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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빈 슈뢰딩거: 오늘의 인용-철학적 경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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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쿠로스는 모든 철학이 타우마제인[...], 즉 철학적 경이에서 시작된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옳은 말이다. 우리가 지금 처해 있는 어떤 상황이 매우 독특하고 기이함을 어떤 식으로든 한 번쯤 의식하지 못한 사람이라면 철학과 어떠한 관계도 맺지 못한다. 덧붙이자면, 그렇다고 해도 크게 애석한 일은 아니다. 비철학적 태도와 철학적 태도는 매우 엄격하게 구별된다(그래서 그 중간 형태란 거의 없다). 이 중 비철학적 태도는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에 있어 그것들의 보편적 형식이 자명하다고 받아들인다. 이런 태도에서 놀라움을 느끼는 경우는 기껏해야 어떤 사건의 특수한 내용들 때문이다. 가령 오늘 여기에서 일어난 일의 내용이 어제 저기에서 일어난 일의 내용과 다르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철학적 태도는 사건의 매우 보편적인 특성, 모든 체험이 지닌 공통적 특성에 대해서, 심지어 대체 그 사건이 체험되고 존재한다는 사실 그 자체에 대해서, 처음으로 그리고 가장 깊은 곳으로부터 놀라움을 느낀다.

 

내가 볼 때, 이런 두 번째 종류의 경이가 정말로 일어난다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리고 이러한 경이는 그 자체가 경이로운 일이다!

 

이러한 경이 자체가 경이로운 이유는, 경이 혹은 놀라움은 어떤 현상이 익숙한 것에서 벗어날 때, 혹은 그 어떤 연유로 예상한 것에서 벗어날비로소 나타나는데, 이 세계 전체는 우리에게 단 하나만 주어져 있으므로 이와 비교할 대상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대체 어떻게 특정한 예상을 품고 이 세계를 마주할 수 있는지 전혀 알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경이를 느끼고 수수께끼에 직면한다. 이렇게 경이를 느끼려면 현상이 원래 어때야 하는지에 말할 수 있어야 하고, 수수께끼에 직면하려면 이 세계가 원래 어때야 하는지에 대해 말할 수 있어야 하는데도 말이다!

 

아마 이처럼 이 세계와 비교할 대상이 없다는 사실은 타우마제인에 대해 일반적으로 생각할 때보다, 철학적 낙관주의비관주의라는 현상을 대조해 보면 더 실감 날 것이다. [...] 어떤 사람들은 우리 세계가 지극히 악하고 비극적이라고 선언했고, [...] 어떤 사람들은 우리 세계가 상상 가능한 세계들 중에서 최선의 세계라고 선언했다. 하지만 평생 고향을 떠나 보지도 않은 사람이 고향 기후가 너무 덥다거나 너무 춥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대체 이에 대해 무어라 말하겠는가?

 

[세계에 대한] 이러한 가치 평가나 경이감이나 수수께끼 인식과 같은 현상들은 경험의 어느 특정 측면이 아니라 경험 전체에 대한 것인데다가, 결코 얼간이가 아니라 뛰어난 지성을 지닌 사람들에게 떠올랐던 것이다. 내가 보기에 이런 현상들이 암시하는 것은, 적어도 지금까지는 형식논리학에 의해서 파악되지 않았고 하물며 정밀 자연과학에 의해서는 더욱 파악되지 않았던 어떤 관계들을, 그 보편적 형식조차 파악되지 않았던 어떤 관계들을 우리 체험에서 만난다는 사실이다. 이런 관계들은 우리로 하여금 늘 새로이 형이상학을 지향하도록, 다시 말해 직접 경험 가능한 것을 넘어서 나아가도록 할 것이다. 아무리 우리가 (칸트의) 유명한 서명이 담긴 형이상학 사망증명서를 손에 쥐고 있어도 이런 일은 어쩔 수 없이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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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르빈 슈뢰딩거(Erwin Schrodinger), <<물리학자의 철학적 세계관(Meine Weltansicht)>>(김태희 옮김, 필로소픽, 2013), pp. 2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