는 일(예를 들면, 벌이 사라지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이거나 인도의 생태계에 진통제 디클로페낙이 유입된 경우처럼  새로운 존재자들이 현존하는 관계들의 체제나 네트워크에 유입될 때 일어나는 일이다. 요약하면, 생태학은 존재자들이 서로 새로운 관계들을 맺게 될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어떤 새로운 국소적 표명들이 일어나는지 탐구한다. 여기서 블랙 생태학의 암흑성은 존재자들이 결코 완전히 스스로를 표명하지 않는다는 사실, 그것들 속에는 물러서 있는 것이 항상 있다는 사실, 그리고 새로운 표명들은 항상 새로운 관계들에서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에서 발견될 것이다.

 

블랙 생태학의 두 번째 테제는 생태학이 자연에 관한 연구가 아니라 존재자들 사이의 외부-관계들에 관한 연구라는 것이다. 아이의 뇌가 어떻게 발달하고, 텔레비전, 인터넷, 컴퓨터, 스마트 폰 등과 같은 새로운 매체와 관계를 맺을 때 어떤 종류의 정서과 인지가 일어나는지와 관련된 쟁점은 독수리 개체군이 급격히 감소할 때 인도의 생태계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에 관한 의문들과 마찬가지로 생태적이다. 관념, 관행, 언어, 플라스틱, 종교, 건물, 도로, 전력선, 스마트 폰 등은 H1N1 바이러스, 독수리, 지구 온도 상승, 산호초 등에 못지 않게 생태적인 중심 주제들이다. 사실상 여러 경우에 전자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후자를 이해할 수 없다. 이 때문에 마르크스의 사회 탐구 양식은 인도 생태계에서 독수리의 역할을 탐구하는 자연학자에 못지 않게 생태적이다. 둘 다 존재자들 사이의 관계들과 그런 관계들이 초래하는 차이를 탐구하고 있다. 관계들이 내재적이라면 생태학이 탐구할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인데, 바로 그 이유는 우리로 하여금 블랙의, 즉 물러서 있는 객체들에서 어떤 결과들이, 어떤 차이들이 산출될 것인지 궁금하게 만드는, 관계들 사이의 어떤 변화와 변경도 결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블랙 생태학의 세 번째 테제는 환경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환경을 환경에 거주하는 존재자들 이외의 것인 하나의 용기로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 모형에 의하면, 내가 지금 앉아 있는 방은 용기이기 때문에 환경인 반면에, 내 소파, 의자, 텔레비전, 컴퓨터, 내 몸, 내 고양이 등은 모두 이 환경 내의 존재자들이다. 블랙 생태학의 틀에서 "환경"은 외재적으로 관련된 객체들 사이의 관계들을 줄인 말에 불과하다. 존재자들 사이에는 관계들―영원히 변하고 바뀌는―만 있을 뿐이고 환경 자체는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생태학이 탐구하는 것은 "환경"이 아니라 존재자들 사이의 관계들이다.

 

마지막으로, 블랙 생태학의 네 번째 테제는 윤리학의 적절한 대상이 윤리적 실재계라는 것이다. 아도르노가 적고 있듯이, "도덕적 행동 규범이 공동체의 삶에서 더 이상 자명하지 않고 의문의 여지가 없지 않을 때 항상 도덕적 의문들이 제기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윤리적 숙고, 규범적 숙고는 윤리적 실재계, 즉 현존하는 규범이 윤리적 결정을 위한 수단을 더 이상 제공하지 않는 근본적인 교착 상태, 적대, 역설, 그리고 불가능한 것들에 대한 대응에서 비롯된다. 진정한 윤리학은 발명의 영역이 되는데, 바로 그 이유는 그런 사유가 규칙, 규범, 그리고 습관이 이미 우리를 인도하지 못하는 문제들에 대한 반응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블랙 생태학의 암흑성은, 라캉이 가르쳐주듯이, 일반적으로 증상을 통해 가리려고 노력하는 대상인 윤리적 실재계를 직면하는 데 놓여 있다. 그리고 생태학과 마르크스 둘 다가 우리에게 제기하는 의문은, 다름 아닌 행복의 가능성의 기반을 약화시키는 듯 보이는 세계 속에서 행복하게 사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그리고 심지어 행복이 무엇인지―에 관한 의문이다.

 

[...]

 

블랙 생태학의 핵심에는 계몽이라는 관념이 있다. 칸트는 계몽이란 스스로 부과한 미성숙을 넘어서는 인간들로 구성된다고 말한다. 그런 미성숙의 일부는 독자적으로 생각하는 방법을 배워 더 이상 교회, 마르크스, 또는 아도르노 같은 인물들의 권위에 의존하지 않음으로써 극복된다. 그래도 그런 미성숙의 다른 일부는 가장 현명한 방식으로 항상 작동하는 자연의 신성을 믿는 우리의 내밀한 관념론적 환상에 놓여 있다. 블랙 생태학과 더불어 우리는 우리의 규범적 정체성이 자연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내리는 적극적인 결정들이라는 점을 인식하기 시작한다. [...] 우리는 자본주의 시장의 섭리를 더 이상 믿지 않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자연의 섭리를 더 이상 믿지 않으며, 우리 자신의 유책성과 자유를 인식하게 된다. 우리는 <<아바타>> 같은 영화들을 음흉한 심층 생태학적 환상으로 인식한다. 아무도 결정권이 없으며, 야생에 본질적으로 좋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번역: 김효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