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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베르토 에코: 오늘의 인용-텍스트와 시간적 거리

 

- 아래의 글은 장 필리프 드 토낙이 사회를 보며 움베르토 에코와 장클로드 카리에르라는 "세기의 책벌레들이 펼치는 책과 책이 아닌 모든 것들에 대한" 대담를 수록한 책인 <<책의 우주>>(임호경 옮김, 열린책들, 2011)의 197-9쪽인 실린 에코의 말을 옮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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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하나의 출처에 의지하여 과거를 재구성하는 일은 절대 삼가는 게 좋습니다. 어떤 종류의 텍스트들은 시간적 거리가 있으면 해석이 불가능해지니까요. 난 이 주제와 관련하여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나 알고 있어요. 지금부터 약 20년 전에, 미국 항공 우주국(NASA)인지, 아니면 다른 미국 정부 기관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여하튼 이들이 앞으로 1만년 동안―천문학적인 시간이라 할 수 있겠죠―방사능을 방출할 수 있는 핵폐기물을 어디에다 묻어야 하는지의 문제로 고민했답니다. 그런데 문제는 폐기물을 묻을 장소를 어디선가에서 찾아낸다 하더라도, 접근을 금지하기 위해 그것 주위에 어떤 표시를 해놓아야 하는 거였어요.

 

지난 2, 3천 년 동안 우리가 해독의 열쇠를 잃어버린 언어가 한둘이 아니지 않습니까? 만일 5천 년 후에 인류가 사라져 버리고, 먼 외계에서 방문객들이 온다면, 이 외계인들에게 그 문제의 지역에 들어가서는 안 된다고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그래서 미국 기관의 전문가들은 언어학자이자 인류학자인 톰 시비오크Tom Sebeok로 하여금 이러한 난점을 해결할 수 있는 의사소통 형태를 연구하게 했습니다. 시비오크가 가능한 해결책들을 모두 검토해 본 끝에 내린 결론은 그것이 탄생한 맥락 외부에서 이해될 수 있는 언어는―심지어 그림 문자도―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동굴 속에서 발견된 선사 시대의 도형들의 의미를 확실하게 해석해 낼 수 없습니다. 심지어는 상형 문자로 표현된 언어도 진정으로 이해할 수는 없지요. 시비오크가 생각하는 유일한 가능성은 어떤 종교 조직 같은 것들을 만들어, 그 가운데에 어떤 금기를 이어 가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건들지 말 것>, 혹은 <저것은 먹지 말 것> 같은 금기 말입니다. 금기란 세대가 바뀌어도 계속 전승될 수 있는 것이니까요. 나는 다른 아이디어가 있었습니다. 뭐, 그렇다고 해서 미국 우주 항공국에서 돈을 받은 것은 아니고, 그냥 나 혼자만 해본 생각이었죠. 그게 뭐냐면, 핵폐기물을 묻되, 매우 희석된 상태, 즉 방사능이 아주 약한 상태의 폐기물을 맨 윗층에 두고, 점차로 방사능이 강한 층들을 깔아 나가는 겁니다. 만일 외계인의 실수로 그 폐기물이 손이나 혹은 손처럼 사용하는 다른 기관이 닿는다 하더라도, 그는 단지 손가락 한 마디를 잃게 될 뿐입니다. 만일 더 해본다면 손가락 하나를 잃게 되겠죠. 하지만 그가 더 이상 고집을 부리는 일은 없으리라고 확신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