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윌리엄 제임스: 오늘의 인용-관념론적 기질과 유물론적 기질

 

"

내가 의미하는 것의 예로서 관념론과 유물론을 들어보자. 둘 다 동등한 이론적 명료함과 일관성을 제공하며, 우리의 기대를 동등하게 잘 결정한다고 일단 가정하자. 관념론은 어떤 정서적 기질을 가진 사람이 선택할 것이고 유물론은 다른 정서적 기질을 가진 사람이 선택할 것이다. 바로 오늘날 화해와 친숙함을 좋아하는 모든 감상적인 사람들은 관념론적 믿음의 경향을 보인다. 왜 그런가? 관념론은 사물들의 본성과 개인적 자아들 간의 혈연성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의 사유는 우리가 가장 친숙해하고 가장 덜 두려워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주가 본질적으로 사유라는 말은 나 자신이 적어도 잠재적으로 전체라는 것이다. 극단적으로 낯선 구석은 없고 전반적으로 편재하는 친숙함이 있다. 민감하게 자기본위적인 사람들에게는 이 실재 개념이 편협하고 폐쇄적인 병실의 분위기를 확실하게 제공한다. 감상적이고 까다로운 모든 것들은 그것에 의해서 신성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그가 소유한 권능(거침, 가혹함, 파도, 북풍 요소, 인격을 부정하는 자, 민주주의자)을 부르기 때문에 상식을 가진 모든 강한 자들이 거기에서 기꺼이 느끼는 실재의 요소는 사라진다. 왜냐하면 영적 교감의 욕망에 너무 거슬리기 때문이다. 극단적 반대에 대한 논쟁적 반응으로서 많은 사람들을 유물론적 또는 불가지론적 가정으로 내모는 것은 바로 이 요소를 즐기는 것으로부터이다. 그들은 전적으로 친숙함으로 구성되어 있는 삶에 염증을 느낀다. 인격에서 벗어나고, 우리의 자아에 어떤 존중심도 없는 힘의 행위에 빠지고, 시류가 우리를 덮치더라도 흐르도록 내버려두려는 저항할 수 없는 욕망이 때때로 생긴다. 이 두 종류의 정신적 기질의 경쟁은 언제나 철학에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계속해서 사물들의 중심에 있고 우리가 그것들을 가지고 행위할 수 있는 이성, 속죄를 주장할 것이며, 다른 사람들은 우리가 그것에 대하여 반응해야 하는 무감각한 사실의 불투명함을 주장할 것이다.

"

――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 <<실용주의>>(정해창 편역, 아카넷, 2008), pp. 4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