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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비 브라이언트: 오늘의 에세이-존재 양태 또는 소통 체계로서의 철학

 

존재 양태로서의 철학

Philosophy as A Mode of Existence

 

―― 레비 브라이언트(Levi Bryant)

 

라투르(Latour)의 <<존재 양태들에 대한 탐구(Inquiry into Modes of Existence)>>와 루만(Luhmann)의 구별짓기 이론에 기대어 우리는 "어떤 특수한 소통 형식그런 소통 형식으로 인식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와 같은 의문들을 제기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라투르의 경우에, 과학이나 종교에서는[...] 이 영역들 속에서 일어나는 언명이나 언술 행위를 '과학적 언술 행위(speech act)" 또는 "종교적 언술 행위"로 인식할 수 있게 만드는 특정한 '적실성 조건(felicity conditions)'이 존재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라투르는 자신의 이전 작업의 일부에 대한 암묵적인 비판을 실행한다. 과학학에 대한 그의 저술물들을 고려하자. 그런 저작들에서 그는 비정치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과학의 작업이 사실상 모든 종류의 정치가 어떻게 배어들어 있는지 보여주었었다. 그런데, <<양태들>>의 라투르는 많은 현업 과학자들이 그가 제시하는 주장들 가운데 일부를 거부할 것이라는 점을 인식한다. 즉, 그들은 자신들이 행하는 일의 이런저런 측면에 정치가 연루되어 있다는 점을 부정하지는 않을 것이지만, 라투르가 주의를 끄는 것들 가운데 일부가 과학적 진술이라는 점은 부정할 것이다.

 

이것 때문에 라투르는 다른 입장에 위치하게 된다. 한편으로, 그의 행위자 연결망 이론의 핵심 정신은 행위소들이 스스로 행하고 있는 일을 서술하고 이해하는 방식에 대한 존중에 놓여 있다. 예를 들면, <<비환원자들(Irreductions)>>에서 라투르는, 예컨대 수녀의 담론이 경제적 관계나 외디푸스적 쟁점들의 은폐된 반영물일 뿐이라는 점을 즉각적으로 보여줌으로써 그의 담론을 무시한다는 점에 대해 나중에 그가 "사회적인 것들에 대한 사회학"이라고 부르게 되는 것을 혹평한다. 그런데, 어딘가 다른 곳에서 라투르가 과학자들의 작업을 분석하게 되었을 때, 그는 바로 이런 일을 행하고 있는 듯 보인다. 예를 들면, <<과학의 실천>>에서 무엇보다도 그는 도서목록과 참고문헌들이 제시되고 있는 주장에 대한 직접적인 뒷받침이 아니라 논쟁자를 겁먹게 하기 위한 수사학의 형식들이라고 단언한다. 이와 같은 분석들을 통해서 라투르는 자신이 행하고 있는 일에 관한 과학자들의 자기서술을 무시하는 듯 보인다. 라투르가 여전히 일관성을 유지할 수 있으려면, 그는 화자의 자기서술의 무게에 대한 존중을 유지할 수 있는 동시에 그 화자의 작업에 이런 다른 연결망들이 어떻게 배어들어 있는지도 보여주는 이론적 틀이 필요하다. 이것이 <<양태들>>이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유사선험적 견지에서 그것은 어떤 언명을 이런저런 유형의 언명으로 규정하는 동시에 다른 언명들이 어떻게 그런 존재 양태에 속하지 않을 것인지도 보여주는 적실성 조건의 사회학을 개발하고자 한다.

 

루만은 조작적 폐쇄성과 구별짓기에 관한 자신의 이론으로 비슷한 것을 꾀한다. 루만의 경우에, 조작적으로 폐쇄된 체계―예컨대 종교―는 언명들을 구성하며, 그리고 특수한 구별짓기와 코드들을 사용함으로써 환경 또는 더 넓은 세계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에 대응하는 체계다. 다시 말해서, 각 영역―정치, 종교, 과학, 예술, 사랑 담론 등―은 언명이 그런 유형의 소통인지 아닌지 결정하는 어떤 적실성 조건을 갖는다. 예술가들의 공동체는 어떤 언명이 예술에 관한 언명인지 아닌지 또는 어떤 작품이 예술 작품인지 아닌지 결정하는 일단의 구분짓기 또는 코드들을 갖추고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어떤 특정한 예술 스튜디오의 월간 예산 보고서는 역사상 그 시점에서 그런 소통 형식을 좌우하는 어떤 코드에도 들어맞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예술에 관한 언명이 아닐 것이다(루만의 경우에 소통 체계를 좌우하는 코드와 구분짓기는 역사 전체에 걸쳐서 진화하고 변화한다). 마찬가지로, 루만의 경우에는 연인들이 참여하고 그 둘 사이의 소통이 사랑에 적절한지 아니면 사랑의 담론 바깥에 놓이는 다른 무언가에 적절한지 결정하는, 사랑을 좌우하는 소통 체계가 있다. 여기서 루만의 경우에는 그 어떤 것이라도 조작적으로 폐쇄된 체계의 영역에 잠재적으로 진입할 수 있다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예를 들면, 스튜디오의 월간 예산 보고서가 예술적 행위나 진술이 될 수 있는 상황이 있을 것인데, 그것이 예술적 소통을 구성하는 코드에 따라 통합될 때에만 그렇다(예를 들면, 예산 보고서가 표구되어 벽에 걸리거나, 또는 일단의 행위 예술가들이 그 숫자들을 자신들의 육체, 의상, 어떤 소도구와 관련시키는 등). 다시 말해서, 조작적 폐쇄성은 조작적으로 폐쇄된 한 체계에서 발신된 소통이 다른 한 체계로 진입할 수 없다는 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다른 체계에 진입할 때 그것은 그 다른 체계를 좌우하는 코드와 구분짓기에 따라 통합될 것이라는 점을 의미한다.

 

철학이 하나의 존재 양태 또는 소통 체계라면, 나는 그것의 적실성 조건, 코드, 또는 구분짓기가 무엇일지 궁금하다. 철학적 진술 또는 언술 행위를 과학적 진술, 종교적 진술, 정치적 진술, 예술적 진술 등이 아니라 철학적 진술로 인식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어떤 진술이 철학적 진술에 대한 철학적 대응이 되기 위해서는 어떤 조건을 충족해야 하는가? 다시 말해서, 여기서 문제는 어떤 규범 덕분에 우리는 철학을 철학으로 식별할 수 있게 되는가?

 

확실히 나는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갖고 있지 않으며, 심지어 가설도 갖고 있지 않다. 내가 그 문제를 제기하는 까닭은 그 쟁점이 이런저런 형식으로 나타났던 최근의 수많은 논의들 때문이다. 그러므로, 유물론과 관련된 나의 진술에 대응하면서 최근에 한 친구가 내게 유물론이 참이라면 철학과 과학을 구별짓는 것은 무엇인지 물었다. 우리는 그냥 철학을 버리고 존재가 무엇인지 과학이 말해주는 것에 만족할 수 있지 않겠는가? 개인적으로 나는, 과학이 전혀 알지 못하는 어떤 특수한 유형의 존재가 있다―나는 이것이 그 어떤 비판에도 끄덕하지 않으며 우리로 하여금 공교롭게도 불쾌하게 여겨지는 그 어떤 실험적 발견물도 거부할 수 있게 하는 나쁜 종류의 형이상학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우려한다―고 주장하는 하만(Harman)의 노선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철학에는 철학과 과학을 구별짓는 독특한 것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두 실천 영역 내의 진술들을 구별할 수 있게 하거나, 또는 적절한 철학적 진술과 비적절한 진술을 구별할 수 있게 하는 조작적 구별짓기 또는 적실성 조건 집합이 있다는 점을 의미한다.

 

다른 한 토론에서 나의 한 친구는 철학자들의 예로서 예수와 어떤 인도 사상가들 같은 인물들을 인용했다. 내 성향―그리고 나는 여기서 내가 틀릴 수 있다는 점을 전적으로 고백한다―은, 그들의 진술들에는 철학적 진술과 닮은 요소들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이것들은 철학적 진술이 아니다(명백히 그것들을 철학적 진술로 변환시킬 방법으로 언급될 수 있을지라도 말이다). 또 다시, 이런 진술들이 다른 한 존재 양태 또는 소통 체계에 속한다는 것을 식별할 수 있는 능력은 이런 진술들을 포괄하는 적실성 조건 또는 구별짓기의 존재를 함의한다. 그런 적실성 조건은 무엇인가? 나는 모른다.

 

내 경우에, 이런 문제들에 대한 한 가지 좋은 해답은 어떤 요구 사항들을 충족시키고 어떤 것들을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처럼 보인다. 첫째, 그리고 무엇보다도, 철학적 진술들에 고유한 코드에 대한 훌륭한 설명 또는 철학을 소통 체계나 존재 양태로 규정하는 적실성 조건은 니체, 카르납, 나가르주나(용수) 등과 같은 사상가들(이 사상가들의 저작이 모두 철학적 진술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가정하자... 니체는 철학자가 아닐지도 모르는데, 누가 알겠는가?)을 포함할 수 있도록 충분히 포괄적이어야 한다. 둘째, 그런 설명은 철학 사상에 있어서 매우 다양한 변양태들을 허용할 수 있도록 충분한 가소성을 지닌 적실성 조건을 명시적으로 표명해야 한다. 여기서 문제는 무엇이 진정한 철학인지라는 것이 아니라, 바로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어떤 진술을 철학적인지 아닌지 인식할 수 있게 하는지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내 경우에, 역사상 한 시점에서는 철학적 진술로 간주되었을지도 모르는 것이 이제는 그렇게 간주되지 않을 것이고, 과거에는 철학적 진술로 간주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것이 이제는 철학적 진술로 간주될 수 있도록, 그런 설명은 코드 또는 적실성 조건이 진화한다는 점을 인식해야 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에 덧붙여, 적실성 조건에 관한 좋은 진화적 시각은 존재 양태 또는 소통 체계 안에서 일어난 내재적 변형과 내부적 변형들이 어떻게 구분짓기에 있어서의 이런 돌연변이들을 초래했는지에 대한 어떤 설명도 제공해야 한다(즉, 그것은 존재 양태 밖에 있는 인자들에 호소하지 말아야 한다). [...]

 

*****

 

[...] 예수가 철학자인지 여부에 대한 의문이 존재하는 이유는 그가 자신의 주장에 대한 근거를 제시하는 방식과 관련이 있다. 권위(신, 자신의 신성)나 성서에 호소하는 것은 철학적 진술들의 영역에서 벗어난다. 오히려, 어떤 진술이 철학적이기 위해서는 이성이나 관찰에 정초할 필요가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소크라테스와 예수가 대립된다. 예수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신이기 때문에 내가 말하는 것은 참이다."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말한다. "그것을 뒷받침하는 이유들 때문에 내가 말하는 것은 참이다." 계시에 의거한 담론은 결코 철학일 수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

 

[...] 내가 루만의 논술을 이해하고 있는 한에 있어서 소통 체계들과 관련된 것들 가운데 하나는, 그것들이 세상의 여타 소통 체계들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지만―여타의 소통 체계들로부터 진술들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을 전제하고―자체의 코드에 한정되는 방식으로 그렇게 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조작적 폐쇄성은 어떤 체계가 세상의 다른 것들을 만나지 않는다는 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체 코드의 제약을 받으면서 그런 것들을 수용한다는 점을 의미할 뿐이다. 라캉의 환상 구조의 견지에서 이것에 관해 생각하자. 주체는 타자들이 말하고 있는 것을 듣지만, 그들의 대인 관게들을 구성하는 환상의 필터를 거쳐서 듣는다. 제인은 마이크에게 무언가를 말하고, 이것은 제인이 의도했던 것과는 상당히 다른 방식으로 마이크의 환상 구조를 거쳐서 걸러지며 가공된다. 이것이 소통 체계과 관련된 상황이다. 예를 들면, 경제는 여타의 담론 형식(종교, 사랑, 정치, 예술 등)에 관여할 수 있지만, 경제적 견지에서 관여한다. 철학이 하나의 소통 체계이고 코드 또는 구분짓기의 집합에 의해 좌우된다면, 세상의 다른 모든 것들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지만, 자체의 진술들을 좌우하는 코드에 맞추어 그런 것들을 변형시킬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