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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브 풀러: 오늘의 에세이-구십 도 혁명

 

구십 도 혁명

Ninety-degree revolution

 

좌와 우가 사라지고 있다. 정치의 진정한 문제는 이것일 것이다. 땅을 바라보는가, 아니면 하늘을 지향하는가? 

 

―― 스티브 풀러(Steve Fuller)

 

'좌익(Left-wing)'과 '우익(Right-wing)'이라는 이데올로기적 이분법은 지금까지 경기가 좋았다. '익(날개)'이라는 은유 자체는 프랑스 혁명 이후 국민의회의 자리 배치에서 비롯되는데, 국민의회에서 루이 16세의 지지자들은 통령의 오른편에 모여 앉았고 혁명론자들은 왼편에 앉았다. 또한 그 도식은 왼손을 의심('왼쪽'을 나타내는 라틴어 sinister는 불길하다는 뜻을 지닌다)과 관련시키고 오른손을 신뢰―이 경우에는, 기성 권위에 대한 신뢰―와 관련시키는 전통적인 연상을 떠올리게 한다. 지금부터 30년도 더 전에 트랜스인간주의적 저자이자 기업 자문가였던 어떤 이란인 제트족 바람둥이가 이 분열은 90도 회전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F M 에스판디어리(Esfandiary)―또는 1970년대에 자칭하기 시작했던 대로 'FM-2030'―는 '상익(up-wing)'과 '하익(down-wing)'이라는 정치적인 우선적 배치로의 축 전환을 예측했다. 이 새로운 도식의 방향적 연상들은 꽤 문자 그대로인데, '상익'은 하늘을 향해 바라보는 것을 의미하고, '하익'은 땅을 향해 바라보는 것을 의미한다.

 

FM-2030은 애리조나 주에 소재하는 인체냉동보존술의 메카인 알코어(Alcor) 재단에서 자신의 유리화된 시체가 부활을 기다리고 있는 고질적인 상익이었다. 그런데, 생태 운동이 열기를 더해가고 있었음에도, FM-2030은 하익 경향이 최소한 자신의 정치적 신념만큼이나 많은 열정을 생성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을 예상하지 못했다. 오늘날 하익들은 스스로를 '녹색주의자(Green)'라고 자랑스럽게 규정한다. 상익들의 경우에, 그들은 '흑색주의자(Black)'―그리고 단순히 그들의 1980년대 복장 감각 때문만은 아니었다―로 자신들의 색깔을 규정하기 시작했다. 영국의 중도좌파 두뇌집단 데모스(Demos)의 2004년 연구보고서에서 '블랙 스카이 싱킹(Black Sky Thinking)'이라는 어구가 만들어졌고, 지난 십 년 동안 그것은 칠흙 같은 우주 공간 전체를 인간이 거주하기에 적합하게 만드는 계획들을 가리키는 데 점점 더 많이 사용되었다.

 

FM-2030 자신은 이 전망을 꽤 추상적인 방식으로 이해했다. 2000년에 그가 사망하기 전에 몰두한 주요한 관심사는 어느 때 어느 곳에서도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능력―오늘날의 스마트폰 소유자들이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그런 종류의 편재성―이었다. 다시 말해서, 그의 초점은 수송이 아니라 통신에 집중되었다. 오늘날 미합중국의 라이프보트 재단(Lifeboat Foundation)과 세계적인 이카루스 항성간 재단(Icarus Interstellar Foundation)의 블랙 스카이 연구자들의 목표는 살과 피를 상당히 넘어서는 것―지구의 자연 서식지의 측면들을 공간 여행을 무한정 지속할 수 있는 비행선에 집어넣는 것―이다. 이 목표는, 자연이 지구에 묶인 형식으로 합당하게 지속시킬 것이라고 예상될 수 있는 것의 범위 내에 적합하도록 인간의 열망을 억제하기를 바라는 녹색주의자들의 목표에 대해 거의 정반대다.

 

정치적 풍경이 점진적으로 90도 축 회전을 하고 있다는 FM-2030의 주장이 옳았다면, 이데올로기적 색깔 도식이 적색과 청색(유럽 좌파와 우파의 전통적인 색깔)에서 흑색과 녹색으로 변화하고 있는 증거로서 무엇이 간주될 것인가? 좌파-우파 견지에서 규정된 정치에 대한 젊은이들의 잘 알려진 불만과 흑색주의자와 녹색주의자의 핵심적인 기획들에 대한 그들의 자발적인 참여에서 시작할 수 있다.

 

흑색주의자 진영의 경우에는 일반적인 자동차를 드래그 레이서로 변환시킬 수 있는 것과 거의 동일한 방식으로 유기체들을 역설계하고자 하는 디아이와이바이오(DIYbio, 스스로 하기 생물학) 운동이 있다. 멸종된 종의 부활을 추진하는 하버드 의과대학의 유전학자 조지 처치(George Church)는 DIYbio 운동에서 최초의 진정한 풀뿌리 선진 과학, 또는 '합성생물학(synthetic biology)'을 본다. DIYbio 운동 열성가들은 이미 현존하는 DIY '개방형 소스' 태도들을 컴퓨터 코드에서 유전자 코드로 기쁘게 이전하는데, 그것은 유기체를 조작과 조정의 현장으로 만든다. 그들의 기본 입장은 자유방임주의적이고, 그래서 관습적인 도덕의 과학적 단견성을 기피하며 가끔 조롱하기도 한다. 그런데, 자유방임주의자들과 달리, 일반적으로 그들은 세계의 문제들에 대한 거대한 '기술적 해결책들'의 존재도 믿는데, 이것은 실리콘 밸리의 골칫거리인 기술 관련 저술가 에프게니 모로조프(Evgeny Morozov)가 '해결책주의(solutionism)'라고 정기적으로 비웃는 태도다. 흔히 TED 강연에서 두드러지는 이런 모습을 한 흑색주의자들은 프리드리히 하이에크 유형의 우익이 아니라, 앙리 드 생시몽과 오귀스트 콩트의 19세기 사회주의적 전통에 속하는 사회공학자처럼 보인다.

 

녹색주의자 진영의 경우에는 환경 운동의 급진적인 한 분파가 의학 시험과 화장품 시험을 위해 동물들을 수용한 실험실들을 파괴하기 시작한 1970년대부터 시작된 '동물 해방'에 대한 최초의 요청이 있다. 활동가들은 그 두 종류의 연구를 뭉뚱거려 인류의 이기심과 망상의 증거로 여겼다. 그들의 경우에 인류의 궁극적 가치는 인간의 지상적 본성(자연)에 놓여 있다. 인간의 초점은 인간을 다른 생명 형태들과 구별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통일하는 것에 집중되어야 한다고 그들은 믿었다.

 

이런 맥락에서 전지구적 생태 위기의 위협은 녹색주의자들에 큰 도움이 되었다. 그것은 녹색주의자들에게 인간의 동물 희생은 지구에 대한 더 일반적인 무시, 생명 자체의 기반을 약화시킬 수 있는 무시를 반영한다고 규정하는 규범적 표제어를 제공했다. 구좌파의 정의의 수사학은 녹색 운동에서 명백하다. 그렇지만, 인간의 특권이라는 관념을 제거함으로써 녹색주의자들은 궁극적으로 천명되는 자연적 질서라는 관념에 동조하는 전통적 우파에서 친연성을 찾아낸다.

 

지금까지 나는 이런 이데올로기적 회전을 주어진 것으로 받아들이는―흔히, 확실히, 선지적 어른들에 이끌려서― 젊은 세대의 입장에서 그 회전을 묘사했다. 그런데 전통적 좌파와 우파가 이 새로운 상하 방향에서 중요한 방식으로 나누어지고 있다는 증거는 무엇인가? 내가 이미 넌지시 말했듯이, 상익 흑색주의자들은 자유방임주의적 구우파와 기술자주의적 구좌파를 조합하는 반면에, 하익 녹색주의자들은 보수주의적 구우파와 공동체주의적 구좌파의 요소들을 결합한다.

 

몇몇 독자들―또 다시 아마도 젊은 독자들―의 경우에는 흑색과 녹색의 정치적 배치가 본래의 적색과 청색의 배치보다 더 명료하고 직관적인 듯 보일 것이다. 여기서 현대의 좌파와 우파 사이 투쟁의 주요한 뼈대는 사회적 정의를 이행하는 국가의 특권이었다는 점을 떠올릴 가치가 있다. 일반적으로 이것은, 좌파는 인정하지만 우파는 인정하지 않는 의무다. 그렇다 하더라도, 둘 가운데 하나의 입장을 취하는 이유들은 각 진영 내에서 상당히 다양했다. 기술자주의적 좌파는 사회적 정의를 사회적 진보라는 더 큰 의제의 일부로 여겼던 반면에, 공동체주의적 좌파는 질 좋은 삶을 확보할 필요성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었다. 자유방임주의적 우파는 사회적 정의라는 바로 그 관념을 본질적으로 권위주의적인 것이라고 일축했던 반면에, 보수주의적 우파는 교회와 가족 같은 전근대적 제도 내에서 더 '자연적인' 형태의 정의를 추구했다.

 

낡은 좌파-우파 체계에서 '국가'는 일반적으로 인정받은 영토 내에서 살고 있는 인구들을 위해 법을 제정하고, 기본 욕구에 기여하며, 번영을 조장하는 영속적 권위를 부여받은 근대 특유의 법인 행위자를 가리킨다. 나이든 독자들에게 이 점은 명백한 듯 보인다. 그런데 내가 그것을 분명히 설명하는 까닭은, 사람들이 점점 더 국경과 종 경계를 가로질러 소속되고 있으며, 외계 지능을 발견하기를 열망하는 사람들도 있는 세상에서 국가는 훨씬 덜 중요하고, 심지어 명백한 걸림돌인 듯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시각에서 바라보면, 지난 이 세기 동안 좌우 분열를 규정한 기본적인 딜레마―국가 권력을 확장할 것인가, 아니면 제한할 것인가?―는 약간 진부한 듯 보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사회적 정의의 약속들을 이행하지 못하는 국가의 두드러진 실패―거대한 한 편의 수사학적 거리두기로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복지국가의 재정 위기'라고 부른 것―를 고려하기 전이다. 의도가 좋은, 흔히 재원 조달이 잘 되고 사실상 때때로 부분적으로 성공한 일련의 복지 프로그램들에도 불구하고 빈곤, 불평등, 그리고 민족 차별이 지속(부활이 아니라면)되었다는 점은 1980년 이후 좌파를 수세로 몰았다. 여기서 그 상황은, 교회가 후원했던 유럽 군주제의 장기적인 생존 가능성에 대한 의문이 심각하게 제기되었던 1780년대에 현대 우파의 선구자들이 직면했던 상황을 떠올리게 한다. 그런 신뢰 상실은 프랑스 혁명과 앞에서 언급한 좌우 분열의 등장을 초래했다. 마찬가지로 1980년대도 지배 담론―더 이상 섭리적인 신의 손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 진보의 행진―에 대한 널리 퍼진 회의주의에 의해 특징지워졌다. 그리고 두 경우 모두에서 선도적인 정치적 대응은, 빈자들이 어떤 정신적 또는 사회적 사다리를 올라가는 것을 돕는 것이 아니라, 고위험 환경으로 점점 더 현전되는 세상 속에서 그들의 물질적 생존을 확보하는 데 초점을 맞춘, 빈자들에 대한 가부장주의적 태도였다.

 

칼 폴라니(Karl Polanyi)의 고전 <<거대한 전환(The Great Transformation)>>(1944)은 고전적인 '토리' 가부장주의와 공동체주의적 좌파의 현대적 복지 사업 사이의 유사점들에 관한 풍부한 감각을 제공한다. 사실상 이런 경향들은 이데올로기 축의 임박한 회전에 있어서 녹색주의 운동 내부의 형식적인 통일을 위해 예정된 것이다. 영국 철학자 로저 스크루턴(Roger Scruton) 같은 정교한 보수주의 사상가들은 이미 그런 연결을 실행했다. 또한 좌파로 자칭하는 사상가들에서 일어난 아리스토텔레스적 사유 방식들의 흥미로운 부활 속에서 적색에서 녹색으로의 전환을 볼 수 있다.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적'이라는 낱말은 자체의 완전한 실현을 위해서는 특정한 종류들의 환경을 필요로 하는 생물학적 존재자이자 규범적 존재자로서의 '인간 본성'에 관한 강조를 가리킨다. 이런 감성을 특징짓는 것은 객관적으로 '자연적인' 인간임의 방식과 객관적으로 '비자연적인' 인간임의 방식이 존재한다는 더 일반적인 형이상학적 믿음인데, 그것에 대해서는 역사가 가장 믿음직한 원천이다.

 

아리스토텔레스로 전환한 현대 좌파의 요소들 가운데 이와 같은 세 가지 명확한 사례들을 고려하자. 첫 번째 사례는 인도 경제학자 아마르티아 센(Amartya Sen)과 미합중국 철학자 마사 누스바움(Martha Nussbaum)에 의해 조장된 '삶의 질'에 대한 '역량' 접근 방식이다. 이것은 복지국가의 정당화를 자체의 잠재적 구성원들의 합리적인 동의―존 롤스(John Rawls)의 <<정의론(A Theory of Justice)>>(1971)에서 제시되듯이―로부터 멀어지게 하며, 그리고 그 대신에 동의 여부와 무관하게 질 좋은 인간적 삶의 필요한 속성들에 대한 사회과학적 목록을 제시한다. 두 번째 사례는, 사회생활의 대부분 특질들은 실천의 전통을 통해 발달된 고유한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그런데 과학, 기술, 또는 시장으로부터 차용한 기준이 그것들의 권역을 개혁하는 데 사용된다면 이런 가치들은 훼손된다는 미합중국 정치철학자 마이클 샌델(Michael Sandel)의 명제다. 마지막으로, 독일 사회학자 위르겐 하버마스(Jurgen Habermas)가 있는데, 그는 태아에 대한 유전학에 근거를 둔 개입책들은, 그것들이 생명에 위협이 되지 않을 때에도, 인간 자율성의 자연적 기초를 파괴한다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견해를 공유하게 된다.

 

내가 좌파에 의해 이루어진 아리스토텔레스로의 전환을 '흥미로운' 것으로 특징지웠던 까닭은 그것이 19세기 자연학자 장 밥티스트 라마르크(Jean-Baptiste Lamarck)로부터 줄곧 종 범주의 관행성과 유기체의 가소성을 점점 더 강조해온 현대의 모든 생물과학을 무시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제 우리가 그 어떤 종도 원하는 대로 역설계할 수 있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럼에도, DIYbio 운동이 시사하듯이, 과학자들은 자발적으로 우리를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적 출발점에서 더 멀어지게 만드는 궤적으로 데리고 가고 있다. 더 중요한 점은, 대규모의 장기적인 사회적 전환에 대한 현대 좌파의 정치적 신념의 특징은 올바른 환경에서는 인간들이 실질적으로 개선될 수 있다는 믿음이었다는 것이다. 사실상 이 믿음은 심리학과 경제학에서 사회학과 정치학까지 현대의 모든 사회과학에 공통적인 것이었다. 그런 믿음은 여전히 상익에 의해 추진되고 있다. 그 믿음은, 인간의 자기변형에 대한 '자연적 한계'라는 관념을 지지하는, 공동체주의적 좌파을 비롯하여, 하익에 의해 폐기되어버린 듯 보인다.

 

자유방임주의적 우파와 기술자주의적 좌파가 FM-2030이 옹호했던 그 거대한 상익 경향을 뒷받침하는 공동 대의를 구성한다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 어디를 살펴보아야 하는가? 한 장소는 브레이크스루 연구소(Breakthrough Institute)인데, 그것은 선진 과학과 기술에 대한 자본주의적 투자를 지구와 그 너머에서 인류의 생존에 대한 열쇠로 여기는, 미합중국에 본부를 둔 환경 두뇌집단이다. 그 연구소 구성원들 대부분은 좌파적 성향인 듯 보이지만, 그들이 사회주의에 대한 어떤 신념을 지니고 있던 간에, 그것은 생시몽과 칼 마르크스가 그랬던 것과 거의 마찬가지로 자체를 자본주의 위에 건설되는 것―자본주의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으로 여기는 신념이다. 새로운 에너지원들에 대한 실험적 접근 방식들을 지지하는 그들의 다양한 변론들은 인간 조건에 관한 근본적인 낙관주의를 드러내며, 그래서 모든 새로운 실존적 위협은 형성 중인 기회다.

 

트랜스인간주의 철학자이자 알코어 재단(여기에 FM-2030의 유해가 냉동 보관되어 있다)의 이사장인 맥스 모어(Max More)에 의해 사용된 어법을 좇아서 나는 이런 접근 방식의 근본적인 윤리를 선제적(proactionary)이라고 서술한 적이 있는데, 그것은 대립적인 '예방적(precautionary)' 원리와는 달리 계산된 위험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추구한다. 확실히, 선제적 윤리의 활기를 돋우는 특징은 하익의 기본적인 가부장주의에 정반대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인간이 장기적으로 생존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그것은 하나의 종으로서의 인간의 독특함에 대한 더 설득력 있는 설명을 제공할 것이다.